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매국노와 세계시민의 경계에서

"스파이의 아내" 영화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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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스파이란 존재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초기 대표작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는 명언을 남겼다. 어떤 존재에 대해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인류 역사와 함께한 집단 간 전쟁에서 상대국의 정보를 빼내오는 임무는 중시되었고 이를 행하는 이들은 자국에선 애국자이자 영웅으로, 적국에선 간첩이나 스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정체가 들통 나면 이들이 겪게 될 위험은 어마어마했다. 혈연이나 인맥으로 이어진 의리, 국가에 대한 충성, 성과에 포상으로 주어질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 등이 그에 대한 보상가치로 기능하지만 감수해야 할 몫에 비한다면 수지타산이 맞질 않다. 결국 약점이 잡히거나 징벌 대신으로 강요되는 임무가 아니라면 강렬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근대 국민국가 탄생 이후로 국가 혹은 민족에 대한 충성심, 또는 대의와 이념에 대한 자발적 의지가 그 위태로운 결정에 접착제 노릇이 돼왔다.

우리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첩보영화에서 보는 007 제임스 본드는 사실 일반적인 스파이와는 거리가 먼 존재다. 대부분의 스파이는 정체를 숨기고 최대한 평범하게 가면을 쓴 채, 적대국 정부조직과 상대편 스파이와의 피 말리는 첩보전에 신경쇠약 직전 상태로 버텨야 한다. 결심이 여간 탄탄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다. 대중문화에서 각광받는 소수의 낭만적프로페셔널 대신에 다양한 형태로 위험을 분산시키고 부정확한 다량의 첩보를 정련해 조각모음 하는 방식으로 현대 국가 간 스파이 대책은 바뀐 지 오래다. 하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개인이 신념에 따라 두 개의 조국을 택한다거나 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로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불리던 리하르트 조르게를 들 수 있다.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차 세계대전에는 아버지의 조국을 선택해 독일군으로 참전했다 손가락 셋을 잃고 상이용사가 된다. 하지만 이후 공산주의 사상에 귀의해 소련의 정보요원으로 변신, 나치 독일에서 언론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다양한 임무에 투입된다. 그의 이름을 불멸로 만든 것은 일본에서의 정보수집 임무였다. 그는 친 나치 인사로 행세하며 동맹국인 일본에서 안정된 활동을 펼치며 일본의 반전세력과 교우관계를 맺고 광범위한 정보망을 구축한다. 그가 입수해 소련에 보낸 정보는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계획의 작전계획과, 이후 독일의 공격으로 수도 모스크바 함락 위기에 처했을 당시 독일의 동맹인 일본의 참전여부 확인이었다. 이 정보들이 없었다면 소련은 독일에게 정복당해 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임무는 대단한 성과를 낳았다.

하지만 적국인 일본의 방첩업무 또한 놀고 있지는 않았던지라 결국 조직은 꼬리가 밟히고 조르게와 일본인 협력자들은 체포되어 전쟁 막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독일인이었지만 사상적으로 국제공산주의를 신봉했기에 소련은 두 번째 조국이자 그에겐 진정한 조국이기도 했다. 한편 자기 나라의 패망을 감수하고 조르게에 협력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 또한 자신들의 행동이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것임을 여러 차례 진술에서 밝힌 바 있다. 당시에는 매국노, 반역자 소리를 들었지만 후대에 이들은 의인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에겐 한일 문제를 넘어서서 이런 이들의 활약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영화세계에 큰 영향을 줬으며 경외한다고 공언한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스파이의 아내>는 격동의 세기에 활약했던 가상의 인물들 이야기로 그런 시대상을 증언하는 영화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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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1. “코스모폴리탄유사쿠와 애국자타이지의 경우

 

영화의 시대배경은 일본이 본격적인 제국주의의 길을 걸으며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만주를 넘어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자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이다. 이미 일본제국은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자신의 국력과 국제정세를 헤아릴 시야를 상실한 채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전체와 적대하기 시작한 상황. 일본 굴지의 무역할 고베의 무역상인 유사쿠는 그런 와중에도 문화와 예술을 애호하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자처하며 그런 시대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삶을 아내 사토코와 함께 살아간다. 아내와 동생을 배우로 단편영화를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가족의 평화는 바깥의 광풍 속에서 위태로워져 간다. 사토코의 소꿉친구인 타이지가 어느날 고베의 헌병대장으로 부임해 온다. 겉으로는 우호적이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민간인도 사찰하던 헌병대의 수장 타이지는 유사쿠가 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태를 보인다며 수 차례 경고한다. 시장 조사 겸 전쟁이 더 격화되기 전 여행 겸 동생과 함께 만주로 여행을 떠났던 유사쿠는 뭔가 비밀은 안은 채 돌아오고, 이후 가족의 운명은 격렬한 시대상황과 하나가 된다.

