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올해의 간지는 임인년(壬寅年).

저는 열한두 살쯤 아버지로부터 천자문 맛보기 공부를 하였습니다. 20대 초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할 때 부산 사상의 한 서예 학원에서 두세 달 간 보기 서예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가뭇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쉰 즈음에 ‘채약서당’ 문하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채약’선생님으로부터 ‘야담(野潭)’이라는 호를 받은 것이 공부를 하고 일 년이 지난 임진년(壬辰年)입니다. 같은 ‘壬’자 돌림으로 꼬박 10년 차입니다.

장황하게 볼 것 없는 과거사를 늘어놓은 것은 채약서당 입문을 하고 그 서당에서 ‘백초고’ 행사를 접한 세월을 증명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소헌 김만호 선생의 작품 모첨연거(茅簷燕居). ‘띠집 처마 제비처럼 지내다’라는 뜻이다.

그전의 ‘백초고’ 행사에 대한 내력은 내가 접한 시점으로부터 이삼십여 년이 지났다고 하니 도합 삼사십여 년의 역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채약’ 선생이 이 ‘백초고’를 언제 어떠한 식으로 스승이신 소헌 김만호(素軒 金萬湖)* 선생님으로부터 전수를 받은 것인지, 아닌지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소헌’ 선생의 생업이 한의사였다고 하니 지레짐작할 뿐 손자뻘 제자인 내가 굳이 알려고 해본 적은 없습니다. 때론 신비주의가 훨씬 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행사가 영천 남쪽 채약산 기슭 ‘채약서당’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오다가 영천의 북쪽 보현산 아래 거처하는 막내 제자 격인 제게 건너온 것이 지난해부터입니다.

인생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때론 염불보다 잿밥(念佛無心齋食有心)에 관심이 더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겐 그 잿밥이 ‘백초고’ 행사입니다.

해야 할 글공부보다 도반들과 낫 한 자루 들고 산천을 다니며 채취한 백가지 초목의 잎들을 이틀에 걸쳐 쉬엄쉬엄 달이고 또 달이며 산 아래 근심을 잠시나마 잊는 것이 훨씬 더 재미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가스불로 달이지만 예전에는 꼭 뽕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여 달였다고 하니 정성이 조금은 부족한 기분이 들지만, 시절을 아는 탓인지 채약 선생은 “예전에는 그리하였다” 정도로만 말을 하십니다.

옛 의서 문헌으로 전해 오는 내용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모든 땅의 기운이 일 년 중 하루 단옷날 초목의 고유 성분과 작용을 하여 잎으로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초목이 가지는 성정은 옛사람들이 당시의 기준으로 쓰고(苦), 시고(酸), 달고(甘), 짜고(鹹), 맵다(辛)라고 분류한 다섯 가지 맛이라고 합니다. 이 오미와 더불어 초목이 가지는 독성조차 단옷날 채취한 것을 사용하여 만든 ‘백초고’는 사람에게는 약성으로 작용한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단옷날 채취한 것만 그러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문(天文)의 이치라고 합니다. 비방입니다.

 

사진 정헌호

지픈골(깊은골)의 범바위, 솔골짝(좁고 답답한 골짜기)의 탕건바위, 샘골의 배바위, 구터의 간당바위, 곧은등의 병풍바위, 딸밭골의 실갱이(삵)바위, 송곳바위, 큰골의 베개바우, 두꺼비바위 등에서 보현산, 기룡산의 별, 달, 아침 안개와 면봉산을 넘어오는 동해의 바람을 자양분 삼은 개똥쑥, 쑥. 비수리, 억새, 구릿대, 개옻. 옻, 오동, 붉나무, 비비추, 둥굴레, 싸리, 뽕, 소나무, 관중, 머위, 엉겅퀴, 개망초, 취나물, 기린초, 꿀풀, 참꽃나무, 비목, 금계국, 두릅, 향나무 산초, 초피, 산딸기, 칡, 청미래, 참싸리, 조록싸리, 뚱딴지, 환삼덩굴, 어성초, 고사리, 황국, 갈대, 금은화, 쇠뜨기, 마, 머루, 다래, 어름, 까치수염, 찔레, 뱀딸기, 명아주, 비름, 버드나무, 고들빼기, 토끼풀, 독새, 민들레, 고욤, 아카시, 생강, 들깨, 산수유, 오가피, 개복숭아, 닭의장풀, 자두, 질경이, 박주가리, 노간주, 익모초, 꼭두서니, 노박 덩굴, 벚나무, 석류, 별꽃, 누리장나무. 낙엽송, 배롱나무, 엄나무, 여뀌, 며느리밑씻개, 오가피, 산사, 옥수수, 분꽃, 사과, 복숭아, 자귀나무, 천남성, 이삭여뀌, 마름, 창포, 부들, 왕고들빼기, 이 모든 초목들은 보현골에 기대어 골짜기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무들입니다.

1톤 트럭 짐칸에 평평할 정도의 백초를 모아서 스테인리스 달임 그릇에 넣고 이틀을 졸이고 또 졸이면 작은 꿀 병 스물몇 병 나옵니다. 울력을 함께 한 도반들과 한두 병씩 나누면 한 해 한번 하는 ‘백초고’ 행사가 끝납니다. 온전한 한 해의 몸 살림 밑천을 장만한 것입니다. 공장식 쓰임 말로 투입물량 비 생산물량이 적습니다.

열을 넣어 열 이상이 나와야 하는 것이 요즘 시절 사람 사는 욕심이라면, ‘백초고’ 행사는 열을 넣어 하나가 나오는 밑지는 장사 얼개입니다. 시절에 적응하여 살지 못하는 그림이지만 귀한 것입니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욕심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백초고의 효능은 탁월한 해독 작용에 있다고 합니다. 제조 과정에서 자연과의 교감으로 인한 심리 안정의 효과가 아주 크며, 숙취 해소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은 나나 울력에 참석한 서당의 도반들 모두 두 입으로 한소리를 냅니다. 몸으로 체득한 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중 약국의 숙취 해소 드링크류는 가히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곁다리로 ‘백초고’를 달이는 도중 슬쩍 한두 바가지 퍼서 해 먹는 닭백숙 요리나, 돼지고기 수육의 쌉싸름한 맛은 북송 시인 ‘동파 소식(東坡 蘇軾)’이 만들어 먹었다는 ‘동파육(東坡肉)’이 부럽지 않을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백초를 한꺼번에 넣어 달인다는 것은 판소리 ‘수궁가’에 화타와 버금가는 명의가 용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백초를 한꺼번에 넣어 달인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통섭의 이치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소헌 김만호(素軒 金萬湖 1909~1992)는 한의사이면서 한국 서예계의 거목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셨다. ‘소헌’ 선생 자신도 국전에 대상을 수상하셨고 제자들도 국전에서 수상을 한 분들이 다수이다. 특히 ‘소헌’의 해서는 서계에서는 특별하게 인정을 한다. 의성군 출신이다. ‘소헌 선생님’을 마지막까지 사사한 ‘채약선생’은 국전과 한중일 국제서예대전 등에 특선으로 수상을 하신 경력이 있다.

** 채약 선생이 백초고 제조법을 지리산 ‘은신암’의 노스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라고 후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노스님은 백초고를 상복하여 백수를 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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