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안동의 한 고택. 코로나로 인해 사방의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아 청량한 바람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자유토론 시간이 되자 한 참석자가 돌직구의 질문을 한다. “요즘과 같은 세상이야말로 인문학이 더욱 필요한 시점으로 보이는데, 왜 인문학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실용성’이 무엇보다 최우선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은 인간의 상품화·기계적 인간관계·무한 경쟁으로 인한 마음의 피폐화를 초래하고 있다. 질문자의 의도는 이런 것이었으리라. “마음을 피폐하게 하고 옹졸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가 오히려 인문학이 꽃피울 토양이 될 것 같은데, 다른 학문 분야와 비교하면 인문학이 왜 이리 맥을 못 추냐?” 아마도 이분은 인문계 학생들이 자조적으로 내뱉곤 하는 “문송합니다.”*라는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주춤하면서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었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자해성 발언을 해 버렸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사진 양승권
사진 양승권

2022년 9월 24일 오후 시간, 안동의 흥해 배씨 임연재 종택에서 필자를 연사로 한 약간의 ‘기이한’ 강연이 열렸다. 필자가 ‘기이한’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전통 계승을 상징하는 한 고색창연한 고택에서 어울리지 않게도 ‘전통’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 철학자 둘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강연 제목은 <안동에서 동서양의 고전을 공부하며 미래의 길을 찾다-장자와 니체가 갈구하는 자유에 대하여>였다. 장자(莊子)와 니체(F. Nietzsche)는 동양과 서양에서 각각 극한의 사유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장자는 장엄하면서도 심술궂은 어투로 당시의 엄혹한 세태나 전통을 풍자했다. 니체는 망치를 들고서 모든 기존의 전통 가치를 산산이 조각 내려 했다. 둘 다 ‘전통’의 충실한 계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철학자들이다.

우리는 ‘전통의 계승’이라는 화두에 어떻게 다가서야 할까? ‘전통’이란 단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고정적인 절대 가치’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전통의 계승’이라고 말할 때 방점이 찍혀야 할 부분은 ‘지켜야 할 내용’으로서의 전통이 아니라, 전통으로부터 끌어와야 할 어떤 ‘마음의 태도(경향성)’가 되어야만 한다. ‘지켜야 할 내용’으로서 전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전통을 기념할 대상이나 비싼 골동품으로 대하는 방식이다. 일본 에도 시대의 사상가 마츠오 바쇼(松尾芭蕉)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사람의 흔적을 구하지 말고 옛사람이 추구했던 것을 찾아라.” 옛사람이 어떠어떠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은 오늘날에 입장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점은 그가 어떤 이상과 가치, 그리고 ‘마음의 태도(경향성)’를 가지고 고민했는지 천착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전통으로부터 불러와야 할 어떤 ‘마음의 태도(경향성)’란 무엇일까?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격심한 경쟁 양상은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현대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으로 인한 삶의 피로감과 소외, 인간의 사물화, 양극화로 인한 계층 간의 갈등, 저열한 실용주의로 인한 자연환경 파괴 등이 만연되어 있다. 인간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대접받는 것이 아닌, 일개 사물처럼 수단으로 취급받기 일쑤인 세상이다. 몸에 두른 옷치장이나 몰고 다니는 차가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주요 기준이 되는 세상이다. 일회적이고 단세포적인 실용주의가 만연한 이러한 세상에서 인문학의 문제의식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가져다줄까?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로베르토 웅거(R. Unger)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우리는 기존의 저열한 실용주의를 ‘풀려난 실용주의’(Pragmatism Unbound)로 승화시켜야 한다. ‘풀려난 실용주의’란 눈에 보이는 이익만 좇는 저급한 실용주의를 해방해 넓은 안목에서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도모하는 실용주의다. 인문학적 소양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인과 관계의 무한 연결망을 중시하는 오늘날과 같은 ‘잡종화’의 네트워크 시대에 더욱 요청된다.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은 세상을 물리학적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도록 부추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물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감각을 키워준다. 생의 의지를 돋우어주는 인문학 훈련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자연적인 생명력이 약화하여 가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강연이 이루어졌던 안동의 이 고택은 그 역사적 의미와 상관없이 존재 그 자체로 생물학적인 유기체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옛사람이 중시했던 ‘만물의 소통’이라는 ‘마음의 태도(경향성)’가 고택 건물 곳곳에 알알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어떤 언어적 설명과 해석이 필요 없이, 고택 안에 그냥 있으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존재들 사이의 촘촘한 ‘유기적 연결’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뿐이겠는가? 미려하게 지어진 우리 고택에는 공간들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없다. 모든 공간은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건물 외부의 자연과도 틈 없이 연접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택의 자연미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향수 어린 ‘자연 그대로’의 욕망을 깨어나게 해준다.

‘만물의 분열 없는 소통’을 설파한 니체와 장자의 아포리즘은 이 한국의 전형적인 전통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아름다운 이 안동의 고택은 지켜야 할 ‘내용’으로서의 전통의 느낌이라기보다는, 전통으로부터 끌어와야 할 어떤 ‘마음의 태도(경향성)’를 깨우쳐주었다.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우리 자신이 “생명의 우주 속에 불규칙하게 떨고 있는 한 조각임”을 깨닫고 “율동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진 모든 생명이 내 안에서 고동치고 있음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깊어가는 가을, 이런 느낌을 맛보기 위해 주변의 고택을 한번 방문해 보면 어떨까?

 

글 _ 양승권 대구대학교 성산교양대학 교수


*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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