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암울한 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대중음악이

(1편에서 계속)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나고 영화의 무대도 미국 라스베가스로 옮아간다. 또한, 주인공 근태와 자영, 장희를 맡은 배우도 바뀐다. 대딩에서 중년으로. 그리고 이 영화, 지금부터가 더 재밌어 진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장희 씨는 대마초 파동 이후 국내에서 활동을 접고 미국 LA에서 교민 라디오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되려면, 여기서 우리의 ‘병태와 영자’의 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혼 뒤 40대 자영의 역할은 김희애씨가 맡았다. 김희애가 친구와 함께 라스베가스 카지노에 마련된 공연장에서 흘러나오는 <웨딩케익>을 감상하고 있다.

트윈폴리오를 표상하는 쓰리핑거 기타주법의 아름다운 음악 ‘웨딩케익’은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배치되고 있다. 영화를 한 번 밖에 안 본 내가 기억하는 ‘웨딩케익’만 해도 무려 여섯 번이나 된다. 이 허접한 감상문은 지금부터 이 음악을 중심으로 풀면서 마무리 할 것이다.

1) 자영의 카셋트

영화 속에서 이 음악을 쎄시봉 친구들에게 전해준 장본인은 여주인공 민자영이다. 자영이 이 음악을 인상 깊게 듣고선 소니 카셋트와 함께 근태에게 건네는 것이다. ‘웨딩케익’과 무관하게 카세트 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아름다운 장면 중에 하나라 생각한다. 통영으로 내려온 자영이 근태와 밤을 보내는 장면은 흡사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친을 두고 코 골며 자다니... 등신 같은 놈^^)

자영은 카세트에 자신의 심정을 담은 메시지를 녹음해서 남기지만, 그 내용은 근태가 떠난 뒤 장희를 통해 발견됨으로써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걸 보면 자영도 그리 나쁜 여자, 즉 팜므 파탈로서의 ‘딜라일라’는 아니다. 하긴 뇌살적인 미모의 소유자인 삼손의 데릴라도 자기 부족 남성의 협박으로 삼손을 등졌을 뿐 인간성이 그리 나쁜 여자는 아니었다.

 

 

 

 



2) 라스베가스

앞서 말한 라스베가스 공연장에서 이 음악이 연주될 때 중년이 된 자영이 남다른 심정으로 이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자기 친구에게 건네는 장면이다. 묘하게도 같은 공간에서 자신의 옛 남친 근태도 그 노래에 얽힌 비슷한 이야기를 자기 회사 후배에게 전하는 것이다. 좁디좁은 한국 땅에서 20년 동안 못 만나던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넓은 땅 미국 내의 같은 건물 안에서 같이 있는 줄도 모른 채 비슷한 이야기를 파트너에게 전하고 있으니... C’est la vie!

자영이 친구에게 말한다.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 원곡이 저 곡이야!” 오리지널 웨딩케익은 코니 프란시스의 곡이다. 코니는 형주와 창식보다 약간 누나뻘 되는 여가수로서 영화배우 뺨치는 미모로 60년대의 팝계를 주름잡은 컨츄리 싱어이다. 이 곡은 전형적인 컨츄리 리듬의 경쾌한 음악으로 가사 내용 또한 우리가 아는 칙칙한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

3) LA 교민 방송국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자영과 근태는 같은 건물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마주치지 못했지만 근태와 장희는 반가운 재회를 가진다. 그리고 장희가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국에 근태가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여 두 사람이 라이브로 이 노래를 부른다.

노래 끝에 장희의 의미있는 멘트.
“트윈폴리오가 될 뻔 했던 남자 김근태씨를 초대 손님으로 모시고...”

이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고 운전하던 자영이 마침내 그 멘트를 운명처럼 접속하여... 차를 돌려 방송국으로 향한다. 안내원에게 “이장희 씨 만나러 왔는데 방송 끝날 때 까지 기다리면 되냐”고 한다. 아뿔사, 그러나 이 방송은 녹음방송이었기에 이장희씨도 함께 출연한 게스트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질은 우리 관객들을 감질 맛나게 하다 마침내 두 사람의 운명 같은 해후를 허락한다. 이 장면을...... 이 영화는 정말 너무 멋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근태와 자영은 각각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다. 공항 내의 흡연실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극적으로 상봉한다. 흡연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자영은 안에서 밖을 향해 보고 있고 근태는 밖에서 안을 향하는데...... 카메라는 유리문을 희미하게 블러(blur) 처리함으로써 이 극적인 장면의 감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이 멋있는 장면을 나의 허접한 문체로는 실감나게 표현하지 못하겠다. 영화를 꼭 보기 바란다.

