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사회 도탄의 기원을 담아낸 초창기 독립영화 순례

 

우연한 기회에 현재 우리 사회가 겪게 된 ‘오래된 미래’들을 만나다

2023년 한국 1인당 국민소득(GDP)은 32,142달러(약 4,400만 원)로 세계 22위를 차지했다. 그나마 전년 대비 8.2%가 감소한 것이다. 수치상으로만 놓고 보자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강조하는 흐름과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의 체감이 과연 그럴까? 오히려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꾸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헬조선’이란 자조는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다.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이유로 절망이 들끓지만 아마 그중에도 전반적으로 동의가 되는 지점은 시장물가와 주거불안일 테다. 2024년 봄이 성큼 다가왔다. 지난겨울 다행히 혹한은 피했지만 과일을 거의 입에 대지 못했다. 설 명절에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던 사과나 배, 심지어 겨울 과일의 대명사인 귤도 한 번 정도 입에 댄 게 전부다. 그 어떤 미디어의 보도보다 더 피부에 와닿는 구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전세 사기는 툭하면 고개를 내밀고, 사방팔방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물론 재개발에 방해가 되는 규제를 혁파한다며 연일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내놓지만 내 집 마련은커녕, 안정된 주거를 찾기란 날이 갈수록 힘들어져 간다. 온전하게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편하게 몸 누일 자리 하나 찾기가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할 일인가. 말 그대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운다. 이런 상황에서 저출산 대책에 얼마를 썼느냐 운운하는 건 무의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편을 먹고 구국의 열정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대다수 시민들의 마음은 차갑다. 오히려 양 극단화된 정치 지형 탓에, 예전에 비해 정책 대결이나 지역 실정에 맞는 전문가 발굴은 더 후퇴한 형국이다. 정치에 대한 냉소는 결국 타파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그 원인의 지분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엄밀히 따져봐야 할 일이다. 중요한 건 민생이 도탄에 빠진 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란 점이다.

과연 이 모든 악순환의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를 파헤치기 위해선 아득히 거슬러 올라가 봐야만 한다. 그런 고심 가운데 얼마 전, 서울의 독립영화관에서 열린 어떤 기획전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2030 신진 영화평론가들이 기획한 자리였다. 매주 새로운 신작이 개봉하는 와중에 이들은 특이하게도 그리 길진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이 드러나지 않던 이전 시절의 작업을 조명하는 데에 집중했다. 각각 1980년대 독립영화 작업과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성 영화감독들의 초창기 단편, 그리고 2010년 전후 청년백수/잉여들의 삶 & 위태로운 청소년에 대한 조명 측면에서 상징성을 가진 작업들을 4개의 테마로 분류해 소개했다. 이중 가장 눈에 띈 것은 이름은 들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물었던 1980년대 후반 독립영화들이었다. 두근거리며 관람하게 된 영화들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근래 한국사회가 홍역을 겪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들의 기원이 거기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물론 과도한 일반화가 될 수 있긴 하지만, 그 시절에 처했던 문제들이 온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더 확대 심화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적 민주화에서 큰 진전을 이뤘지만 정작 그 과정을 통해 시스템 전반의 모순을 개혁하는 데에서 보인 한계가 현재 우리가 처한 도탄과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건 명백했다. 해당 기획전에선 <파랑새>와 <하늘 아래 방 한 칸>, 2편의 각각 농민과 도시 빈민의 애환을 담은 2편의 단편영화를 소개했고, 여기에 추가로 <파랑새>의 전편이라 할 <수리세>를 개인적으로 다시 찾아봤다. ‘오래된 미래’가 초창기 한국독립영화의 굵직한 사례들 가운데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증거하는 영화들

소개하려는 3편의 독립영화들은 지금 기준으로 볼 때는 투박하고 거칠기 그지없다. 1980년대 중후반에 제작된 해당 영화들은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오랜 시간 동안 안정된 관리 아래 있지 못해 상영본의 열화 현상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부가 운영하는 유일한 공공 영화박물관이라 할 ‘한국영상자료원’이 주도한 복원작업을 통해 디지털 복원 과정이 이뤄진 덕분에 유실된 수많은 안타까운 작업 가운데 후대에 공개될 수 있었다. 이중 <파랑새>와 <하늘 아래 방 한 칸>은 복원은 마쳤지만, 아직 대중이 쉽게 만날 순 없다. 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완성된 <수리세>의 경우는 유튜브 등에서 온라인 구매해 소장 및 관람이 가능하다.

