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 수술을 처음 결심한 건 20대 후반의 어느 봄이었다. 근처 비뇨기과에 전화를 걸었다. “정관 수술 예약 가능한가요?” “네, 근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대뜸 나이를 묻는 상황이 이상했지만, 별생각 없이 답했다. “아… 근데 20대는 좀 곤란한데, 혹시 결혼하셨어요?” 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그럼 곤란하다.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일 거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따질 생각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정관 수술을 받는데 나이나 결혼 여부가 대체 왜 필요할까. 검색을 해보니 여러 증언이 나왔다. 어리면 안 해준다, 미혼은 안 해준다, 자녀가 없으면 안 해준다 등등. 의사가 생명윤리에 관한 자신의 소신이라며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주변의 경험자들에게도 물어보니 다들 비슷한 상황을 겪고, 다른 병원에서 거짓말을 한 뒤에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내가 정관수술을 결심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혼과 비출산에 대한 지향이 뚜렷해졌고, 안전한 섹스와 피임의 필요성을 느꼈다. 가능하다면 인간 개체 수가 더 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한편에 있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여성과 남성의 피임 중 단연 후자가 수월하고 안전하다. 자궁 내 기구 설치나 경구피임약 복용은 정관 수술보다 부작용 확률이 높을 뿐 아니라 피임률도 낮다. 정관 수술은 단 10분 만에 끝나고 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하며 부작용도 적은 데다 완벽한 피임법에 가깝다. 

며칠 뒤 나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어 애인과 함께 다른 병원을 찾았다. 함께 간 애인은 아내 역할을 맡았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는 또다시 결혼 여부를 물었다. 이른 나이에 4년 전 결혼, 자녀 한 명, 이후 자녀 계획 없음을 또박또박 말했다. 오랜 숙고 끝에 아내와 함께 한 결정이란 것도 덧붙였다. 그런데도 의사의 질문과 설득은 멈추지 않았다. 후회할 수도 있다, 조금 더 고민해봐라, 요즘 같은 때에 자녀를 더 낳는 것이 좋지 않겠냐. 심지어 부모님이 아시냐, 하나 있는 자녀를 잃을 수도 있는데 그땐 어떡할 거냐, 아무리 그래도 내 의료적 양심이 걸린다, 따위의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30분간의 설교 끝에 나는 의사에게 진정성을 인정받아 서류 한 장을 건네받았다. 정관절제술 동의서. 하단에 배우자 서명란까지 있는 문서를 건네며 의사는 ‘일주일만 더 고민해보고 이 문서를 작성해서 다시 오라’고 말했다. 힘이 쭉 빠졌다. 간단한 수술 하나 받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결심까지도 많은 고민을 거쳤는데, 또 다른 장벽을 계속 마주하니 분노가 이는 동시에 궁금해졌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막는 이유가 뭘까. 

 

불과 50년 전만 해도, 국가는 ‘가족계획사업 10개년계획’에서 이런 목표를 내세웠다. “자궁내장치보유자 100만 명, 정관수술자 15만 명, 약제기구계속사용자 15만 명을 국고지원으로 확보”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국가가 직접 나서서 피임을 장려한 거다. 심지어 이후엔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에게 예비군을 면제시켜주거나 아파트 분양권을 주기도 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며 시술 장비를 갖춘 병원 차량이 마을을 돌면서 ‘피임서비스’를 제공한 적도 있다. 만일 내가 30년 전에 비뇨기과를 찾았다면, 나는 국가의 지원으로 수술비를 절약하고 덤으로 각종 복지혜택을 받으며 수술대에 올랐을 거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전 사회적으로 저출산이 ‘위기’라고 말해지면서 각종 정책과 제도, 문화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빠른 변화에 결혼과 출산은 장려 정책을 넘어 도덕이자 당위가 됐고, 비혼과 비출산, 그리고 피임은 억제의 대상이 됐다. 저출산 대책이란 이름으로 정부는 지역별 가임기 여성을 표기한 ‘출산지도’를 만들었고, 보건사회연구원은 여성의 ‘불필요한 고스펙’이 문제라며 고스펙 여성들에게 취업상 불이익을 주고 “하향적 선택 결혼”을 유도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공익광고에서는 “출산율이 줄어 대한민국이 줄어든다”거나 “자녀는 국력”, “출산으로 가정도 나라도 지켜주세요” 따위의 말이 흘러나왔다. 각 대책과 연구, 광고의 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국가의 인구조절 판단이 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했다. 

여러 사정으로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도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불과 10분 뒤 나는 수술실에 누워 있었다. “충분히 고민하셨죠?” 의사는 이외에 별다른 질문 없이 유의사항을 전하고 바로 수술을 시작했다. 또 거절당할까 긴장했던 내가 우스울 만큼 너무나도 간단했다. 수술은 10분 만에 끝났다. 가벼운 뻐근함 외에 다른 어떤 고통도, 이후 별다른 부작용도 없었다. 이렇게나 간단한 수술을 받기까지 참 복잡한 시간을 거쳤다.

결국, 의사의 재량이었다. 국가의 인구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의사의 재량. ‘정상가족’을 기준 삼아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 따위의 메시지가 의료 영역에서도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이다. 이에 대해 노들장애학궁리소 박정수 연구원은 이렇게 표현했다. “성인 남성의 자유의지가 정상가족의 가치를 대변하는 의사에 의해 좌절될 때 그때서야 남성은 ‘생명을 통치하는 권력’의 존재를 실감한다.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타자의 정상성과 도덕 기준에 달린 경험 말이다.”

몸이 하나의 숫자이자 재생산의 도구로 취급되는 경험에서 나는 통제의 의미를 새삼 몸으로 깨닫는다. 얼마 전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판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통제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글 _ 지민
한동대 부당징계 당사자. 비혼생활공동체에서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며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여행자>에서 활동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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