다음 씬은 공항 내의 커피숍. 어색한 침묵을 깨고 자영이 근태에게 말을 건넨다.
자영: 애들은?
근태: 유치원 다니는 딸 하나 있어.
자영: (뜻밖이라는 듯이 웃으며) 결혼을 늦게 한 거니, 애를 늦게 가진 거니?

이 물음에 근태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심히 보라. 근태는 “네 소식은 여성지 같은 데서 본 적이 있다.”는 엉뚱한 멘트로 화답한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말하지 않음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이 절제의 미학을 통해 이 영화는 빛을 발한다. 이 말해지지 않은 대사에서 관객은 인물의 특별한 심정을 읽어내야 한다. 근태가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다음 장면,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씬을 통해 유추해 낼 수 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두 남녀는 각자의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이별한다. 비행기 탑승시간이 임박해서 그러하겠지만 우리 삶에서 연인끼리의 만남 또한 이 찰나적 만남에 이은 오랜 헤어짐과 뭐가 다를까? 그러나 만남은 순간일지언정 아름다운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은 영원하다. 속으론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나만 겉으론 쿨하게 헤어지는 근태, 그러나 한참 가다 뒤를 돌아본다. 바로 그 순간 잔잔한 배경음악이 짧게 흐르다가 멈추면서 씬이 바뀐다. 자영은 공중전화로 장희에게 전화를 걸어 근태와의 만남을 전한다. 장희와 자영의 대화장면에서 장희가 세도나의 바위 위에서 명상하는 장면이 오버랩 된다. 장희는 이 명상을 통해 이 영화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대마초파동 때 수많은 연예인들이 엮어 들어갈 때 왜 민자영만 빠졌냐는 것이다.

여기서 1)번 웨딩케익 장면을 다시 보도록 하자. 거기엔 자영이 근태에게 “너, 나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니?”라고 묻는다. 이 뜬금없는 물음에 근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노래로 대답한다. 근태의 절친 이장희가 만든 유명한 노래로 이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발라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이다. 그렇다. 근태는 사랑하는 여인 자영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순정남이다.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친구와의 의리를 저버리면서 자영을 보호한 것이다. (행간을 읽지 못하는 분은 반드시 영화를 보시기 바란다.)

이 대목에서 글쓴이는 Percy Sledge의 아름다운 R&B 음악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When a Man Loves a Woman>의 노랫말을 떠올렸다.

When a man loves a woman
Can't keep his mind on nothin' else
He'd trade the worldFor a good thing he's found
If she is bad, he can't see it
She can do no wrong
Turn his back on his best friend
If he puts her down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그의 마음속엔 그 여자 외에 아무 것도 자리하지 않아요
그는 기꺼이 세상과 거래할 겁니다
자신이 발견한 그 소중한 대상을 위해서라면 말예요
설령 그녀가 나쁜 사람이래도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해요
(자신에게) 그녀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녀를 붙들어 두기 위해서라면 그는
심지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도 등질 수 있을 겁니다


장희의 멘트가 끝난 다음 장면은 수화기가 허공에서 흔들흔들 하는 공중전화 씬이다. 자영이 극도로 어수선한 마음에 수화기도 바로 내려놓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영이 급히 향한 곳은 말할 것도 없이 근태가 있을 어디이다. 자영이 캐리어를 끌고 공항의 이곳저곳을 헤매며 근태를 찾을 때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흘러나온다. 절박한 마음에서 근태를 찾아 헤매는 자영의 얼굴과 이 노래가 겹쳐지는 이 장면은 자영이 이제야 비로소 근태의 사랑, 그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주는 그 헌신적인 사랑을 깨달았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느려터진 그 노래가 끝날 무렵에 드디어 자영이 근태를 발견하고선 아름다운 사내의 이름을 부른다. 흐느낀 목소리로... 오근태! 근태는 뒤를 돌아보며 아무 말이 없다. 아니 침묵으로 많은 것을 말한다.

