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핀 벚꽃들이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구경거리가 된 벚꽃은 그렇게 실컷 소비된다. 처음부터 그럴 운명이었다. 일렬로 서 있으라는 명령은 구경거리에게나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인위적으로 배치된 벚나무들과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사람들은 어쩐지 잘 어울리는 한 쌍 같다. 계절을 잃어버린 시대의 재촉으로 허겁지겁 피워낸 벚꽃에 ‘기쁨조’의 억지 미소가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흙으로 떨어지고픈 꽃잎의 기대는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가로막힌다. 꽃잎을 부르는 흙의 목소리도 효과적으로 차단된다. 정처 없이 뒹굴던 꽃잎들은 빗자루에 몸을 맡긴다. 인간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 쓰레기로 변하는 모양이다. 꽃이 지고 나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버찌의 낙하도 마찬가지로 무의미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온 땅을 뒤덮은 시멘트들은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일까? 자동차와 신발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발은 그렇지 않다. 꽃잎처럼 발도 흙을 원한다.

그렇게 벚꽃의 명령으로 오랜만에 맨발로 숲길을 걸었다. 작은 돌과 나뭇가지들이 발바닥을 찌르고 가시가 박힌다. 신발을 신고 걸을 때보다 두 배의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하지만 발도, 흙도, 나무들도 맨발의 나를 더 반긴다. 내가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도망치곤 하던 고라니는 훨씬 가까이 가서야 달음박질을 시작한다, 같은 맨발로. <본 투 런>에서는 신발을 신는 것을 눈을 가리고 다니는 것에 비유한다. 신발은 발의 모든 감각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발을 망친다. 여느 날의 산책 후와 달리 맨발로 땅의 살결을 오롯이 느끼고 돌아오니 오후에도 졸음이 쏟아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헛걸었구나 싶다.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사진 김혜나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신발 없는 자유’는 아스팔트 길을 한참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예외적 장소에서만 비로소 허용된다. 어쩌다 ‘신발에 갇힌 발’이 기본 상태로 설정되고 말았을까. 신발과 옷과 우산과 건물과 자동차와 그 모든 위대한 발명품들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고 차단하는 임무를 효과적으로 완수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도블록 아래 흙이 있다(Sous les pavés, la plage !)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산다. 유리 조각이 박히고 검댕을 잔뜩 묻힌 채 모든 땅을 점령한 아스팔트 위로 유유히 등장하는 맨발의 시위를 상상해 본다. 신발을 벗듯이 아스팔트도 한 꺼풀 가볍게 벗겨낼 수 있기를 바라며.

 

 

글 / 김혜나 대구대학교 연구중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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