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잔혹사를 성찰한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포스터 이미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포스터 이미지

1_ <300>을 통해 본 고대의 우생학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2007)은 이후에 등장한 숱한 액션 영화는 물론 대중문화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큰 인기와 반향을 얻은 ‘스타일리시’한 오락물이다. 하지만 배경이 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데르모필레 전투 고증은 형편없다. 실제 역사를 뜯어고치다시피 통째로 왜곡한 내용 때문에 역사물로서는 흠결을 넘어 해로운 존재로 취급될 정도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노블 원작 역시 작가의 위상이나 업적보다 정치적 올바름 측면은 심각한 문제를 공유한다)

특히 실제 역사에서 난공불락 데르모필레의 골짜기 뒤로 돌아가는 샛길을 페르시아에 몰래 알려준 것으로 악명을 남긴 에피알테스의 경우, 원래는 스파르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등이 굽은 장애를 선천적으로 가진 나머지 그의 부모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멀리 피신해 키운 걸로 영화적으로 각색되는데 이 인물의 설정이 좀 심하게 막 나가는 편이다. 전장에 막 도착한 레오니다스 왕에게 완전무장을 한 채 찾아간 에피알테스는 전쟁에 참전해 스파르타 인으로서 명예를 회복하길 청했다. 하지만 왕에게 거절당한 후, 복수심에 페르시아 진영으로 향한다.

분명 원작자 건 감독이건 에피알테스에 대해선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배신자’ 캐릭터로 설정했을 테다. 하지만 영화의 역사 왜곡이 안드로메다로 치닫고, 판타지를 아득히 초월한 설정구멍이 인터넷 ‘밈’화 되는 지경에 이르자, 이 목적성으로 소비되면 족하던 악역은 기묘하게 활용되며 회자되기 시작한다. (극 중에서도 묘사된 바대로) 오랜 기간 무예를 연마해 한사람 몫은 능히 해낼 것처럼 묘사되는 에피알테스가 레오니다스 왕에게 거절당한 건 당시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 세계의 군사 전술이 오직 ‘호플리테스’(중장보병 방진)뿐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의 궁수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300명의 보병은 커다란 원형 방패로 서로의 측면을 빈틈없이 감싸며 한 덩어리로 뭉쳐 있어야 하는데 에피알테스는 선천적 신체 조건상 이 작전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게 레오니다스의 “합리적 사유에 의한 배제”였다.

 

"300" 스틸 이미지
<300> 스틸 이미지

반면에 기대도 않았던 귀중한 첩보를 얻은 페르시아의 ‘왕 중 왕’ 크세르크세스는 에피알테스를 후하게 대접한다. 비단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에피알테스의 이후 등장 모습만 봐도 그가 받은 보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아리아인, 즉 백인 계통인 페르시아 인을 무슨 몬스터 집단처럼 묘사해버리는 바람에 (영화에서의 기본 대립 구도가 딱 그렇다. 모두 식스팩 ‘몸짱’인 스파르타 300명 용사와 맞붙는 페르시아 군사들은 괴물이나 비인간화 캐릭터들로 교묘하게 형상화된다. 인간이 아니라 <반지의 제왕> 오르크 군단을 보는 듯하다)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선천적 장애를 이유로 차별하는 스파르타에 비해 능력과 기여만 있다면 외모나 장애에도 출세할 수 있는 페르시아가 훨씬 더 문명국 아니냐는 빈정거림이 영화에 쏟아졌다.

그런데 이는 실제 역사에 가깝다. 스파르타는 애초에 아이가 장애를 갖거나 허약하게 태어나면 벼랑에서 던져버리는 잔인한 법 제도로 악명이 높았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스파르타의 정치가 리쿠르고스가 정한 개혁 이후 일이다. 애초에 스파르타는 도리아 계통 이주민이 선주민들을 정복해 농노로 삼고 착취하는 소수지배체제였기 때문에 강력한 군사력이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학문이고 예술이고 등은 배부른 소리였고 오직 군사 자원의 공급이 지상과제가 된 사회다.