자영: 너. ...... 너, 나 때문에 그랬던 거니? ...... 나 살리려고 친구들 팔았던 거야?
(김희애 씨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우리 관객들의 눈물샘도 젖어 든다. 그래도 근태씨는 아무 말이 없다.)
자영: 그랬어. 왜 그랬어? (자영의 오른 팔이 근태의 왼쪽 어깨로 향한다)

이때 병신 같은 미국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자영을 말린다. 자막처리 없는 영문 대사로 “Settle down, Ma’am 부인, 진정하세요” 어쩌구 해댄다. (한심한 인간, 니 같으면 진정하겠냐? 이 여자가 땅콩 부사장처럼 비행기 돌리려는 시도하는 것도 아닌데 웬 주제넘은 참견?)

근태: 나, 네가 무슨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선 무심하게 등돌리고선 제 갈 길을 간다.)
자영: (큰 소리로) 오근태! ...... 오근태! (그리고 흐느낀다.)

 

 

 

 

 

 

 

 

 


그 다음 장면은 트랩 로비에서의 대각선 구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랑하는 여인의 흐느끼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탑승 레인을 걷던 근태는 마침내 쥐고 있던 옷가지를 떨구고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선율은 피아노와 스트링(현악기 음색)이 주고받는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변주곡인 듯싶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영화 대단한 작품이다.


4) 자영의 집 앞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의 장면을 그대로 연출한 점에서 흡사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방불케 한다. 자영의 결혼식을 앞두고 군에서 휴가 나온 근태가 그녀의 집 앞에 웨딩케익을 두고 간 것이다.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잠 못 이루고 깨어나서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외로이 남아 있는 저 웨딩케익
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아네 서글픈 나의 사랑이여


장면이 바뀌어 근태는 귀대하는 기차에 몸을 실고서 홀로 눈물을 흘린다. 노랫말처럼 하염없이 흘린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진짜 가수 윤형주와 송창식이 쎄시봉 친구들 공연에서 <웨딩케익>을 노래 부른다. 그리고 객석에서 자영과 근태는 다시 은근한 시선을 교환하는 것으로 재회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전부라는 것. 이 때는 2014년이니 영화 스토리 전개상 자영과 근태가 LA에서 해후한 다음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신경질나게 왜 이렇게 쿨한 것이여?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에서 장희의 주선으로 근태가 형주랑 창식이랑 재회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말이 필요 없다. 흡사 창세기에서 에서(에사우)가 그를 배신한 동생 야곱을 뜨거운 가슴으로 껴안듯이 트윈폴리오 친구들은 근태를 뜨겁게 안아준다. 아마도 장희가 근태의 입장을 대변해줬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친구를 저버린 한 남자의 처절한 입장을.


5) 엔딩크레딧

김희애 씨, 노래 실력은 별로지만 엔딩 씬을 장식하는 노래로 다른 어떤 가수가 불러도 이만큼 아름답지 않을 것 같다.

쎄시봉!

프랑스어로 “C’est si bon”은 “It’s so good”이란 뜻이다. 쎄시봉이란 이름은 아마도 당대에 유행했던 앤 마그렛(Ann Margrett)의 노래 <C’est Si Bon>에서 따왔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K0AKUKdNdM


돌이켜보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점심을 굶어도 좋아하는 음악이 담긴 레코드판이나 카세트 테입만 있으면 배불렀던 시절이다. 극장비보다 약간 싼 돈으로 음악감상실에 입장하여 그 안락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선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에 적은 자신의 리퀘스트 음악이 언제 나오나 스피커를 향해 귀를 쫑긋 열면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엔 강남스타일이 아니라도 통기타 하나 들고 해변에 가면 예쁜 여자애들 꼬실 수 있었다.
 
놀라지 마시라. 그때 유행했던 가요들은 지금 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동요보다 더 풋풋한 음악이었다. 이 영화에도 나오는 <조개껍질 묶어>는 실제로 윤형주가 대천해수욕장에서 같이 간 여대생들을 집에 안 가고 붙들어 두기 위해 즉석에서 작곡한 노래다.

그 시절 이 나라의 사회문화 풍속도는 처참했다.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청년의 머리카락과 처녀의 치마길이를 단속하던 시절이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지만, 대마초 파동 또한 당시 저항적 성향의 포크가수들을 길들이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법. 쎄시봉으로 상징되는 그 시절의 음악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대중음악의 꽃을 피웠다.

누구나 자기 추억의 책갈피 속에 오근태, 민자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 영화는 보석 같은 아니 (윤형주의 노랫말처럼) 밤하늘에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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