 

“수리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수리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수리세>

1984년에 만들어진 <수리세>는 전남 구례군 농민들의 ‘수세’ 현물 납부 투쟁 전후 과정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소수의 제작진은 현지를 찾아가 촬영 허락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5공화국 독재 체제가 아직 서슬이 퍼런 상황에서 현장 촬영에는 제약이 뒤따랐기에 ‘기록’ 영화라는 설명 대신 재구성이라는 표현을 강조한다.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고 있지만 <수리세>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출발한다. 도입부에선 당시 언론 보도와 시사만화 등을 통해 농민들이 겪고 있던 현안들을 풀어낸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불씨 하나가 등장하고 퍼져나간다. 옛날 수확이 끝난 후 겨울에 접어들 즈음 과거에 시골에서 벌어지곤 했던 ‘쥐불놀이’처럼 숱한 불씨들이 연달아 출현한다. 마치 거대한 횃불들의 제전을 보는 기분이다. 내레이션으로 좀 더 정리된 당대 농촌 현실이 설명되면서 농민들이 줄다리기에 쓸 새끼줄을 엮어가는 과정이 진행된다. 힘겨루기 ‘대결’이라는 줄다리기의 속성을 감안한다면 열악한 제작 조건에도 불구하고 초반 전개 과정에 ‘힘’ 팍 줘가며 제작진이 임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겪고 있던 ‘수리세’, 즉 농사에 필수적인 물 사용료 문제가 대두된다. 수리세 문제는 유구한 역사를 갖는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을 기억해 보라. 고부군에 부임한 탐관오리 조병갑이 기존에 이미 잘 쓰고 있던 공용 저수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만석보’라는 새 저수지를 축조하고, 이를 위해 강제 부역과 세금을 걷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미곡 중심인 당시 상황에서 물에 대한 세금은 농민 전체에게 큰 부담을 짊어지게 만드는 현안이었고, 가렴주구를 위해 수리세로 장난을 치던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거대한 민란의 핵심 원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국사책에선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전국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초창기 노동운동과 함께 양대 축을 이루던 게 농민들의 소작쟁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 등으로 대표되는 봉기에서도 대중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든 주요 원인은 과도한 소작료와 함께 농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강압적 수리세 징수였다는 게 쉽게 확인된다. ‘치수治水’, 즉 물을 다스리는 어려움은 고대로부터 국가의 핵심 임무였고 현대 이전까지 필수산업의 최우선 순위였던 농업 성패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안정된 한 해 농사를 위해 필수적인 농업용수 공급은 정부 당국의 기본 역할이지만 오히려 농민을 통제하고 옥죄는 수단으로 악용되었기에 수많은 항쟁의 원인이 되고 만 것이다.

 

