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결정론, 극단적 토건... 영화가 패러디하는 것들

지난 7월 31일 개봉된 영화 <설국열차>는 한국 영화사상 매우 의미있는 기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바로 관객수 1천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 그리고 어쩌면 한국 영화사상 가장 많은 관객들이 살펴본 것으로 기록될 수도 있는 최초의 SF영화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 <설국열차>는 많은 SF 영화의 고전들이 그러했듯이 과학기술과 사회의 복합적인 상호 작용과 관련된 다양한 은유와 함의가 묘사되어 있다. 그러한 <설국열차>의 은유와 함의를 짚어보는 것은 영화를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는 2014년 환경운동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라며 CW-7이라는 화학물질을 전 세계에서 살포했다가 빙하기의 도래로 말미암아 설국열차에 탑승한 사람들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가 멸종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영화의 설정은 설국열차가 운행을 시작하고 CW-7이 살포될 무렵의 세계가 매우 강력한 기술결정론, 기술만능주의에 사로잡혔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CW-7를 살포한 손은 기술과 엘리트의 독재

현상에 대한 사실 진단 및 위험 평가에서부터 해결책 모색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한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그 때문에 일반 시민을 비롯한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여 충분한 합의와 토론을 거쳐야 하는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해 CW-7 살포라는 ‘기술적 해결책’이 환경운동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는 것은 영화 속의 세계가 기술결정론과 기술만능주의에 입각한 엘리트들의 지배가 강고하게 확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설국열차>는 시작부터 기술결정론과 기술만능주의를 앞세워 복잡한 사회-기술적 문제에 대한 민주적인 토론과 합의를 무시하면 어떤 재앙이 닥칠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다고 하겠다.


SF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설국열차>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별로 낯설지가 않다. 기본적으로 19세기 이래 200여년 가까운 기간 동안 산업혁명에 따른 사회-기술적 변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온 철도와 열차가 영화의 주요 무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설국열차>는 철도라는 산업혁명 이래의 사회-기술적 ‘전통’을 통한 일종의 ‘데자뷰’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엔진 칸 이래로 상류층이 ‘크로놀’이라 불리는 마약에 탐닉하며 고급 요리와 각종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열차 앞 칸과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하며 일상적으로 탄압을 받는 비참한 사람들이 타고 있는 꼬리칸의 구분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계급 구조를 좀 더 극단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꼬리칸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열차 내 군인들의 모습이나 설국열차 철도원의 모습은 마치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의 선봉에 섰던 관동군과 만철(滿鐵)을 연상케 한다. 또 보충되지 않는 엔진의 부품 결함 문제를 꼬리칸에서 강제로 납치한 어린이들의 아동 노동으로 해결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영화 막바지의 장면들은 18-19세기 산업혁명 시기 자본가들이 극심한 아동 노동 착취로 치부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영화 속 설국열차의 시스템은 탄생 자체가 요즘 한국에서 막다른 길에 몰린 토건 자본주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전 세계에 걸쳐 부설된 무려 43만km에 이르는 설국열차의 철길은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대 토건 공사로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윌포드와 같은 엔지니어-기업가가 이런 거대 토건 공사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설국열차가 달리기 시작할 즈음의 정치경제적 시스템이 매우 극단화 된 토건 자본주의의 한 유형이었음을 함축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물칸 점거로 만족할 수 없었던 배경은


<설국열차>는 열차 내부에서 17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빙하기가 도래한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설국열차>의 생태계는 기관차에 있는 ‘신비의’ 엔진이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자기충족적 인공생태계’라는 이상이 ‘설국열차’에서 완벽히 구현될 수 없음은 영화 내의 장면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사람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공기와 물이 ‘설국열차’에서는 자급자족되지 않는다.