영화는 당대 시대배경을 적절히 재현해낸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야외촬영 대신 사극 드라마 세트를 활용해 비용을 절약하면서도 당시 상황에 걸맞은 소품과 장소를 활용해 1940년대 고베를 재현함은 물론 세세한 장치로 설정과 고증을 맞춰낸다. 하지만 그런 정교한 연출은 기본적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두 부류의 인간형을 상징적으로 대비시키는 데 집중되는 구조다.

유사쿠는 부유한 사업가이지만 스스로를 세계시민, ‘코스모폴리탄으로 자임한다. 영화 초반의 그는 그저 평화를 사랑하고 문화예술을 애호하는 자선가에 가깝다. 하지만 만주에서 그가 본 것은 도덕적 인간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것, 관동군의 생체 실험 증거였으니 그는 이제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유사쿠는 이런 기밀을 세계 각국에 알리려 한다. 하지만 군국주의에 취한 당시 일본에서 그의 그런 시도는 매국노’, ‘반국가적 행위라는 낙인이 찍힐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유사쿠는 나라를 뛰어넘는 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세계시민이기에 보편적 인권과 윤리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라는 신념에 투철하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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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지는 유사쿠의 아내인 사토코와 함께 산골지방에서 성장한 청년이다. 훤칠한 외모에 수줍음 많은 그는 하지만 헌병대장이라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는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회적으로 우대받는, 이미 군벌 화된 일본군 내에서 자리를 잡았기에 개인적으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직무에 충실할 태세가 되어 있다. 하필 그의 직무는 군대 내는 물론 민간인에게도 국익을 내세워 총칼을 휘두르던 당시 헌병대의 지역 책임자인지라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편집광적 감시와 야만적 폭력을 구사해야 한다. 유사쿠와 같은 교양이나 안목이 없이 국가와 군대라는 배경을 뒤로 한 타이지의 충실한 직무란 그릇된 방향으로 굴러가는 일본제국의 대행자로서 온전히 동조하는 외길 통행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는 처음엔 수동적으로, 하지만 점차 적극적으로 그런 면모를 드러내고 유사쿠와 주변 사람들을 갖은 수단으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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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토코가 있다. 영화 초반의 그녀는 유사쿠와 타이지의 대립 사이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토코는 정치적 입장이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남편인 유사쿠를 의지하며 순종적인 아내, 그리고 어릴 적 친구 타이지와의 재회를 반기는 천진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남편이 뭔가 변했음을, 그리고 타이지가 유사쿠를 압박하기 위해 그녀에게 의혹을 흘리면서 사토코는 그녀 나름의 방법으로 남편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두 남자 사이에서 자신의 장래와 일본의 운명을 선택하기 위해 결단하게 된다. 개인으로서의 사토코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폭발하는 곰이나 그런 맹수에 맞서 자식을 구하려는 어머니의 화신처럼 놀라운 판단과 용기를 발휘한다. 또한 일본이 나아갈 두 가지 방향, 평화공존과 침략전쟁의 길 중에서 남편을 그저 따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한 전자의 방향을 추동하기 위한 실행에 나서는 대국적 결심을 보인다. 두 남자가 일관된 입장을 개인으로서 구현한다면 영화의 주인공 중 능동적 변화를 겪고 시대의 증인으로 남는 건 사토코이다.

