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날 달릴수록 시원하다.!!

[두바퀴로 보는세상] 구미에서 낙동강 자전거길로 안동 다녀오기(2일차)

자전거길 확인 지도뷰로 확인하기  

http://www.riverguide.go.kr/cycleTour/main/index.do?RIVER_CD=RVRN&CRS_NO=45

라이딩 2일차에는 풍양면에서 7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에 들렀다 가기로 작정했다. 삼강주막을 가기 위해 면내를 살짝 벗어나면 업힐이 하나 나오는데, '여기만 오르면 평지겠거니~' 하고 오르고 나니 또 다른 업힐이 하나 더 나온다. 무더운 날씨탓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지나칠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일단은 작정한 길인지라 열심히 페달을 밟아서 길을 재촉했다.

전날의 숙취가 덜 해소 된데다 무더위로 무지 고생 했으나 어찌되었건 삼강주막에 다다랐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것은 커다란 회화나무와 초가지붕이었다. 삼강주막의 멋스러움을 더하는 이 회화나무는 보호 노거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약 500년의 수령이 된다.
(500년간 같은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객을 맞이했을지...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삼강주막은 1900년 이후 만들어진 건축물로 기존 건물은 슬레이트 지붕이었던것으로 아는데, 초가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하기사 석면에 대한 규제도 있거니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복원하는건 모양새도 영~ 나지 않을것 같긴했다.

강진의 다산 초당같은 경우 초당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기와로 복원을 했으니 그나마 삼강주막의 초가는 양호한 수준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삼강주막의 주모는 6.25때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키우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해 88세 되시던 2005년 9월까지 60년간 자리를 지켜왔다고 한다. 보부상들과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로 때론 시인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되던 삼강주막은 그렇게 그 원래의 역할을 다하고 현재는 이렇게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삼강주막의 복원전 =>  http://blog.naver.com/namnam1976/120116351893)


 

삼강주막 내에도 낙서를 어찌나 많이 해놓았는지... 얼굴이 다 화끈해 질 지경이었다.

 


풍양면에서 삼강주막을 가는 도로변에는 백일홍이 심겨져 있는데, 꽃 속에 꽃이 있는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앞서 말한 2번째 업힐의 전망대에서 찍은 강의 전망.회룡포나 하회마을, 수도리처럼 물이 돌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으나 무섬내(육지內섬)에 큰 부락은 형성되어 있지 않은것 같아 보였다. 아래 사진의 우측편, 삼강이 만나는곳에 삼강리와 삼강주막이 있다.

삼강주막의 회화나무 그늘에서 한참을 휴식한 뒤, 다시 안동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자전거 길을 따라 안동가는 방향으로 그리 길지 않은 거리를 가다보면, 멀리 보이는 작은 언덕에 세 그루의 잘생긴 소나무와 작은 정자가 하나가 나오는데, 작년에 라이딩 하며 그냥 지나쳤기에 굳이 자전거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 자세히 살펴봤다.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가운데 마루방을 둔 특이한 구조의 정자와 삼수정(三樹亭) 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정자 아래로는 풍성한 회화나무와 앞서 말한 잘생긴 소나무 세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삼수정이라는 이름이 혹시 세그루의 소나무 때문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으나 자료를 찾아보니 사실은 300년 가량된 회화나무가 그 이름의 연유라 한다.  

