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이 지나 밭 한쪽 샘이 솟는 웅덩이에서 기세 좋은 개구리울음이 들리더니 지난밤 내린 비로 울음의 성량이 줄어 겨우 들릴 듯 말 듯 합니다. 산 이마에는 상고대가 핀 것처럼 서설이 쌓여 있고, 산 아래에서는 는개가 스멀스멀 퍼지고 있습니다.

 

사진 정헌호

마당에는 경자와 신축의 모진 영하의 바람을 견딘 운룡매가 시절이 닿았음인지 매향이 저의 코에 닿을 듯 말 듯 한 향기를 날리고 있습니다. 우중이라도 지붕 없는 마루 쪽 창을 열면 산새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제 보름 정도면 온 밭에 ‘오얏꽃’ 향이 퍼질 것입니다. 지난해 봄 은은한 ‘오얏꽃’ 향에 둘러싸여 무릉도원으로 귀양 온 신선이라 여기며 세상 시름을 잊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발아래 작은 들꽃은 또 어찌나 참한지요.

작고 별 모양을 닮은 쇠별꽃, 다섯 장의 꽃잎이 마치 열 장처럼 보이게 하는 마술의 별꽃
방석 같은 잎을 가지며 꽃대가 황새 다리처럼 가늘고 긴 황새냉이, 꽃대와 잎이 바닥에 딱 붙은 다닥냉이, 멀끔하니 키가 큰 장대냉이, 싸리냉이
연분홍 바탕에 작은 줄무늬를 가진 개불알풀, 선개불알풀, 눈개불알풀도 보입니다.

조금 있으면 밭둑에는 노란 애기똥풀도 필 것입니다.
산정의 서설이 걷힐 즈음이면 양지바른 곳 눈 속에서 밝은 노란색의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 것이며, 한쪽에는 변산 바람꽃, 너도바람꽃, 꿩의바람꽃도 덩달아 봄 채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분홍노루귀, 흰노루귀, 푸른노루귀는 행여 등산객의 눈에 띌라, 바위 아래 햇살 드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입니다.

위암이라는 병마를 툴툴 털고 털털거리는 경운기에 부인을 태우고 과수원을 오르내리는 노인회장의 동구 밭에서는 노란 수채화 물감을 뿌린 듯 산수유가 온 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낮은 산 아래 양지바른 나목들 사이로 연노랑의 생강나무 꽃이 산중 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야트막한 소나무들 사이로 연분홍과 자홍색의 참꽃은 곧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홍의 붉은빛은 두견새가 밤새 울어 대어 피를 토한 것이라는 전설 때문에 ‘두견화’라고도 한답니다.
늦봄이면 맛을 볼 수 있는 흰 살구꽃, 후덕한 맏며느리를 닮은 백목련, 새침데기 작은며느리를 닮은 자목련, 산중의 기상이 한데 모인 듯한 돌배나무 꽃도 있습니다.

 

사진 정헌호

윤제학 작가는 봄 이야기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범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봄 햇살을 두엄에 섞는다”라고 표현을 해 놓았습니다.

 

“봄 햇살을 두엄에 섞어 넣어 농사를 짓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벌은 꽃에서 꿀을 얻고 꽃은 벌 덕분에 열매를 얻습니다. 벌과 꽃은 호혜적인 관계입니다. 진정한 호혜는 이득의 크기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 공생의 묘리입니다.”

- <깊은 산 외딴 집>, 윤제학, 도서출판 우리동네, 2018

 

저도 지난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을 2.5톤 트럭 열 차분의 쇠똥 거름에 섞어 온 밭에 골고루 뿌려 두었습니다. 그 거름이 매서운 보현산 겨울바람에 황태 마르듯 맛깔나게 익어 지금, 이 봄의 꽃들과, 이 봄의 자연과, 이 봄의 저와, 조그만 자두밭에서 진정 이득을 따지지 않는 호혜적 관계를 맺으며 공생의 묘리를 찾도록 해 보아야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과거를 회상한다고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저도 별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멀리는 아니더라도 봄의 끝자락까지만이라도 내다보고 살아야겠습니다.
제 보물창고 같은 창고 방을 정리하다가 40여 년 전 고등 시절부터 수년간의 일기장 십여 권이 나왔습니다.  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갑툭튀’라고 하지요.
봄 풍경에 홀딱 빠진 농사꾼인 저와 자연과의 호혜적 관계가 중요합니다. 치기 어린 40여 년 전의 저의 과거와, 어이없는 대선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는 오늘의 저도 스스로 모난 구석이 있음을 인정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설정해야겠습니다. ‘겨우 5년?’ 이 때문에 제가 화병이 날 이유가 없어야겠습니다. 저와는 생각이 다른 분들도 있겠지요.
그러한 분들과도 이익을 앞세우지 않는 호혜적인 공생의 묘리를 찾도록 해야겠습니다.

 

사진 정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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