김진숙 “먼 길 포기하지 않게, 긴 세월 쓰러지지 않게 버텨 주셔서 고맙습니다”

 

2월 25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 단결의 광장에서 열린 ‘소금꽃나무 김진숙 복직행사’에서 꽃다발을 받는 김진숙 지도위원. 사진=이용우
2월 25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 단결의 광장에서 열린 ‘소금꽃나무 김진숙 복직 행사’에서 꽃다발을 받는 김진숙 지도위원. 사진 이용우

2월 25일 오전 11시,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 사내 단결의 광장에서 ‘소금꽃나무 김진숙 복직 행사’가 열렸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아래 지도위원)의 이날 복직은 1986년 7월 14일 해고된 지 만 35년 7개월 12일 만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 문제는 부산 영도조선소가 대한조선공사에서 한진중공업으로 바뀌고, 다시 HJ중공업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2020년 김진숙 지도위원의 정년이 되면서 무산되는 듯했다.

하지만 김진숙 지도위원은 ‘복직 없이 정년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끈질기게 복직을 요구해 왔다. 그 과정에서 지난 23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와 HJ중공업 사용자 측이 ‘대한조선공사 해고자 김진숙의 명예로운 복직 및 퇴직’에 합의하면서 복직의 뜻을 이뤘다.

복직 행사에서 축사에 나선 문정현 신부는 “37년, 동료가 죽은 곳에 309일을 오르고, 병에 들어서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었다. 오늘 복직, 퇴직 지나치다. 이럴 수는 없다. 그래도 복직이란 이름으로 한 발짝을 뗐다. 노동 운동은 이렇게 해야 된다”라며 “자본이 아무리 세다 해도 우리 노동자에 굴복한 것이다. 이래 놨으니 앞으로는 더 쉬울 수 있다. 노동해방을 위해서 한 발짝 뗐으니 힘을 내서 한 발짝 더 뛰어 노동해방을 이루자“고 호소했다.

심진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은 “한진중공업은 대한민국 최초의 조선소다. 최우수 선박을 건조한 조선소가 아닌, 노사 갈등과 반목 투쟁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이제 부정의 아이콘은 역사 속으로 보내자. 김진숙 조합원을 HJ중공업 첫 복직이고 첫 정년퇴직자로 우리 가슴에 새기자.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단결하자”라며, “김진숙 조합원 복직에 한목소리를 내준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고 인사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복직 인사에서 “김진숙에게만 굳게 닫혔던 문이 오늘 열렸다. 정문 앞에서 단식을 해도 안 되고, 애원을 해도 안 되고, 피가 나도록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오늘에야 열렸다. 오늘 하루가 제겐 37년이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1983년부터 사용된 사원증(왼쪽)과 ‘소금꽃나무 김진숙 복직 행사’의 배경으로 쓰인 1984년 대한조선공사 시절의 김진숙(오른쪽). 사진=김진숙 지도위원
1983년부터 사용된 사원증(왼쪽)과 ‘소금꽃나무 김진숙 복직 행사’의 배경으로 쓰인 1984년 대한조선공사 시절의 김진숙(오른쪽). 사진 김진숙 지도위원

김진숙 지도위원은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이념이 굳세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의 상여를 메고 영도바다가 넘실거리도록 울었던 그 눈물들을 배반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경영진에는 “단 한 명도 짜르지 말고, 어느 누구도 울게 하지 말고, 하청노동자들 차별하지 말고, 다치지 않게 해야 이 복직은 의미가 있다”고 호소했다.

또한, 정치권에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어제 동료가 죽은 현장에 오늘 일하러 들어가는 노동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차별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들 그들이 목숨 걸고 외치는 말을 들어야 차별이 없어진다”라며, “빛도 이름도 없이 살아온 억울한 이름들을 불러 주고, 노동자들의 눈물을 씻어 달라”고 요청했다.

끝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세월. 37년의 싸움을 오늘 저는 마친다. 먼 길 포기하지 않게 해 주셔서, 긴 세월 쓰러지지 않게 버텨 주셔서 고맙다”라며, “끝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치며 복직 인사를 마무리했다.

이날 복직 행사는 희망버스에 함께했던 백기완 선생님의 영정과 함께 문정현 신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윤장혁 금속노조 위원장, 송경용 신부, 송경동 시인이 축사에 나섰다.

축하공연에는 임정득 민중가수가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에 곡을 붙인 ‘소금꽃 나무’를 불렀다.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동료들과 준비한 ‘흘러’란 곡으로 뒤를 이었다.

이날 김진숙 지도위원은 어둑한 새벽 공장 정문에서 출근하는 동료노동자들에게 따듯한 떡을 건네며 복직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퇴근길에 앞서 309일 고공농성을 했던 85호 크레인이 있던 장소를 둘러보고, 동료들과 함께 했던 공장 곳곳을 돌아보았다.

이어 대한조선공사, 한진중공업에서 정년퇴직 노동자들이 반드시 기념촬영을 하는 장소인 ‘대한민국 조선 1번지 표지석’ 앞 기념촬영으로 명예롭게 퇴직했다.

 

조선소 이름이 대한조선공사에서 한진중공업으로 현재는 HJ중공업으로 바뀐 대한민국 조선1번지 표지석에서 기념촬영하는 김진숙 지도위원. 사진 금속노조

김진숙 지도위원은 1981년 10월 1일 대한조선공사에 우리나라 최초 여성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1986년 2월 18일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되었고, 2월 20일 노동조합 대의원대회를 다녀온 후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유인물 150여 부를 제작 배포했다.

1986년 5월 20일부터 7월 2일 사이 군사독재 정권의 경찰에 의해 대공분실로 세 차례나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같은 해 7월 14일 ‘경찰 조사를 받은 사실을 이유’로 해고됐다.

