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과 직장 내 괴롭힘, 유해물질과 직업병 등에 대하여 기업의 노동 안전 정보공개를 요구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불완전하게나마 만들어도, 노동자의 노동건강권을 주장해도, 4시간에 1명이 일하다 죽는다. 1990년도에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는 2236명, 2020년 기준으로 2062명이다. 그저 일하다가, 노동력을 상품처럼 팔다가, 그것도 헐값에 팔다가 죽는다. 죽어도 곱게 죽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죽고, 끼어 죽고, 깔려 죽는다. 이것은 손가락 잘리고 반도체 백혈병으로 죽는 것도 문제지만, 산업재해 수준이라고도 볼 수 없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처참하게 죽는 탓이다. 당연히 기업과 자본가는 법망을 빠져나갈 구실만 찾는다. 국가도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왜 이럴까? 노동현장의 안전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안전 불감증인가? 아니면, 소위 위험의 외주화 탓인가? 산업안전보건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인가? 생명 경시 탓인가? 법망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 탓인가? 노동자를 인간 취급하지 않아서인가? 노동자는 그저 하루 쓰고 버리는 크리넥스라서 그런가? 크리넥스만도 못해서 그런가?

필자는 이러한 토론이나 많은 담론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지만, 안전이라는 단어 선택을 잘못했다고 본다. 가령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이 하청노동자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대리인을 구하는 악마적인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는 언제 어디서라도 죽음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죽음은 안전 문제가 아니다. 노동현장에서 안전이라는 단어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노동자의 죽음의 원인이 안전이라는 스펀지 같은 단어에 흡수되어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2인 1조든, 3인 1조든 혹은 이틀 쉬고 삼 일 일하든 하루 쉬고 이틀 일하든,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는,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노동현장의 불안전성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집 근처 아파트 건설 공사 현장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다. ‘안전에는 베테랑이 없습니다’. 베테랑이 존재할 수 없기에 망정이지, 베테랑이 있다면 노동 안전은 완벽하게 보장될 터이다. 하지만 노동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 없어서,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노동자들이 죽음에 노출되는 것일까? 2인 1조가 3인 1조로 노동현장에서 움직여 노동했다면, 안전은 통계적으로 더 안전해지고 죽음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일까?

러시아 혁명 이전 노동현장에 테일러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때 영상을 찍는 기기가 공장 지붕에 설치되어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움직임을 모두 통제 감시한 적이 있다. 지금이야 CCTV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작업 환경하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작업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70년대에는 십장이나 반장이 완장을 차고 노동과정을 직접 감시 통제한 탓에 집중을 직접적으로 강제당했지만, 감시와 통제 도구가 무엇이 되었든, 노동자의 중대재해가 반복되는 이유는 자본주의 자체에 있다.

19세기 중반-1840년대부터 1860년대 중반까지-시기에, 정신과 사고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철학, 심리학, 생리학의 모든 영역들에서 풍성하게 이루어졌던 적이 있다. 이러한 탐구의 끝에서 모든 영역들이, 거의 동시에 ‘주의’라는 원리를 발견했다. 1870년대의 일이다. 에른스트 마하, 윌리엄 제임스 등이 주의에 대한 연구를 했다. 교육학자로 유명한 존 듀이는 그 후 렌즈가 빛과 열을 한 점에 집중시키듯이, 정신도, 의식을 제시된 요소에 골고루 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한 점에 집중시킨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면 이 하나의 점은, 유별난 선명성과 명료함을 갖고 떠오른다고 본 것이다. 존 듀이의 말을 다시 말하면, 주의란, 지각에 있어서 선택의 조작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존 듀이가 말한 ‘그 특정 한 점’은 과연 자본주의의 하에서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주의란 일종의 선택이므로 뭔가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뭔가를 완전히 주의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그리고 다른 뭔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뭔가에 대한 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뭔가에 대한 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 주의가 그 반사물인 ‘산만’으로 전환해 버린다는 뜻이다. 결국 주의와 선택, 집중과 산만의 문제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일상에서 자주 경험한다. 상품을 보든 집 밖의 풍경을 보든 의식을 돌리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하지만, 보고 싶은 것도 안 보일 때가 있다.

심리학 등 학문 분야에서 ‘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어왔지만, ‘주의’에 대한 관심은 사회구조 변동과 연동한 현상이기도 하다. 즉 ‘주의’라는 주제는 자본주의의 당시의 전개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생산하는 노동자를 관리하는 규율적인 체제와 연관하여, 주의력은 생산성 증가의 열쇠가 된다. 그리고 생산력을 높이려면 노동자의 주의력을 더 효율적으로 방향 잡아 줄 필요가 있다. 주의의 또 다른 측면 즉 반사물인 산만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와 연결된다.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욕망을 어떤 상품으로 집중시키고, 얼마 후에, 주의를 다른 상품으로 교체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자본주의란, 주의력의 집중과 산만을 서로 끊임없이 교체해가는 시스템이라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주의가 극단적으로 집중되게 되면, 단순한 산만 상태 정도가 아니라, 트랜스 상태나 자동운동에 가까운 것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하나의 대상을 장시간 보고 있으면, 사물의 윤곽이 교대로 멍해져 혼란스럽고, 이어서 모든 것이 불명료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눈은 종종 이미 아무것도 분명하게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것에 연속하여 긴 생각에 둘러싸인 사고는, 다음번에 혼란이 닥쳐와 둔해지고, 이어서 완전히 마비되어 버리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에 고도로 집중을 하다 보면 그 집중이 산만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지각의 마비 상태에 이른다. 용접을 하든 무슨 일이나 작업을 하든 2인 1조 작업을 3인 1조 작업으로 안전도를 강화시켜도 노동력을 쥐어짜 노동의 고도의 집중이 일어나면 죽음이라는 인재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고강도 노동에 눈앞이 흐릿해지고 작업 대상의 윤곽선이 흐릿해지며 지각에 마비가 오는데, 안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베테랑이라는 말도 의미 없는 것이지만, 안전 수칙과 그 준수, 안전장치란 말도 별 의미 없다.

자본주의가 발전 속도에 날개를 달 무렵인 19세기 말 서양에서 최면술이 상당히 유행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면은, 주의가 결여된 상태(트랜스)로 사람을 이끄는데, 그렇게 하기 위한 전형적인 방법은, 그 사람의 주의를 극도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 증가를 위해 고도의 주의의 집중, 고도의 의식의 집중을 요구하는 시스템이다. 빛의 점에 의식을 집중시키듯이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에 그 특정 한 점을 집중시킨다. 빛이 한 점에 모여 종이를 태우듯이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위해 집중하는 빛 밑으로 노동력들을 모아 태운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죽음이자 죽임이다. 자본주의의 고도의 생산력을 위해 최면 상태에 빠진 노동의 죽음, 이것이 안전 담론의 핵심이다.

 

 

글 _ 이득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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