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를 읽고

 

2022년 영화 ‘탑건: 매버릭’은 개봉 전부터 OTT에 밀려난 극장을 구원할 영화로 입소문이 파다했다. 미국 무기산업의 선전 영화는 안보리라 굳게 결심했는데도 여기저기 보이는 예고편 영상의 매력은 향수를 자극했다. 그 얼굴, 그 공기, 그 음악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나도 지지 않고 꼭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드디어 미국 샌디에이고 미드웨이 항공모함 박물관 위에서 ‘탑건: 매버릭’의 월드 프리미어가 열렸다. 헬기를 타고 온 톰 크루즈가 미드웨이 항공모함 위에 내려앉으며 프리미어 행사가 시작되는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이었다. 스필버그 감독은 오스카상 후보 지명식에서 톰 크루즈가 할리우드를 구했고 탑건이 영화계 전체를 살렸다고 했다. 팬데믹 이후 망해가는 헐리우드 극장 산업의 구원자가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라는 것은 전쟁 무기와 영화로 세계 질서를 지배해온 미국의 현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옛날 질서가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세계가 여전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마지막 허세 같은 것. 중년 남자들이 영화관에서 탑건을 보며 그렇게 울었다고 하는 데 이 또한 상징적이다.

손희정 비평가의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는 이렇게 된 바에 차라리 빨리 망해버리라 고 세상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지적으로 정신 차리라고 깨우침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의 1장에서 페미니스트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의 제안을 소개하며 “세상의 파국을 이야기할 때 ‘망했다’는 좌절감으로부터 선선하게 한 걸음 물러서는 태도를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아름다움”이라고 제안한다. 탑건을 보고 울었다고 하는 중년 남자들에게 ‘너네도 같이 망했으면 좋겠어’라고 속으로 욕이나 하던 나에게 더 나은 태도를 소개하고 있다. 이 말세를 대하는 우리의 임무는 “인류세를 가능한 한 짧고 얇게 만든 것”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피난처”를 다시 채울 수 있는 다음의 세를 서로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해러웨이를 들어 친절하게 알려준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책표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책표지

 

이렇게 저자는 1장부터 현재 우리가 맞이한 세계의 파국을 더 나은 파국으로 바꿀 수 있다고 태도 전환을 요청한다. 그리고 여섯 장에 걸쳐 영화라는 예외를 통해 우리가 현실에서 이 파국의 실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구체적 보편성’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오래된 영화 팬이라면 세계의 멸망은 흔한 설정이고 오래된 예언이다. 20세기 내내 영화에서 ‘이래서 저래서 인류는 망했어’라고 예언했다. 영화의 예언은 스펙터클이 되어 현실에 닥치는 재앙에 무덤덤하게 만드는 예방주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뇌다가도 불안한 기시감이 부쩍 자주 느껴지는 게 팬데믹 이후의 삶이다. 이 책의 여섯 장을 차례로 읽으면 이 불안한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차츰 알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류세와 쏠루세, 페미니즘과 군사주의, 휴먼과 테란, 레퓨지아, 돌봄과 선택가족 같은 키워드를 만나면 빨리 망해버리라고 저주하기보다 더 깊이 생각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3장 < “문명은 자연과 대결한다”는 믿음>을 읽으며 할리우드 주류 영화의 남성주의 대안 모델로 환호했던 여성 전사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평화란 상대보다 더 큰 막대기(무기)를 가지는 것이라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믿음을 뒤집지 못한다면, 여성 영웅 역시 군사주의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군사주의의 매트릭스 속에서 여성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 남는다. 군인을 낳고 키움으로써 군역의 의무를 다하거나, 스스로 군인이 되어 군역의 의무를 다하거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탑건: 매버릭’에서 오리지널 탑건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등장한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장애가 있는 여성 전사 퓨리오사에게 환호했던 팬으로서 자궁의 여자들을 지키는 여전사라는 캐릭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올해 개봉한다는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가 과연 퓨리오사 캐릭터 경계를 좀 더 넓힐지 아니면 팬데믹 이후 보수화 하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스틸컷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스틸컷

이 책은 마지막 질문으로 마가릿 애트우드의 말을 빌려 “수 세기 동안 서구에서 찬양과 홍보의 대상이었던 민주주의가 첨단 감시 기술과 기업 자본의 힘에 의해 안에서부터 붕괴하고 있다. 현재 인간 사회는 세계 인구의 단 1퍼센트가 전체 부의 80퍼센트를 장악한 극단적 가분수 피라미드를 이룬다.”며 필연적으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상상한다. “종말을 맞이한 건 인간뿐이지 않은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간 너머를 말하되 파괴적인 인간 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가 앞으로 생각해야 할 방향을 알려준다. 영화는 이제 극장에 모여 공동체적인 경험을 하는 매체가 아니라 스트리밍을 통해 개인적인 경험을 하는 매체가 되고 있다. 영화를 보면 망 넘어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고 교묘하게 조정되고 있다는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손상된 시스템에 손을 대기엔 이미 늦었다는 무력감이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손희정 작가가 친절하게 제시하는 영화 속 조각들을 조금씩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세계의 멸망과 동시에 그 파국 너머의 가능성도 상상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라고 부추기는 손희정 작가의 책은 오랜만에 신선한 생각의 전환을 준다. 인간이 뭐라고. 망할 때 망하더라도 어떻게 좋은 거름으로 쓰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지. 새로운 DNA를 가진 씨앗이 싹을 틀 때 거름의 기억이 도움이 되겠지?

 

이고운_ 영화 《호스트 네이션》 감독


※ 병역거부, 반전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 세상’ 블로그와 기사 제휴로 이 글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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