 

2_2. 사토코의 선택 : 유사쿠와 타이지 사이에서

유사쿠가 벌이는 위험천만한 행동의 진의를 알게 된 사토코의 초반 행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이다. 꼭 당신이 그래야 하는 것이냐, 적당히 눈 감고 살면 안 되겠느냐는. 그런 행동을 무조건 비난할 순 없다. 우리는 역사에서 "매국노" 의 치욕을 무릅쓰고 양심과 정의에 따랐던 이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위업에 경의를 표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과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상처와 고통은 그저 당사자들의 사정으로 간과하기 일쑤다. 나 자신의 일이라면 과연 그렇게 결단하기 쉬울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본다면 그런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용기를 내었는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연좌제가 사실상 한국에서도 얼마 전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그런 부조리한 관행의 원조 격인 파시즘 체제 아래 일본제국에서 체제에 저항한다는 행위의 무게감을 짐작하는데 약간의 참고가 될 법하다.

사토코의 첫 등장은 마음씨 좋고 순종적인 부잣집 안주인이다. 유사쿠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쟁은 싫다고 하지만, 어릴 적 친구 타이지가 전하는 은근한 경고의 메신저이기도 하다. 타이지의 교묘한 언술에 휘말린 그녀는 남편이 안정된 삶에서 뭔가 일탈하고 있다는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는 새 정보원 노릇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유사쿠가 숨기고 있던 비밀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변모하는 사토코의 결심 원인에 대해 관객의 판단은 두 갈래로 나뉠 터이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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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는 사토코는 유사쿠의 대의를 일정부분 이해하고 동조하지만 사토코의 행동 동기는 결국 스파이의 아내’, 즉 유사쿠를 믿기에 그가 벌이는 정의롭지만 위험한 일에 동참한다는 해석이 가능하겠다. 사토코는 사건의 진실을 어느 정도 확인한 뒤 남편이 왜 그런 선택에 일렀는지 이해하고 그의 뜻을 되돌리기 불가능함을 인정한 뒤 헌신적으로 유사쿠의 모험이 성공할 수 있도록 조력하려 한다. 시동생인 후미오가 체포와 고문 끝에 투옥되었기에 이제 유사쿠가 믿고 의지할 동반자는 자신밖에 없다는 각오와 함께 묘한 자긍심이 사토코의 표정에 종종 떠오르곤 하는데, 주인공의 단선적이지 않은 감정 상태 표현이지만 스테레오 타입의 사랑에 빠진 순종적 여인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이는 후반부 유사쿠가 그녀에게 감수하길 바라는 행위에 대한 해석과도 연결될 부분이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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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는 좀더 사토코의 각성성장에 무게를 두는 관점의 해석이다. 사토코는 유사쿠를 사랑하기에 그가 하려는 행위의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는 것처럼 보일 순간이 몇 차례 분명 존재하지만, 남편인 유사쿠 또한 만주에서의 목격 이전까지는 그저 피상적인 형태의 자유주의자에 불과했었다. 그녀 또한 남편이 목격했던 참극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고, 이후에는 유사쿠 못지않은 능동적 주체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초기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그저 핀-업 포스터에서 시선을 끌던 것 외엔 별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던 본드 걸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인 파트너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리고 스파이의 숙명을 깨달았을 때 그녀가 보이는 태도는 스파이의 아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스파이로서의 독립된 주체로 평가하기에 하등 손색이 없어 보인다.

 

2_3.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사토코

영화의 스릴이 극점에 달하는 순간, 이제 유사쿠와 타이지는 영화 속에서 증발하고 사토코만 남는다. 사토코는 그녀를 양쪽으로 견인하려던 두 세계(유사쿠와 타이지로 표상되는) 모두와 표면적으로 단절된 채로 끝내 막지 못한 전쟁의 시간을 홀로 견딘다. 무려 5년 동안. 고베의 풍족한 무역상 안주인에서 그녀는 정신병원에 감금된 상태로 세상과 벽을 쌓은 채다. 2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은 시점, 정신병원의 시멘트 벽 안쪽으로도 전황은 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중인데도 사토코는 별다른 미동도 하지 않는다. 외견상으로는 그녀는 완벽히 이용만 당하다 버림받은 가련한 여인인 셈이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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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사쿠의 지인인 교수가 면회를 왔을 때 사토코는 망조가 든 조국에서 탈주한 이(유사쿠)와 맹종한 이(타이지)가 사라진 자리, 이제 곧 패망이 예정된 일본에서 자신은 미치지 않았지만, 지금의 일본 땅에선 그 자체가 미친 거겠지요.’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긴다. 두 남자가 각자의 신념을 위해 각기 자신을 일정부분 도구로 취급하고 장기 말처럼 다룬 데 비해, 사토코 본인은 명백히 자신의 입장을 객관화하고 유사쿠의 대의에 동의했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신념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가 감금된 고베 정신병원 부근에 연합군의 대공습이 시작된다.