 

"300" 스틸 이미지
<300> 스틸 이미지

결국, 영화에서 스파르타는 물론 전체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건 심한 어폐인 셈이다. 적어도 ‘헬로트’라 불리던 농노들에겐 오히려 페르시아가 오는 게 더 나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압제자’ 페르시아의 법과 통치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이제는 유행어가 된 문장 ‘나는 관대하다’ 그대로였으니, (페르시아를 창건한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에 잡혀 왔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준 해방자 ‘고레스’로 성서에 기록된 위인이다) 영화 속 설정은 끊임없는 모순에 봉착하고 만다.

 

2_ 인간 진보의 척도는 무엇인가

 

한 문명학자는 지능과 문명의 수준 척도로 도구나 무기가 아니라 해당 사회가 장애를 가진 개인/개체를 대하는 처우 수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논한다. 실제 원시 인류의 경우 불구 수준의 신체장애가 있는 이가 상당 기간 공동체의 도움으로 생존한 증거가 유인원에서 인간이라는 독립된 종으로 확립되는데 주요한 근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조선 시대의 경우 상당히 선진적 사상으로 장애인 복지제도를 형편이 되는 한 고려나 이전 시대보다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 다음 수준으로 지능이 높다고 알려진 고래 중 인간에겐 왜곡된 이미지로 알려진 향유고래는 무리 속에 기형인 돌고래를 양육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오직 동정심에 기인한 행위로밖에 볼 수 없는 부분이다. 비비원숭이는 (편의적 공생에 가깝긴 하지만) 버려진 강아지를 데려와 돌본 뒤 비비 무리가 수면을 취할 때 다른 적의 침입을 경계하는 파수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목격된 바 있다. 가장 단시간에 인간에 의해 절멸된 대형 포유동물로 기록된 스텔라 바다소의 경우 종 특유의 동료애가 멸종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냥꾼에 의해 암컷이나 새끼가 상처를 입으면 수컷들이 주변에 몰려와 보호하는 습성을 잔인한 인간들이 교활하게 악용했기 때문이다. 남극의 펭귄이 어린 개체를 강추위와 눈보라를 피하고자 무리 가운데로 모으는 것 또한 자연에서 터득한 지혜이자 종족을 위한 협동 사례다.

서론이 너무 길어지긴 했지만, 위의 ‘썰’들은 이제 풀어내고자 하는 작품 주제와 직접 통하는 내용이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단편영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나치 독일의 국가적 범죄 중 하나였지만 2차 대전 도중 그들이 자행한 전쟁범죄나 유태인 홀로코스트보다 이제는 희미하게 기억에서 사라져간 쟁점을 짧고 굵게 상기하게 만드는 주제를 담았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3_ 간결하면서 효과적인 이야기 전개

 

영화가 시작된다. 검은 화면에 문장이 새겨진다.

“한 사회의 도덕성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알 수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목사의 어록이다. 바로 나치의 범죄에 맞서 반대 투쟁에 앞장서다 처형된 후 성인으로 시성 된 것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그 본회퍼 목사다.