조선초 결성 현감을 지낸 동래정씨인 정귀령이란 분이 안동으로 낙향하였다가 다시 풍양면 청곡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손이 번창할것을 염원하며 세그루를 심은것이 삼수정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연유라한다.회화나무의 염원이 이루어져서인지 동래 정씨는 전주이씨 22명, 안동김씨 19명, 다음으로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가문이 되었다고한다. 전주이씨는 왕족이요, 안동김씨는 외척이니 이 두 가문을 제외하면 동래정씨는 실력으로 가히 조선조 최고의 명문 가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실제 삼수정이 세워질 당시 심어진 세그루의 회화나무는 병자호란 이후 시들었고, 곁가지를 살려 새로이 심은것이 현재 남은 한 그루 회화나무라 전해진다.아래 사진 좌측에 보이는 작고 곧게 뻗은 나무는 일본이 원산지인 금송으로 보였는데, 정원수로 상당히 각광받는 나무(무령왕릉 관제로도 유명한 나무)이다. 하지만 굽고 여유롭지만 절개를 보여주는 소나무와 오랜세월 동래정씨 문중을 지켜본 풍요롭고 너그러운 회화나무 사이에서 너무나 언발란스 해 보였다. 그리고 일본산 금송이 몇 백년 후 회화나무와 소나무를 대신한다고 상상하니 왠지 씁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예천에서 안동에 이르는 자전거길을 가다보면 회회나무 노거수가 상당히 많다는것을 알 수 있다. 다들 알다시피 소나무와 대나무 국화는 절개, 모란은 부귀, 석류는 다산을 상징하는데 비해 회화나무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한다. 아마도 예천과 안동지역에 명문 가문들이 많았고 후손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화나무를 많이 심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동물의 발자국일지 모르겠으나, 예뻐보여 한참을 지나쳤던 길을 되돌아와 한 컷 찍고 다시 출발했다. 이글 거리는 태양는 한 여름의 자전거 여행의 벗이라 생각하고 달리는게 편하다.

삼수정에서 한참을 달렸는데 매점이나 식당은 주변에 잘 안보였다. 4대강 자전거길 달리다 보면 가장 힘든것중 하나가 갈증을 달랠 매점 한 곳 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는것이다.(자전거길을 달릴때는 등산할때 처럼 갈증을 달랠 충분한 물과 비상 식량을 챙겨서 가야된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풍천면에 이르러서야 갈증을 달랠 시원한 물과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해줄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었다. 폭염으로 라이딩에 무리가 있다 판단되어 면사무소 앞 정자에서 쉬며 동네 어르신들과 신나게 자전거 얘기를 하고 정중히 인사드린 후 다시 출발했다. 한 어르신은 이 더위에 혼자 자전거 여행을 하고있는 내가 신기해보이고 안쓰러워 보이셨던지 오토바이로 한참을 서포터 해주셨다.풍천면을 지나 10여분을 달리다 보니 우측으로 하회마을 간판이 나왔다. 멀지 않은 거리인지라 하회마을도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하회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강 건너 부용대에는 한번도 가본적 없던지라 이번엔 꼭 가보려 했으나 배삯 3,000원인지라 이번에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무심코 지나쳐 느티나무인지 벚나무인지 자세히 못봤지만 둔치의 나무 터널이 하루종일 자외선에 시달린 피부에 잠시나마 안식을 줬다.1999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마을입구에 건립되어있다.

예전에 양반집에서나 키우던 귀한 꽃이라 하여 양반꽃이라고도 불리는 능소화.여름이면 정원에 투자 좀 하는 집의 담벼락에는 꼭 피어있는 필수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능소화에는 전설이 있는데 아래 주소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4565&docId=1803727&mobile&categoryId=4565 

 

여러곳을 들렀으나 사진 모두를 올리기는 힘들어 몇몇곳의 사진만 올렸다.

삼신당 가는 토담길.우리네 토담은 좁지만 답답함을 주기보다 마음의 안식을 준다.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묶어놓은 소망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하회마을을 적당히 둘러본 후 안동으로 다시 향했다. 다시 국도와 자전거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업힐이 하나 나오는데, 무더위와 긴 라이딩에 지쳐있는 라이더에게는 이 언덕이 다소 가파르고 힘들게 느껴지만 다행히 안동으로 가는 자전거길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언덕을 넘어서면 바로 안동의 외곽지가 눈에 들어온다.