고베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일본으로선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의 개항지 중 한 곳이자 서양과의 교류 창구였고 굴지의 산업지대이자 20세기 최후반까지 동아시아 최대의 항만 시설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에 가려졌지만, 2차 대전 말 그 중요성에 착근한 결과는 전략폭격 대상지역 채택이었다. 이 대공습은 당시 고베 주민들에게 잊지 못할 전쟁의 상흔으로 남았다.

국내에선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잘못된 선전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반전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가 바로 고베 대공습을 배경으로 한다.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된 단편소설집 저자 노사카 아키유키는 실제 자신의 체험들을 극화 수준으로 집필할 정도로 평생을 고통 받았다. 사토코는 그 고베 대공습의 한복판에 선다.

정신병원의 담장이 무너지고 의기치 않게 자유의 몸이 된 사토코는 역설적으로 “Bravo!"(국내 번역으론 훌륭합니다!“)를 읊조린다. 영화에서 그녀가 이 대사를 치는 순간은 이야기의 전환점임을 사토코가 깨닫는 순간의 인지이자 감탄의 결정적 찰나들이다. 남편과 그녀가 어떻게든 막아내려 했던 전쟁의 결말이 결국 입증되고,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는 상황이 결국 이웃들의 비명과 불타는 동네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아이러니 앞에서 사토코는 전율한다. 그리고 영화는 에필로그를 향해 몇 발 더 나아간다.

전반적으로 역사의 두 방향을 의인화한 것 같은 두 남자와 그 사이에서 주체적 선택과 증인으로 자리매김한 한 여자 역할을 소화한 주연배우들의 연기는 대단히 뛰어나다. 영화의 첫 번째 구도는 유사쿠 사토코 타이지의 긴장 관계이고 두 번째 구도는 유사쿠, 사토코 타이지이며, 세 번째 구도는 유사쿠 사토코의 관계성이다. 영화의 출발은 유사쿠이며 반동적 인물은 타이지이지만 최후의 종결자는 사토코인 셈이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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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조연 활동 끝에 이제 영화의 주연급으로 올라선 연기파 배우 유사쿠 역 타카하시 잇세이의 절제된 연기력은 흠잡을 데 없이 양심적 지식인의 면모 그대로이며, (스캔들로 평판 갉아먹었지만) 타이지 역의 히가시데 마사히로 또한 개인의 악의보다는 체제에 잡아먹히는 당시의 수많은 인간 군상을 연기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토코 역의 아오이 유우는 놀라운 면모를 펼친다. 국내에선 특히 패션 리더이자 청춘물의 상징처럼 각인된 배우지만 그런 통념상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녀 홀로 영화 후반을 통째로 이끌고 나간다. 아쉽게 이 세 명 외의 배우들은 각자의 기능적 역할에 그치는 아쉬움이 있지만 세 배우의 배역 대결만으로도 충분히 두 시간 가까운 영화 내내 긴장과 몰입도는 충분히 유지된다.

 

3_고전 스릴러의 매력 영화 속 영화들

일본에서 만들어진 2차 세계대전 본격 반성영화라는 게 국내 관객들에겐 흥미로운 요소겠지만 <스파이의 아내>는 소재의 파격성은 물론 정교한 전개와 다양한 영화적 장치들을 활용해 그저 주제에만 매몰되기는커녕, 오히려 이야기의 풍요로움을 극대화해낸다. 특히 영화 속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그 자체로 작품 속 세계관과 시대상황 고증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처음 관객에게 선보이는 영화는 유사쿠가 아내 사토코와 동생 후미오를 배우로 촬영한 단편영화다. 미스테리 스릴러 형식을 띈 해당 영화의 촬영 현장에서 사실적 연기를 주문하는 유사쿠에게 사토코는 힘들다고 푸념하면서도 남편을 신뢰하며 끝까지 연기에 임하는데, 이는 부부의 캐릭터는 물론 후미오의 역할까지 골격을 잡아주는 암시장치로 기능한다. 나중에 보면 이 단편의 전개가 영화의 극적 반전을 예고하는 셈이다. 또한 극장에서도 체제를 홍보하는 (과거 우리의 대한 뉴스처럼) 전쟁 광고뉴스와 검열이 자행되던 시절에 직접 자유로운 창작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시사회를 여는 유사쿠의 캐릭터 또한 그에게 닥칠 반전을 상징하는 유용한 장치로 활용된다.