“수리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수리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다시 화면은 이어진다. 마을 청년들이 집단적 대응의 중심에 서게 된 과정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한 다음, 이들이 주도해 꽹과리를 쳐가며 주민들을 모으는 풍경이 연결된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같은 처지에 처한 마을 농민들이 그들이 꿴 줄을 어깨에 이고 징과 꽹과리 소리에 맞춰 하나둘 모여들어 거대한 파도처럼 집집을 잇는다. 당시 민중운동에서 자주 구사하던 수식어, ‘들불’과 ‘산맥’, ‘파도’ 같은 개념들이 쉽게 연상될 수 있는 부분이다. (‘강철’은 주로 노동자들에게 붙던 수식어다) 세금을 내려면 1년 동안 농사지어 수확한 작물을 적정가에 판매해야만 한다. 곡식 중심의 농사를 짓던 해당 마을에서 정부가 일정한 가격으로 쌀을 수매하는 건 사활이 걸린 문제이지만, 정부와 농민의 이해관계는 통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엔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업적으로 칭송되는 ‘토지개혁’과 뒤를 이어 집권한 군인 출신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 중요한 전제가 된다. 토지개혁은 일종의 ‘대항 개혁’ 측면을 지닌다. 체제 경쟁 차원에서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해 지주계층을 몰아내고 빈농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을 우려해 남한에서도 지주들이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금하고 무토지 농민들에게 할부로 일정 토지를 구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훗날 이승만 정부가 조작한 공안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봉암이 해당 부서 장관으로 실행한 사업 결과, 자기 땅을 갖게 된 소작인들의 지지와 함께 잉여자본이 농장에서 다른 분야로 이전하게 만든 중요한 정책이다. 그 결과 한국전쟁 전후 과정에서 북한이 현물세를 징발한 것과 비교하면 크게 손해 보지 않는 조건으로 소토지를 얻게 된 소작인의 쏠림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도시로 집중된 저임금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이들을 통제하려면 자연히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채찍은 전태일 열사로 상징되는 열악한 근로조건과 이를 개선하려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당근은 임금 인상을 회피하는 대신에 물가를 인위적으로 통제하면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쌀값은 중요한 지표가 되었고, 이를 위해 억제되어야 했다. 그 결과는 농민들에게 수익이 많지 않지만, 생산량은 뛰어난 작물과 품종 강요하였고, 필요할 경우 농산물 수입개방이 행해졌다. <수리세> 영화 속에서 틈만 나면 등장하는 당시 농업정세는 그런 군사정권의 일관된 정책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

군사독재에 대항하던 재야운동과 지식인들은 탄압을 피할 겸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1/3 이상을 차지하던 농촌으로 파고들어 농민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전농’의 기원 중 하나가 된 가톨릭농민회 같은 조직들이 이 시기에 태동했다. 호남지역은 특히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이 활발했고, <수리세> 제작을 위한 현지 활동에도 관련된 도움이 행해졌음을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은밀한 도움을 빌어 게릴라 촬영이 이뤄졌다.

농민들은 낮은 수매율과 저곡가 정책 탓에 수리세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형편에 처한다. 농민 활동가들은 이에 대항해 ‘현물 납부’ 운동을 기획하고 관에 여러 차례 대안 마련을 촉구하며 밀어붙인다. 작은 사회인지라 공권력과 농민들은 서로 잘 알 수밖에 없다. 그런 특성이 투쟁 과정에서 세밀하게 표현된다. 공무원과 경찰이 수시로 드나들며 회유와 협박을 반복한다. 이에 맞서 여러 차례 협상이 진행되지만 제대로 된 대처는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농민들은 행동에 나선다. 그 과정을 밀착해서 취재하기 어려운 환경 탓에 상당 부분 ‘재연’이 행해진 구석이 많지만, 당시 ‘외부세력’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워낙 극악했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당시 직접 제작한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회의를 벌이는 농민들의 풍경이나 실제로 벌어진 집단시위의 묘사는 긴장감을 제법 고조시킨다.

다큐멘터리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듯 밀착해 기록한 ‘있는 그대로’의 영상이라기엔 ①자유롭게 촬영하는 게 불가능한 당시 상황, ②개별 사건의 기록을 넘어 농민들의 상황을 형상화하려는 의도에 따라 극적인 기승전결을 강조하는 구성이라 ‘기록영화’라기보다는 선전용 시사뉴스 기획을 보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끝내 일정한 ‘승리’를 쟁취한 농민들의 힘을 보여주면서 도입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들불’의 기운을 형상화시키는 마무리로 끝난다. ‘프로파간다’로서의 효과를 전제로 8mm 필름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소규모의 게릴라 상영으로 공개된 후 오랫동안 잊힌 끝에 복원작업으로 부활, 한 시대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타임캡슐처럼 돌아왔다.