맞바람을 맞으며 강변 우안을 따라 가다 안동댐의 보조댐 가기 직전 좌측편으로 큰 전탑이 보이는데 그 전탑이 있는 동네가 바로 법흥동이다. 법흥동은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불교과 연관이 있는데, 원래 법흥사라는 절이 있어 법흥동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법흥동에는 국보 16호로 지정된 신세동7층전탑(법흥사에 있었던것으로 추정)과 보물 182호로 지정된 99칸 집 임청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법흥동에 있는 전탑이 왜 하필 옆 동네의 지명이 붙어 신세동7층전탑이라 불릴까?' 하는 의문점이 생길것 같다. 어릴적 잠시 법흥동에서 산적 있었는데 그때도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것 같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 스마트 폰으로 바로 검색해보니 국보 16호로 지정될때 옆동네인 신세동으로 잘못 기재된것이 오늘날에도 "신세동7층전탑" 으로 불려지는 이유라 한다.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년 지어진 고성이씨 집안의 건물로 원래는 99칸 이었으나 현재는 70여칸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을 제외한 집들은 아무리 권세가 높더라도 100칸 이상은 지을 수 없었다한다. 현재 남은 70여칸의 건물과 집터만으로도 당시 고성이씨 집안의 권세를 짐작하기엔 충분하다. 

신세동 7층 전탑과 임청각 앞을 지나는 국도에는 유명한 회회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1976년경 안동댐 건설업자들이 교통에 방해되고 위험하다하여 절단하려 하였으나 나무 가지를 자르던 인부가 사망하고 불도저 삽날이 갑자기 부러져 중단되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어릴적에 잠시 법흥동 산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나무를 두고 사람들은 실제로 경외의 대상으로 봤었고, 절대 잘라서는 안되는 신성한 나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심지어는 그 나무를 자르려는 사람이 없어 수십만원에 이르는 포상금도 준다는 얘기가 있을정도였다.(7~80년대에 수십만원은 가치는 제법 컸다.) 
 

아무튼 수백년을 임청각과 전탑앞을 지키던 그 회화나무는 2008년 무속인들의 행태에 불만을 품은 자로 추정되는 이에게 무참히 밑동이 잘려 나갔다가 여론에 따라 회화나무를 되살리기에 나서 극적으로 재생했었다고한다. 하지만 모질게 이어가던 이 나무의 운명은 2010년 프라이드 운전자의 차량에 의해 뿌리채 뽑혀 버렸다 한다.
 

각설하고 임청각과 전탑을 지나 강변을 따라 가다보면 안동댐의 보조댐이 나옵니다.(안동댐은 학창시절 배웠듯 양수식 발전을 하기위해 아래에 보조댐을 하나 더 설치했다.)보조댐을 조금만 더 올라가면 물문화회관과 국토종주 인증소. 월령교가 나오는데, 원령교는 안개낀날이나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구미에서 안동까지의 라이딩은 월령교에서 마무리하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로했다.

구시장의 유명한 명물인 안동찜닭은 혼자 먹기에 다소 무리가 있을듯 하여, 노릇노릇 구워진 짭쪼름한 간고등어를 먹기로했다. 물문화회관 앞에는 헛제사밥과 안동찜닭, 간고등어 정식 등의 메뉴를 내놓은 식당들이 즐비해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길 석양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여행을 마무리 하기에는 더 없이 멋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월령교에서 안동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대략 10키로 이상을 가야 되는데, 일단 강의 우안으로 난 자전거길을 따라 가다가 아래 지도에 나오는 엄마 손칼국수휴게소에 이르러서 2가지 길을 선택해야된다. 북쪽 방향으로 난 국도를 따라 가로 질러서 가거나 동쪽 송하동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 터미널 방향으로 가야되는데, 북쪽 국도는 시간은 단축되지만 갓길이 없어 다소 위험해 보였고, 시내로 우회하는 길이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나을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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