2003년 10월 17일 김주익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자결하고, 같은 달 30일 곽재규 조합원이 자결하자 투쟁을 이어가 11월 15일 해고된 노동자 복직에 합의했다. 하지만 사측은 경총, 전경련 등 재계에서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해고노동자 21명 중 김진숙 지도위원만 복직을 거부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사측이 구조조정을 이유로 정리해고를 강행하자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 309일간의 고공농성과 희망버스 투쟁을 통해 자신을 제외한 해고자 전원 복직을 이뤄냈다.

2020년 6월 23일 정년을 앞두고 복직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독직 투쟁에 돌입하여, 12월 30일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희망뚜벅이 도보 행진’을 진행했다.

2021년 2월 김진숙 복직 촉구 청와대 앞에서 48일간 연대 집단 단식농성을 벌인 데 이어, 10월부터 김진숙 복직 촉구 릴레이 단식농성을 이어왔다.

2022년 2월 23일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진중공업지회와 HJ중공업 사용자 간 ‘2월 25일 자로 복직하고, 정년퇴직과 관련된 사항을 노사 협의로 정’하기로 하면서, 2월 25일 37년 만에 복직했다.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복직 인사 전문


김진숙에게만 굳게 닫혔던 문이 오늘 열렸습니다.
정문 앞에서 단식을 해도 안 되고, 애원을 해도 안 되고, 피가 나도록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오늘에야 열렸습니다. 37년입니다.
검은 보자기 덮어쓴 채 어딘지도 모른 채 끌려간 날로부터 37년.
어용노조 간부들과 관리자들 수십, 수백 명에게 아침마다 만신창이가 된 채 공장 앞 도로를 질질 끌려다니던, 그 살 떨리던 날로부터 37년입니다.
경찰들이 나서 집을 봉쇄하고, 영도로 들어오는 시내버스를 불심검문하고, 공장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닭장차에 군홧발로 짓이겨 넣던, 그 억장 무너지는 날들로부터 37년입니다.
훈련소 폐건물에 감금해 놓고 돌아가며 감시를 하던 그날들로부터 37년입니다.
그렇게 생이별한 아저씨들이 보고 싶어 눈물방울마다 아저씨들의 얼굴이 맺혀 흐르던, 그 사무치던 날들로부터 37년이 흘렀습니다.
그중 가장 보고 싶었던 허 씨 아저씨가 작년에 암으로 돌아가시고, 그 아드님으로부터 오늘 꽃다발을 받았습니다.
한 글자라도 아저씨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퇴직금과 재형저축으로 유인물을 만들고, 산복도로 골목골목 집집마다 “북받치는 이름으로 불러보는 조합원 여러분!” 그 제목의 유인물을 넣고 돌아서던 그 북받치는 날들로부터 37년 만에 여러분들 앞에 섰습니다.
오늘 하루가 제겐 37년입니다.


저의 첫 노조이자 생의 마지막 노조인 금속노조 한진지회 조합원 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의 동지였음이 제 생에 가장 빛나는 명예이고 가장 큰 자랑입니다.
심진호 집행부와 여러분들의 힘으로, 굳게 닫힌 문을 마침내 열어 주셨습니다.
이 낡은 한진중공업 작업복은 제가 입고 가겠습니다.
박창수 위원장이 입고 끌려갔던 옷.
김주익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마지막까지 입었던 작업복.
재규 형이 도크 바닥에 뛰어내릴 때 입고 갔던 그 작업복.
강서의 시신에 입혀져 있던 그 작업복은.
탄압과 분열의 상징이었던 이 한진중공업 작업복은 제가 입고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미래로 가십시오.
더 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그리고 더 이상 갈라서지 않는 이 단결의 광장이 조합원들의 함성으로 다시 꽉 차는 그 미래로 거침없이 당당하게 가십시오.
노조 위원장마다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해고되거나 죽었던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 이후 그토록 복직을 기다리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복수노조를 만들어 34살 최강서를 죽였던 한진중공업.
새로운 경영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단 한 명도 짜르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도 울게 하지 마십시오. 하청노동자들 차별하지 마시고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 복직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이념이 굳세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의 상여를 메고 영도바다가 넘실거리도록 울었던 그 눈물들을 배반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정치하시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하루 6명의 노동자를 죽여온 기업주들이 아니라 유족들의 말을 들어야 됩니다. 어제 동료가 죽은 현장에 오늘 일하러 들어가는 노동자의 말을 들어야 됩니다.
차별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들 그들이 목숨 걸고 외치는 말을 들어야 차별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동일방직, 청계피복, YH, 수많은 7,80년대 해고노동자들, 삼화고무를 비롯한 부산 지역 수많은 신발 공장 노동자들.
3,40년을 해고자로, 위장취업자로 빛도 이름도 없이 살아온 그 억울한 이름들을 이제나마 불러 주십시오.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맺힌 한을 풀어 주십시오. 아사히, 아시아나케이오, 건보공단, 도로공사 비정규직들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물을 씻어 주십시오.


이제 이 공장엔 11년 전 고철로 팔려나간 85호 크레인이 곧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희망버스로부터 11년,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함께해 주신 희망버스 승객 여러분.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특히 우리 부양지부 동지 여러분. 엄동설한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하고, 절을 하고, 글쓰기 강좌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셨던 여러분들.
드라이브스루에 함께 하시고, 청와대까지 함께 걸으셨던 여러분.
문정현 신부님, 그리고 오늘 사진으로 오신 백기완 선생님.
여러분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세월. 37년의 싸움을 오늘 저는 마칩니다.
먼 길 포기하지 않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세월 쓰러지지 않게 버텨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해고의 위기 앞에 선 대우버스 동지여러분들, 힘내십시오.


끝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 인사 영상 제공 :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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