 

“파랑새”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파랑새”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파랑새>

<수리세>를 만든 서울영화집단은 2년 후 또다시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담은 신작 <파랑새>를 선보인다. 하지만 집단적 현물 납부 운동을 배경으로 삼은 전작에 비해 차기작은 좀 더 개별적인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중간 형태로 다루는 차이를 드러낸다. (비전문 연기자라 할) 실제 농민들을 기용해 당시 농촌의 어려움을 일반 배우들로는 소화하기 힘든 수준으로 재연하지만 ‘드라마’/‘픽션’의 형태로 이행하는 과정이 확인된다. 여전히 8mm 필름 촬영에 출연한 실제 농민들에게 별도의 출연료를 지급하거나 주변의 눈치 보지 않고 작업할 형편에는 도달하지 못한 터라, 촬영은 농민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나서 30분 정도만 가능했다고 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제작진이 농민들의 일을 돕거나 하면서 신뢰를 쌓는 과정을 택했다. 이렇게 촬영 대상과 밀착하는 방식은 옆 나라 일본에서 오가와 신스케 감독을 비롯한 현장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선보인 예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빈곤한 농민 가족이다. 부부와 아들 한 명, 딸 둘로 이뤄진 이 가족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통 살림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큰딸은 도시로 나가 섬유공장에서 일한다. 편지를 통해 이제 ‘시다’에서 ‘미싱 보조’로 한 단계 올라갔다는 기별을 전하지만 고향에 돌아오거나 돈을 보낼 형편은 아직 멀었다. 아들은 중학생인데 등록금이 밀려 학교 갈 때마다 곤혹스럽다. 수확이 한참 남은 형편이라 아들 손에 쥐어 보낼 현금이 도무지 없는 상황이다. 하루하루 근근이 견디는 나날인데 문제는 둘째 딸이 자꾸 아프다는 것이다. 좀 쉬면 낫겠지 하다 병을 키우고 나서야 부모 등에 업혀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딸은 복막염으로 당장 수술이 필요하지만, 거액의 수술비를 댈 재간이 이 가족에겐 없다.

병원비를 구하려고 아빠는 대출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협동조합이던 ‘농협’ 담당자는 뭘 믿고 대출해 주냐며 냉랭하게 대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다소 도식적으로 당시 농촌사회에서 농협이 내세우던 명분과 달리 농민들에게 군림하던 실태가 해당 장면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어려운 농민의 사정을 이해하고 돕기는커녕, 농민들을 정부의 통제에 맞춰 제어하는 하부조직으로서의 실상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확연하다.

 

“파랑새”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파랑새”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어렵게 여기저기 손을 벌려 겨우 수술비를 마련했지만, 수술을 받자마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딸을 퇴원시킨다. 입원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게 원래로 돌아갈 것 같았지만 머지않아 둘째 딸의 증상은 재발하고 더 큰 수술을 해야만 살 수 있다. 당연히 몇 곱절 더 많은 수술비를 구해야만 한다. 이쯤 되면 의료보험도 있는데 빈곤한 농민가족이 왜 이렇게 수난을 겪는지 의아해할 이들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중반은 아직 전 국민 중 과반이 건강보험의 혜택을 얻지 못하던 시절이다. 지역의료보험이 활성화되기 전인 해당 시기에 보험료 납부능력이 빈약한 주인공 가족은 적용을 받지 못하던 상태인 것이다. 지금의 시선으론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지만 실제로 전국민건강보험이 직장과 공무원을 넘어 정착된 건 1990년대 후반에 불과하다. 우린 종종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셈이다.

