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정치1번지 (5) 고 이재영과 송태경 下

(지난편에서 계속)

그런데
을 못 지키기로는 이재영도 피차일반이었다. 2006년 들어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자주파인사로 바뀌면서 평등파이재영은 당에서 떨려나게 된다.

정책적 혜안과 정책기획 및 실행능력 면에서 누구보다 출중했던 그이(이재영)에게 진보정당 운동이 되돌려주었던 첫 번째 큰 선물은 "사실상의 해고조치"였다.”(송태경)


평등파성향의 노회찬, 심상정 국회의원이 민노당의 호감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자주파 중심의 당 지도부는 친북적 입장과 반()진보적 행태로 당의 정신을 훼손하고 내분만 키웠다. 살림살이도 엉망이었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묻던 당이 말이다. 진보 매체 <레디앙>에서 새 출발한 이재영은 당연히 이를 봐주지 않았다.

이 이들의 업무 수행 능력은 대단히 놀라워서 당 의결기구에 제출하는 예산안의 더하기 빼기가 틀릴 정도다.” 계산기를 잘못 눌렀든 어지러워 셈이 틀렸든 그럴 순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점은 그런 예산안이 엑셀(excel)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이재영)

민노당 전신 국민승리21의 관계자들. 1998년에 촬영한 것이다.
맨 왼쪽이 송태경, 가운데줄 녹색 점퍼를 입은 이가 이재영이다.
박용진 전 민주당 대변인(이재영의 바로 오른쪽),
김두관 전 경남지사의 동생이기도 한 김두수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맨 뒤 팔 뻗친 사람) 등
지금은 진보정당을 떠난 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재영은 생전 마지막 글에서 "바위는 세월에 풍화되지만, 사람은 경계에 의해 풍화된다"고 했다.
 
 

2007년 민노당의 대선 참패 직후 이재영은 민주노동당을 깨고 진보신당을 창당하는 데 앞장 선다. 그는 민노당이 더이상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반면, 자주파가 아님은 물론 평등파도 아니었던 송태경은 분당에 반대했다. 당을 혁신하자는 뜻이다. 그가 어느 토론회에서 당내에서 2년 더 해보자고 했을 때, 그동안 열 받아 분당을 고대하던 당원들은 입을, 아니 숨을 모았다. "에휴~"


진보신당 역시 민주노동당과 다시 합치느냐(통합파),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이냐(독자파)로 몸살을 앓았다. 독자파였던 이재영은 정책위의장으로서 당내 의견을 조율하던 중 병마를 얻었다. 송태경은 송태경대로 진보신당에 안착하지 못했다. 시민단체 '민생연대'에서 일하다 민주당 최재천 의원에게 영입되어 보좌관으로 취직했다.

마지막 내기 결과,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통음을


이재영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송태경은 통곡했다. 이재영과 함께 일했던 김정진 변호사가 한마디했다. “송 선배는 또 뒷북이셔.” 발인 전야였다. 예전 이재영과 송태경은 김정진이라는 신인이 짜디짠 활동비에도 불구 당에서 일할 것이냐를 두고 내기를 벌인 적이 있었다. 송태경은 안 할 것이라 했지만 이재영이 이겼다.

송태경과 이재영 중 누가 더 오래 사느냐’로도 내기를 건 적 있었다. 둘 다 밝고 명랑한 이재영이 오래 사는 쪽에 걸었다. 둘 다 틀렸고,  결국 송태경은 "그이의 장례식장에서 좀체 마시지 않던 소주를 삼켜야 했다.”


참고문헌
박준우 기자, 벤러드 아시아 전략분석가, 모건스탠리 관계자 민노당 방문」,  MBC 『뉴스데스크』, 2004.4.28
이재영, 「말과 행동을 같이 하라」, 『시민사회신문』, 2007.7.9.
송태경, 「진보정치 최고의 두뇌를 떠나보내며」, 『프레시안』, 2012.12.21.
이재영 (이재영추모사업회 엮음),『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 레디앙·해피스토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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