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정치1번지 (11) 기호제도의 비극

선거에서 윗 순번 기호를 받아 투표용지 상위에 오르는 것이 득표에 유리하다는 이치는, 구미시의회 의원 선거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초의원 선거는 대선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비해 주민들이 후보자들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찍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기호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할 수 있다. 

 


오른쪽(기초의원) 투표용지를 보라.
안정최, "아오 1번 겨우 받았는데 나번이라니. 김이박 미워!"
기호3번이면 뭐하나? 최한양 자네는 다섯 번째 칸일세.


한국의 기초의원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2~4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한 정당에서, 특히 지지율이 높은 정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가 나오기도 한다. 구미에서 새누리당 기초의원 후보들은 1-가, 1-나, 1-다 등의 기호를 달고 나오는데, 이 후보들끼리도 희비가 갈린다. 

지난해 구미시의회 의원 선거에서 ‘1-가’ 후보 7명 중 6명이 당선되었고 이들은 모두 1위였다. 그중 4명은 2위 득표의 2배 가량을 득표했다. 반면
‘1-다’ 후보 3명 중에는 2명이 낙선했다. 나머지 1명은 3선 도전자로서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편이었고, 비-새누리당 후보다 다수 출마하며 어부지리를 얻기도 했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까닭은 후보자들을 잘 모르는 유권자가 '1'이나 '가' 등 위에 오른 이름에 몰릴 공산이 높아서이다. '1'은 다수 정당, '가'는 유력 인사의 표상이다. 그러니까, 1등이 또 1등하게 만드는 게 한국의 기호 제도다. 이건 1969년 박정희 독재 정권 당시 도입되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박정희의 기호 변천사. 1963년 6번-> 1967년 3번-> 1969년 1번. 
원래 추첨으로 뽑던 기호를 박정희 정권은 다수 정당에게 유리하도록 바꿔버린다.
 


한편 필자도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기호제도 때문에 황당한 현상을 겪었다. 기초의원 후보였던 필자는 ‘기호 4번’을 달았고 투표용지에서는 다섯 번째 칸에 이름이 올랐다.1-가, 1-나, 1-다(이상 새누리당), 2(새정치민주연합), 그 다음에 다른 정당 후보가 없어서 필자의 4번. 

후보가 자신을 찍지 못할 뻔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투표 당일 연락이 왔다. “기호4번이라는 것만 생각하다 실수로 네 번째칸(기호 2번)에 투표할 뻔했다.” 그러잖아도 그날 구미시장 선거의 기호4번 후보도 긴급성명을 내고 투표용지의 순번에 불만을 표했다. 그의 이름은 세 번째 칸에 있고 정작 네 번째 칸에는 기호 5본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내 친구와 기호4번 시장 후보를 비웃었지만, 아뿔싸, 오후에 투표한 필자도 네 번째칸의 다른 후보를 찍을 뻔했다. 동시지방선거라 투표용지가 많았던 탓에 이렇게 헷갈린 유권자도 제법 될 성 싶다. 투표용지 순번과 일치하지도 않는 이런 기호 제도는 과연 얼마나 쓸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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