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패권이니, G2니, 미헤게모니의 몰락,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 중국의 급부상과 몰락, 일본의 몰락, 전쟁 등 21세기에 들어오자 주변에 ‘몰락’ 이야기가 넘실댄다. 일본의 몰락, 대한민국의 붕괴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혼란스러운 시기이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현대 문명의 폐색(閉塞)을 예언하고 역사적 충격을 준 명저가 떠오른다. 독일의 수학자였던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책 『서양의 몰락』(1918–1922)이 그것이다. 국내에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Chatgpt니 AI니 디지털 기술이 하늘을 찌를 기세인 현대 문명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시대보다 더 폐색적으로 변질된 문명이다.

폐색(occlusion)이란, 혈관이나 혹은 내강을 이루는 관이 막히는 경우를 말한다. 혈관에서 폐색이 발생하면, 그 혈관에 의해 혈액을 공급받는 이하 부위에서 허혈이 생긴다.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그 조직이 죽기 직전의 단계가 폐색이다. 장폐색, 하지동맥폐색 등. 지구 전체를 인체에 비유하면 오늘날의 세계는 자본주의나, 전쟁 등으로 공급망 사슬이 묶여 버리듯이 혈액이 거의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상은 20세기 초 독일 사상사(신칸트학파)에도 나타났던 것이지만, 슈펭글러는 수학자이었던 탓에 세계사를 마르크스나 월러슈타인 식으로 보지 않고 ‘형태’와 ‘패턴’으로 봤다. 슈펭글러에 따르면 여러 문화는 문명으로 몰락하고 이윽고 종언을 고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6개의 문화, 즉 이집트 문화, 바빌로니아 문화, 아라비아 문화, 인도 문화, 중국 문화, 멕시코 문화(후에 러시아 문화가 들어갔다)를 언급한 후 이것들을 역사 영역에 맞추어 갔다. 이 6개의 문화, 역사 안에는 ‘패턴’이 숨어 있는데, 슈펭글러가 몰두한 것은 이 6개 역사 영역에서 패턴(형태)이 공통적으로 어떻게 변천했느냐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성장기, 후기, 몰락기가 그 패턴들이다.

뭔 역사를 이런 식으로 보는가, 이것이 역사학인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슈펭글러가 괴테, 니체의 영향을 다분히 받고 있다는 것도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슈펭글러의 논리에서 재미있는 것은 ‘봄, 여름·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3단계를 거쳐서 어떤 문화 형태에도 성장기 후기 몰락기가 있다고 본 점이다. 그리고 이것을 입증한 것이 『서양의 몰락』이라는 책이다. 슈펭글러는 유럽의 역사가 그리스 로마의 반복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봄에는 트로이 전쟁과 십자군이, 호메로스와 니벨룽겐의 노래가, 건축에서의 도리스 양식과 고딕 양식이 시대를 넘나드는 동시대적인 것이 된다. 여름·가을에는 디오니소스와 르네상스 인문주의, 피타고라스와 청교도주의, 소피스트와 계몽사상이 나란히 선다고 봤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모든 문화는 성숙과 퇴영에 들어가 이를 회복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 논리에 역사학계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슈펭글러의 이 논리가 나치에게서 환호를 받았든(사실 그는 나치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다 차치하고, 작년 겨울 막바지에 시작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겨울을 앞두고 또 다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을이 끝나가는 계절을 보내다 보니 문득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이 생각난 것뿐이다. 슈펭글러의 말대로라면 2023년은 그의 책이 완성된 1922년에서 101년 간격을 둔 해다. 슈펭글러가 34살에 겪은 세계전쟁이나 지금의 전쟁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슈펭글러의 논리대로라면 굳이 어려운 정치경제 논리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미국은 몰락기, 겨울에 접어든 것이다. 서양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소위 ‘K- 한류’도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의 결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몰락에 접어들고 국제사회에서 말발이 먹히지 않는 미국이나, 지지율 21%인 일본 기시다 정권을 맹종하는 현 정부는 매서운 겨울바람 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지난여름 폭염과 가뭄 등 기상변화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았다. 이 탓에 돌아올 겨울은 작년보다 더 큰 혹한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슈펭글러는, 겨울이 되면 모든 문화가 성숙과 퇴영에 들어가 이를 회복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니, 국내외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온갖 폐색 증상을 보이는 올겨울, 현대 문명의 성숙이 퇴영으로 이행하고 있는 지금, 나훈아의 ‘아, 테스형!’ 노래 가사,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는 가사처럼, 겨울은 죽어도 오고 말 것인가. 겨울이 지나 내년 봄이 오더라도, 입고 나갈 옷이 없을 듯하다.

 

글 _ 이득재 노동당 대구시당 전국위원 및 정책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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