그 직후, 화면이 밝아지면서 눈앞에 교실 풍경이 펼쳐진다. 나치가 좋아할 법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 아리아인 외모를 가진 소년이 왼손으로 글을 쓴다. 교사는 수학을 가르치는 중이다. 독일 가정의 하루 생활비는 5.5제국마르크 vs 유전병 환자 1명의 하루 생활비와 치료비는 12제국마르크. 독일 국민이 잃은 가치는 얼마?라는 게 문제로 제시된다.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답한다. ‘죽여야죠!’ 분명히 지금은 수학 시간이다. 사칙연산의 답 대신 아이는 증오의 가치판단을 내놓는다. 교실에는 정적이 감돈다. 교사는 더 생산적이고 인도적인 해결책을 아는 사람은? 재차 아이들에게 묻지만, 답은 없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그리고 서서히 교실 풍경이 전체화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정면에는 나치 휘장과 히틀러의 초상이 걸려 있다. 나치 독재 하의 ‘제3 제국’ 풍경이다. 장면이 바뀌면 어두침침한 침실에 두 사람만 있다. 침대에 누운 아이는 아까 처음 등장한 소년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년에겐 오른팔이 없다. 맞은편 어른은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다. 둘은 모자 관계였다. 잠들기 전 주기도문을 낭송하는 어머니에게 소년은 불편했던 심경을 토로한다. 어머니는 수업 지침에 따라 강요된 내용일 뿐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아이에게 말한다. 소년은 잠이 든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다음날 거실에서 모자가 각자의 일을 하던 그때 갑자기 창문 밖이 요란해진다. 장갑차에 탄 군인들이 아이를 찾는 소리다. 어머니는 급하게 아이를 피신시키고 도망치는 아이 뒤로 총성이 들린다. 독일군 장교는 들판으로 소년을 추격해온다. 아이는 헛간으로 몸을 피한다. 거기에는 가족이 미리 준비한 의수와 방한복 등이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벌벌 떠는 다른 피난자도 숨어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입어야 할 외투를 추위에 떠는 그에게 걸쳐준 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들을 유인한다. 쫓고 쫓기는 생사가 달린 추격전 끝에 한발의 총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진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포스터 이미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과연 소년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이후 결말은 영화를 볼 이들을 위해 공백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크레디트 직전, 자막이 오른다. “1939년 히틀러가 실행한 T4 작전으로 인해 30만 명이 넘는 장애인이 살해당했으며, 추가 40만 명은 강제 불임수술을 당했다. 이 비밀 프로그램을 통해 2차 대전 중 수용소에서 사용된 가스실 기술이 개발되었다. 장애인들의 역사는 그렇게 서서히 잊혀 갔다. 피해자의 대다수는 아이들이었다.” 10분 남짓한 짧은 단편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4_ 홀로코스트의 전주곡, 자국 장애인 절멸 정책

 

나치는 우월한 아리아인이란 허상을 유포하는 수단으로 사이비 과학인 우생학을 맹신했다. 이 허황한 이론은 비이성적 증오와 결합해 학살의 도구로 전용되었다. 그 참혹한 역사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로 주로 기억된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내세운 민족 생존권, ‘레벤스라움’에서 노예화되어야 할 슬라브계는 물론 떠돌이 유랑민족 집시들, 그들이 승리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 등 기존 식민제국에서 빼앗아 지배해야 할 흑인 등 유색인종 전반이 모두 ‘열등 인종’에 해당하였다. 슬라브인 중 공산당원이나 지식인은 모두 수용소로 보내 절멸시키고 생존할 자격이 있는 자는 농노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대상에 한정된다는 게 나치 수뇌부의 머릿속 망상이었다. 그에 적절하지 않은 존재는 쓸모가 없으므로 그 존재를 지워야 옳았다. 유태인 보다 절대 비율 면에서는 동유럽에서 ‘로마’라 불리던 집시들의 피해가 더 컸다.

나치의 칼날과 총구는 이들 ‘열등 종족’에게만 향해지진 않았다. 우월한 아리아인의 위상에 어긋나는 존재들 역시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절멸당해 마땅한 존재에 불과했다. ‘비非국민’으로 통칭하던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공산당원, 비판적 지식인, 유태인의 피가 섞인 자, 반전·평화 사상을 가진 자 모두가 뭉뚱그려 포함된다. 여기에서 1순위는 바로 장애인이었다. 본 작품은 바로 그 배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내용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영화 말미의 섬뜩한 예시처럼 당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대거 안락사를 당했다. 대량의 인명을 한꺼번에 처리하는데 나치 독일의 과학은 가치판단을 배제한 기계적 합리성을 극도로 추구했고, 엄청난 실적을 이룩했다. 그들의 축적된 경험은 훗날 악명을 역사에 남긴 여러 학살 공장을 운영하는데 지극히 효율적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소수의 희생일 뿐이라며 애써 침묵하며 자신이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안도하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3 제국의 전쟁범죄는 그러한 ‘침묵하는 다수’의 암묵적 동조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2차 대전이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자 상당수는 즉시 히틀러와 수뇌부 일부에 모든 범죄행위 책임을 전가한 뒤 형식적 ‘탈 나치 화’를 진행한다. 어느새 동과 서로 나뉜 독일 양쪽 모두에 나치 시절 인사들이 스며들고, 사회 곳곳에서 구체제 인사들이 권력에 복귀한다. 그리고 그런 반성 없는 체제에 질식하던 청년세대는 1968년을 기점으로 대대적 반대 투쟁을 벌인다. (‘독일의 가을’이란 표현이 등장하던 시기다)