동료 농민들과 대폿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토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별다른 변화 없는 농민의 어려움이 부각된다. 훗날 UR(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폭발한 농산물 수입개방 과정은 이미 전개되기 시작한 상태로, 아무리 정부 시책을 믿고 농사를 지어도 이것저것 종자와 비료, 농기계 등에 들어간 빚을 갚고 나면 근근이 한 해를 넘기기도 어려운 수입만 얻을 뿐이란 당대 현실이 체감된다. 사람은 살려야 하는데 농협 대출도, 주변에 손을 벌릴 곳도 없는 이 가족은 끝내 농사를 짓는데 여전히 필수적이던 소를 팔아야만 한다. 하지만 ‘솟값 파동’으로 기억되는 가격 폭락 때문에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당장 수술비는 마련해도 이 가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전작 <수리세>의 집단적 대응 과정과 작은 승리를 묘사했던 제작진이 후속 작업에서 제시한 암울한 당대의 모습은 여러모로 쇠락해가는 농촌사회의 현주소를 전한다.

 

“파랑새”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파랑새”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는 내용상으로는 한국 농촌사회의 구조적 파국을 결정짓던 순간을 포착한다. 근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이라며 모 영화가 그렇게 칭송하는 농지개혁 이후의 사정, 현대 한국사회에서 농업이 감당해야 했던 수난의 역사가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폭로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 영화 <파랑새>는 영화의 제목대로 벌어진 독립영화에 대한 공안탄압 ‘파랑새 사건’*으로 또 다른 획을 긋는다.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반정부 자주제작 영화를 주목하던 공안 당국이 해당 작품의 제작진을 연행해 안기부에서 장기간 구속 조사한 사건이다. 실제로는 본 작품이 아닌 다른 영상 제작진으로 의심해 일어난 사건이지만 자신들이 기대했던 용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검열심의를 받지 않고 제작 및 상영했다는 구실이 덧붙여져 핵심 인원들이 옥고를 치른다.

영화는 극영화 특성이 전작에 비해 확연하지만, 굳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라는 구분을 얼마나 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장르 구분보다는 오히려 뉴스릴 형태에 가깝던 <수리세>에서 좀 더 ‘영화’로 이행하는 과정이라 표현하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영화는 동시대 민중가요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대표곡인 ‘그날이 오면’이나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와 함께 이제는 거의 잊힌 ‘땅의 사람들’ 같은 당시 대표적 민중가요들의 뮤직비디오 연작 영상을 보는 기분도 든다. 연기의 어색함과 한계를 극복하고 내용을 전하기 위해 민중가요의 가사와 그에 결합된 이미지 표현을 활용한 것이다. 여기에다 후반부로 가면서 한 가족이 겪는 잔혹한 수난을 보편적 담론으로 승화하기 위한 경로로 ‘포토몽타주’ 기법처럼 기록사진과 영상이 전시되는 구조를 전작에서 물려받고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불과 몇 년 사이에 더 허물어지고 있는 당대 가난한 농민들의 실정을 압축한 2편의 기념비적 작업이 완성된 것이다.

 

“하늘 아래 방 한 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하늘 아래 방 한 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하늘 아래 방 한 칸>

수도권 거주자 1,000가구 대상으로 실시한 ‘주거 불평등에 대한 국민 인식 수준 조사’ 결과 응답자 87.2%가 현재 주거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이라 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수도권 자가소유 가구의 84.4%도 주거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입장을 냈다. 유주택자와 고소득자일수록 ‘강남 쏠림 현상’을 주거 불평등 심화의 원인으로 꼽았다.(‘이데일리’ 2024년 3월 1일 기사 참조)