영화 첫 부분에서 반항적인 꼬리칸 사람에 대해 작은 창을 열고 팔을 차가운 외부 대기에 7분간 노출시킨 후 동상에 걸리게 하여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설국열차’와 외부 대기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채 각종 환기구로 소통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물의 경우에는 ‘설국열차’에서 자급자족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직접적으로 명시된다. 영화에서 꼬리칸 사람들이 혈투 끝에 진압군을 물리치고 물을 유통하는 물칸을 점거했을 때, 꼬리칸의 ‘성자’로 나오는 길리엄 – 실제로는 윌포드와 내통하여 꼬리칸의 봉기를 조율한 – 은 물칸 점거를 협상의 무기로 삼자며 이쯤해서 멈추자는 의견을 보인다.

그러나 윌포드에 이어 ‘설국열차’의 2인자인 메이슨 총리는 물칸에 있는 물이 실제로는 기관차에서 파쇄한 눈과 얼음을 녹여서 만든 물이 열차 앞칸들을 거쳐 흘러온 것이라면서 물칸 점거가 별다른 협상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설국열차’는 공기와 물이라는 인간 생존의 필수 요소를 외부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자기충족적 인공생태계’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설국열차’의 생존도 결국은 외부 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국열차’의 지향과 실제 생존 환경 사이의 모순은 열차 운행이 시작될 때부터 나타난 것이었고, 그 점이 바로 ‘설국열차’가 결국 파국을 맞이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열차 바깥에 지하도시들이 있었다?

설국열차를 지배하는 엔지니어-기업가인 윌포드는 ‘설국열차’ 시스템 전반을 고안했을 뿐 아니라 열차 내에서는 생명선인 엔진을 직접 조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윌포드는 ‘설국열차’에 탑승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독재를 펼칠 수 있는데, 그가 엔지니어-기업가라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테크노크라트 독재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윌포드의 테크노크라트 독재는 철저히 ‘설국열차’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전제로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설국열차는 생존의 필수 요소인 공기와 물부터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대 외부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된 공간이라고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설국열차의 원동력인 엔진이 봉준호 감독이 밝힌 바대로 핵융합로라면, ‘설국열차’를 제외하고 지구상에 생존해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정 자체도 모순에 휩싸일 수 있다. 사실 핵융합로는 1억도 이상의 뜨거운 온도를 견디면서 핵융합 반응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식과 기구를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지금까지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영화 <설국열차>의 설정대로 핵융합로가 열차의 동력원이 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축소될 수 있다면, 이는 도시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거대 핵융합 발전소의 건설은 더욱 어렵지 않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설정대로 CW-7이 살포되어 지구가 혹독한 빙하기로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 실제로는 CW-7 살포 이후 전세계의 생명체가 순식간에 멸종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어렵지만 - 상당수의 사람들은 핵융합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에너지로 생존할 수 있는 지하도시를 건설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설국열차’가 달린 17년의 세월 동안에도 열차 바깥에는 핵융합발전소로 에너지를 공급받는 지하도시가 여럿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윌포드가 열차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교조를 영화에서 어린이들에 대한 세뇌교육과 같은 형태로 계속 주입하는 것은 ‘설국열차’와 외부와의 완벽한 단절이 독재의 기반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국 윌포드의 독재는 ‘설국열차’ 문의 폭파를 통한 개방으로 파멸되는데, 이는 ‘설국열차’의 대립과 투쟁의 변증법이 열차 내에서의 전진과 후퇴 뿐 아니라 열차 개방과 폐쇄까지 포함하는 두 가지 이상의 복합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기술만능주의로부터 민주주의는 탈주를!

영화 <설국열차>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복합적인 상호 작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여지를 던져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기술시스템에 대한 민주적인 토론과 합의가 부재한 기술결정론, 기술만능주의, 테크노크라트의 지배가 가져오는 재앙과 상상력의 제한에 따른 문제점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게 한다는 점은 <설국열차>의 중요한 기여라고 하겠다.

아울러 <설국열차>의 주인공들이 결국 열차로부터의 탈주를 문제의 해결책으로 선택한 지점은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기술시스템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상상력을 마련하는 데 있어 여러 모로 함축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다시금 ‘설국열차’에서의 탈주를 꿈꾸는 일이야말로 <설국열차>에서 패러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들과 맞닿아 있는 우리 사회의 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성원 기자는 과학기술학(STS)을 전공하는 연구자이며, 현재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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