반 나치 인사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처음 그들이 왔을 때)”는 바로 이런 사회문제를 초래한 ‘침묵하는 다수’의 대중심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10분도 넘기지 않는 짧은 단편 분량 안에 참 많은 내용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영화는 기승전결 갖춰 풀어내기를 과감히 생략하고 단편 특유의 스타일로 관객의 심장에 파문을 던지는 데 집중한다.

 

5_ 시대를 뛰어넘은 우생학의 망령

 

과연 이런 우생학적 편견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를 담은) 공격은 나치 독일이라는 범죄 집단만의 전유물일까? 히틀러를 포함한 몇 명의 ‘사이코’가 대중을 현혹해 저지른 일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2차 대전 전후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횡행했고 연합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영국에서도 사회 내에 파시즘 추종자들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우생학의 터전이 된 ‘사회진화론’은 당대 제국주의 열강의 엘리트들이 공유하던 내용이기도 하다. 강하고 우월한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지배하고 ‘문명화’시키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다.

이런 경향은 대부분 자국 우월주의, 백인 우선주의를 표방했지만, 결코 자국민에게 평등하게 대하진 않았다. 강하고 우월한 사회와 민족을 유지한다는 미명 하에 사회적 범죄는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빈곤층에 대한 의도적 방치와 배제, 장애인 강제수용 등의 제도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자국민에게도 그럴진대 열등하다고 생각한 식민지 원주민에 대해선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강제 불임수술이나 동화 목적의 납치 등이 횡행했다. 다행히 사회운동과 인권 개념의 확산으로 이제 공공연히 타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는 (내심은 어떨지 몰라도) 수치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정착되고 있다.

하지만 구시대의 망령은 제법 힘이 세다. 사라진 것 같았던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은 서구사회를 뒤덮은 불황과 혼란 속에서 ‘역차별’과 ‘언더도그마’를 주장하며 새로운 외피를 쓴 채 부활의 몸부림을 쳐대는 중이다. 사회에 쓸모없는 무용한 존재들이 세금만 축내고 ‘내’가 누려야 할 복지혜택을 차지한다는 논리다. 은근히 잘 먹히는 중이다. 미래가 불안한 이들, 열심히 일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에 힘겨운 이들에게 ‘유태인이 문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선동하는 소름 끼치는 유령의 부활인 셈이다. 조금만 성찰하면 그들의 주장이 그저 감정의 배설에 불과할 뿐이며 현재 사회문제에 큰 책임이 있는 기득권 일각의 귀책사유를 은폐하는 효과가 출중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시기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활발했던 민주화 시기에 대한 백래시가 근래 횡행하는 중이다. 다수 시민의 불편을 이유로 들먹이며 제1야당이자 예비 집권 정당 대표가 장애인 단체의 절박한 호소가 담긴 시위를 갈라치기 하며 비난하는 혐오 선동이 난무하는 2022년 한국 사회 풍경은 많은 이들에게 그간의 노력이 헛된 것 아닌지 혼란을 안기는 중이다. (물론 그럴 리 없지만)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이 소품 성격의 단편영화는 우리에게 그저 과거 역사로만 소개될 수 있을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포스터 이미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틸 이미지

 

작품 정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Forgive Us Our Trespasses

2022, 미국, 드라마

2022.02.17. 공개, 12분, 15세 관람가

감독 애슐리 이킨

주연 녹스 깁슨, 하네케 탈봇, 저스틴 메이더

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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