그런 가운데에도 (지방과 시골에 빈집이 넘쳐나고 미분양 사태가 속출한다지만) 여전히 신규 건설 붐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를 거듭하는 중이다. 과연 공급이 넘쳐나면 집값이 잡히고 원하는 이들이 노력하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런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요즘 온라인 공간에서 종종 ‘최악의 세대’ 드립이 반 농담 격으로 오르내리는 중이다. 자신들의 성장기가 제일 어려웠다며 하소연하지만 자기 세대를 넘어 공감대를 얻기는 힘든 게 대부분이다. 국가의 부와 총량은 팽창했지만 정작 평범한 시민 대다수의 삶은 그저 견디고 버티는 수준에서 조금의 등락만 기록할 뿐이다. 특히 주거난은 단 한 번도 해소된 적이 없었다. 한국의 도시집중화는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유례가 없을 만큼 엄청난 수준이며 작은 국토 중에도 수도권으로만 과도하게 밀집하는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그 기원은 산업화 과정에서 벌어진 ‘이촌향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수리세>와 <파랑새>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는 1980년대 농촌의 상황과, 이에 대비되는 도시 중심의 경제 호황은 그런 현상을 더 부추겼고, 도시로 모여든 가난한 농민들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달동네’로 향했다. 열악한 조건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견디던 이들이었지만, 도시화 과정은 결코 그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이미 서울이 팽창하면서 1970년대 이후 강남 부동산 개발이 시작되었고, 처음엔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강남으로 내쫓긴 이들은 이번에는 강남 요지에서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런 밀어내기 흐름의 결정판은 1988년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며 대대적으로 벌어진 도시정비 사업은 도시 빈민들에겐 감당할 수 없는 태풍처럼 작용했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효시로 기록된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은 바로 그렇게 쫓겨나는 도시 빈민의 기록이다.

올림픽은 한국전쟁 전후 잿더미에서 경제성장을 거듭해 선진국 진입을 노리던 한국의 야망을 전 세계에 과시한 위업이자 번영의 기대로 가득했지만, 그 직후 수도권은 물론 전국적으로 주택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한다. 자기 집을 소유한 이들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자산가치가 증가했지만 세입자들에겐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셋값 폭등은 1990년 절정에 이르렀고 그해 3-4월에만 언론 보도 등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20명 가까운 인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다. <하늘 아래 방 한 칸>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을 극화한 작업이다.

영화는 일용직 막노동에 종사하며 서로 이웃에서 세 들어 사는 이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선술집에서 한 잔 걸치고 귀가하는 형 동생 하는 남성들과, 그들을 기다리며 집안 살림은 물론 생계를 돕기 위해 부업에 열심인 여성들, 그리고 그런 부모들이 어떻게든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고자 애쓰는 대상인 자녀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초반에는 달동네지만 이웃 간의 정이 살아 있는 도시 빈민의 일상이 펼쳐지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 제작의 배경이 된 전셋값 폭등이 곧 이들에게 밀어닥친다.

집 주인들은 급변하는 세태에 맞춰 신분상승을 꾀한다. 예전에는 대가족처럼 사정 봐주며 지내던 처지였다지만 이제 돈 들어갈 구석이 많다 보니 주변의 분위기에 맞춰 전세 보증금 인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의 세입자 가족은 늘어난 요구를 맞출 능력이 없다. 속이 타는 아내는 역시 마음이 답답해 막걸리로 목을 축인 남편이 귀가하자 타박하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남편은 어떻게든 주변에서 돈을 구해보려 하지만 다들 처지가 뻔하기에 불가능하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했건만 농협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의 은행도 이들에겐 가혹하기 그지없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과 제작진이 연결되기에 마치 거울 효과처럼 돌아보게 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늘 아래 방 한 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하늘 아래 방 한 칸” 스틸 이미지(by 한국영상자료원)

아내는 ‘파출부’로 일한다. 그가 일하는 강남 아파트 안주인은 ‘복부인’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런 고용주에게 입술 꽉 물고 자금 융통을 호소해 보지만 뭘 믿고 빌려주냐며 돈 들어갈 데 즐비하다는 역정만 듣고 만다. 도무지 방법은 없고 집주인의 독촉 가운데 달리 이사할 수도 없는 주인공 가족이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형제처럼 지내던 동료는 끝내 절망한 나머지 (현실에서 숱하게 발생한 것처럼)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다. 동네 이웃들은 함께 장례를 치르며 세상을 한탄한다.