두 번째 영화는 기록필름이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관동군의 생체실험, 훗날 731 부대로 알려진 행각을 기록한 가상의 다큐멘터리를 유사쿠와 후미오는 비밀리에 반입한다. 그리고 이를 다시 해외로 반출하려 시도한다. 사토코 또한 남편 몰래 이 필름을 보고 유사쿠의 위험한 행동에 동조하기에 이른다. 물론 헌병대는 이 기록을 찾아내고자 혈안이 되지만 정작 그들 또한 그에 담긴 내용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다. 그리고 끝까지 타이지와 그가 이끄는 헌병대는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정작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다.(체제에 저항할 용기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그들에겐 오히려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진실이 열려 있더라도 이를 외면하기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이 두 개의 전혀 다른 영화 필름은 <스파이의 아내>가 다루는 주제의식을 극적으로 교차시키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실제 영화 중반 이 두 필름은 서로 혼재되는 극적 순간을 연출하기도 한다.

세 번째 영화는 부부가 모험을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즐기듯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기 직전 등장하는 일본제국의 홍보영상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이 입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영화 속 해석은 아시아를 장악해나가는 일본제국의 무용을 찬탄하지만 유사쿠와 사토코에게는 과도하게 전선을 확대시키는 자멸행위의 서막으로, ABCD 포위망(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의 완성으로 이해된다. 그저 선무방송을 맹신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주체적인 이들에게만 보이는 광고의 이면인 셈이다.

그들이 얼른 지나기만 기다렸을 관제영상 후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는 일본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고치야마 소슌 Priest of Darkness> (1936)이다. 감독은 단 6년간 활동하며 26편의 영화를 남기고 1937년 징집되어 1텬 후 중국전선에서 급병으로 죽었다. 소시민과 하층민들의 캐릭터를 실감나게 구현하고 반영웅적 주인공을 내세우며 서구 고전영화와 문학적 요소를 접목시켰던, 영화 속에서 이미 고인이 된 감독의 영화를 극 중에서 상영하는 설정은 허투루 삽입되었을 리 없다. 불과 28세의 나이로 일본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가 비통해 할 만큼 너무 이른 죽음을 맞게 한 전쟁의 무용함을 고발하기 위한 영화적 표현의 발로다.

<스파이의 아내>는 이렇게 영화 속 영화의 장치를 통해 극중 긴장감과 대립하는 가치관을 교차시켜 관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나 행위만으로 모자란 표현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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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고전 스릴러의 매력 저예산을 극복하는 장치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 거장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작가이지만 <스파이의 아내>를 만들면서 제작비 마련에 무척 애를 먹었다고 전한다. 감독 데뷔를 핑크 무비’(에로 장면이 일정부분 들어가면 나머지 부분은 감독 재량에 맡기는 방식, 독립예술영화 감독들이 핑크무비로 데뷔하는 경우가 일본에는 적지 않다)로 시작했고 상업적 고려도 등한시하지 않아 왔지만 제작비 마련이란 관록의 거장에게도 늘 어려운 문제다. 그만큼 영화산업의 주류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상업적 고려 외엔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는 반증인 셈이다. <스파이의 아내> 역시 일본의 전쟁범죄와 과거사의 감추고픈 지점을 정확히 관통하기에 시작부터 어려움이 너무나 많았다. 시대극이라 고증이나 소품을 위해 상당한 예산이 투입되어야 함에도 끝내 이 영화는 안정된 투자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한다. 결국 NHK 방송사의 지원으로 TV 영화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시 극장 상영을 위한 변형을 거쳐 스크린에 걸릴 수 있었다.