<하늘 아래 방 한 칸>은 ‘작은 영화’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던 작업들의 이전 형태와 비교하면 한층 더 극영화 특성이 두드러진다. 상대적으로 과거에 비해 늘어난 장비와 전문 배우의 투입이 더해져 ‘영화’라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은 결과물이다. 그런 변화 덕분에 사건과 상황의 재연을 넘어 인물 캐릭터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하지만 역시 마무리에 집중된 자료화면 발췌와 실제 사회적 타살의 명단 공개가 기존의 ‘영화운동’에서 비롯된 사회문제 고발과 민중운동 복무라는 대의적 측면을 계승하고 있다. 이후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어온 선전홍보용 영상 제작 그룹들은 ‘충무로’ 판으로 떠나 본격적으로 상업영화에 도전하거나, 혹은 ‘독립영화’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활동하게 된다. 사회운동 관련 교육 및 선전 용도로 ‘실용성’ 위주로 이어지던 작업은 영화 창작을 중심으로 변모한다.

 

이제는 잊힌, 과거 독립영화 창작 동기와 배급 방식 고찰은 덤

5-6년이라는 짧은 시차를 둔 3편의 단편영화들이지만 1987년이란 정치적 격변을 사이에 둔 분위기의 온도차는 확연하다. <수리세>와 <파랑새>는 전형적인 극영화 구성과 상당한 거리를 둔, 시사고발 속보성 뉴스릴 형태에 가깝다. 기술적·사회적 조건 때문에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된 게릴라 촬영 방식, 8mm 필름 촬영의 거친 질감은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1960년대, ‘68’ 혁명 전후 세계 곳곳에서 등장했던 영화운동 집단들의 작업을 연상케 한다. 반면 1987년 민주화 이후 상대적으로 확장된 제작 환경과 대중적으로 수용하기 편한 픽션 드라마 형태 요구가 <하늘 아래 방 한 칸>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같은 시기 독립영화의 상징으로 기록된 영상집단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가 대표적인 사례일 테다. (<파업전야> 출연 배우 중 상당수가 <하늘 아래 방 한 칸>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예전에는 제작과정은 물론 상영 과정도 게릴라 방식을 방불케 했다면, 1987년 이후 약간 더 열린 합법 공간을 이용해 공동체 상영은 물론, 비디오 복제를 통해 이런 부류의 영상물들이 전국적으로 공유될 수 있었다. 이는 과거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에서 민중가요나 독립출판물이 유통되던 것과 동일한 경로다. 요즘으로 치자면 상업 유통망 대신 ‘인디’ 배급을 하던 초창기 모델인 셈이다. 당대에 활성화된 사회운동단체들이 복제된 비디오를 구매하거나 대여하면서 미약하나마 경제적 순환과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일부를 제외하면 몇 년 지나지 않아 희미해져 갔다.

앞서 소개한 작업들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소개되고 활용되었는지 당대 환경을 고찰하는 것은 한국(독립)영화사를 독해하는 것을 초월해 과거에서 현재로 연속되는 한국사회 모순의 기원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의 암울한 풍경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전망의 출발점이기도 할 테다.

 

* ‘파랑새’ 사건과 당시 독립영화 제작 및 상영방식에 대한 경로는 <영화, 변혁운동이 되다> (성하훈 저, 푸른사상 출판, 2023)을 통해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본 글 내용 역시 해당 서적에서 참조했다)

 


작품 정보

 

수리세 Surise

1984, 한국, 다큐멘터리, 32분, 12세 관람가

감독 홍기선

제작 서울영화집단

 

파랑새 Parangsae

1986, 한국, 드라마, 40분

감독 홍기선, 이효인, 이정하

제작 서울영화집단

 

하늘 아래 방 한 칸 A Room Under the Sky

1990, 한국, 드라마, 33분

감독 이수정

제작 한겨레영화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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