방송국의 지원이 있었지만 TV 영화는 극장 개봉영화에 비해 소규모 예산 밖에 제공되지 않는다. 1940년 격동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로서 이는 해결하기 거의 불가능한 난맥상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큰 문제없이 광기와 전쟁에 물들어가는 당시 일본 풍경을 적절히 재현해냈고, 주요 캐릭터에 극도로 집중된 연출로 군더더기를 뺀 선택과 집중을 선보인다. 그럼에도 필수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야외 세트 촬영은 NHK 대하드라마 세트장을 그대로 활용해 비용 지출을 최소화하고, 감독의 고향이자 영화 속 배경인 고베의 고풍스런 건축물들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고베 철도박물관에서 노면전차 장면을 촬영하고 고베 세관을 헌병대 본부로 살짝 바꾸는 식으로 영화 속 정교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마침 고베란 지역 자체가 개항지로 선정된 유서 깊은 항구도시로 동서양 문화가 어우러진 풍경이 적지 않고 지역 특성을 살릴 여지가 많았던 이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탄탄한 시나리오와 꼼꼼한 사전준비가 기본이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스파이의 아내" 영화 스틸 이미지

시대극이 발달한 일본 영화답게 소소한 데에서 확인되는 고증 또한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승전보에 도취해 있지만 연합국과의 대립으로 자원 수급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일본 내 풍경은 유사쿠가 연말 선물로 무역상사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설탕과 떡에 환호하는 순간에 폭로되며, 헌병대의 무작위 외국인 체포연행은 정상적인 상거래와 기업 활동에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묘사된다. 부부가 거사를 위해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한 엔 대신에 전시에 유용한 귀금속을 구입하는 풍경이나, 양복 대신 국민복 입기를 강요하고 서양술이라며 위스키 마시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는 풍토 또한 당시 군국주의화되던 일본의 풍경을 성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선명하고 심오한 주제의식에 이런 세밀한 설정과 고증은 때로는 과잉으로 초점을 산만하게 만들 때도 간혹 있지만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이야기의 전개를 더욱 풍성하고 복합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치밀함으로 훌륭히 작동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볼 때는 그저 무익하게 등장하는 순간이나 소품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집중력을 발휘해보라. 보이지 않던 2%가 숱하게 쏟아져 나올 테다.

 

"스파이의 아내" 영화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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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_시대극의 모범사례로서 <스파이의 아내>의 가치

강렬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작품이 만들어질 때 상당수 사례는 어깨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주제를 가르치려 하는 계몽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곤 한다. 혹은 주제의 무게감을 분산시켜보고자 과도한 통속적 요소나 최루성 신파를 넣어 이도저도 아닌 밸런스 붕괴를 낳기도 한다. 특히나 민감하고 감추고 싶은 역사의 어둠을 다룰 때는 더욱 세심한 고민과 기획이 절실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스파이의 아내>를 통해 우경화되어가는 현대 일본의 도덕적 해이를 과거사의 한 자락을 재현해 날카롭게 질타하면서도, 영화 장르의 역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영화 역사의 풍성한 선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예산 제약으로 인한 스펙터클의 한계는 촌철살인의 대사와 디테일한 당대 시대상 묘사로 최대한 극복하는 노하우도 제대로다. 우리에겐 스테레오 타입으로 박혀 있던 1940년 전후 격동의 동북아시아와 세계정세가 관객의 뇌리 속에 자리 잡고 각인된다. 글자로만 접하던 만주국에 대한 당대의 생각이나 군국주의 하 일본의 시민들의 일상들이 이 영화에선 가능한 선에서 시각화되어 흥미를 더한다.

근래 몇 해 동안 일본의 거장 감독들은 꾸준히 자국의 우경화와 역사인식 부재에 대한 근심을 작품 속에서 표현해왔다. 사실 그런 작품들이 적지 않음에도 우리는 그저 125백만이 사는 일본 사회를 자민당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을 위한 역사인식의 공유와 미래지향적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에서 <스파이의 아내>는 문화예술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이자 영화 자체로 걸작에 가까운 완성품임을 보증할 수 있다. 작품 속 사토코의 잊지 못할 대사처럼, “훌륭합니다!”

 

<작품정보>

 

스파이의 아내 Wife of a Spy

 

일본로맨스, 멜로, 스릴러, 시대극2020

2121.3.25 개봉11612세 관람가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주연 아오이 유우, 타카하시 잇세이, 히가시데 마사히로

 

2020 77회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감독상)

2020 키네마준보 No.1 일본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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