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독립다큐멘터리의 머나먼 기원을 찾아서

 

1_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획전으로 돌아온 <산리즈카> 연대기

2022년 9월 22~29일, 경기도 고양·일산 일대에서 진행하는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DMZ-POV’라는 명칭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의 문제적 경향을 소개한다. 3개의 POV 기획전 중 가장 눈여겨본 것은 올해로 서거 30주년이 된 일본 다큐멘터리의 거장 故 오가와 신스케의 대표 작품인 ‘산리즈카’ 연작을 비롯한 9편 특별 상영이다. “오가와 신스케: 다큐멘터리가 수확한 것들”이라는 콘셉트로 묶인 영화들은 1967년부터 1987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즉 오래된 건 55년 전 작품인 셈. 흑백화면에 후시녹음, 지글거리는 영상과 둔탁한 음향으로 가득하다. 대체 왜 이 고색창연한 기록영화들을 수고를 들여가며 다시 상영하게 된 걸까?

단지 일본 다큐멘터리의 거장이라 해서 굳이 반세기 전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오가와 신스케의 작품 세계와 그가 다룬 주제는 한국독립영화의 초창기 활동에도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계의 시조로 불리곤 하는, <상계동 올림픽>과 <송환>의 김동원 감독은 오가와 신스케 감독이 창설에 깊숙이 참여한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만나 교류하며 그가 일찍이 1960년대부터 선보인 사회참여 기록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김동원 감독과 동시대 다수의 기록영화 작가들과 작업이 상당 부분 오가와 감독의 스타일과 주제의식의 가장 아래 위치했다. 즉 한일 독립다큐멘터리 분야는 ‘오가와 신스케’라는 공통분모를 떼어놓고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빚을 진 셈이다.

감독의 작품 중에 나리타공항 건설 반대투쟁에 참여해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총 7편이 선보인 <산리즈카> 연대기의 영향력은 실로 거대하다. 일방적인 공권력의 강제토지수용과 행정대집행, 경찰기동대의 탄압에 맞선 현지 농민과 연대단위들의 (2022년 현재도 명맥을 잇고 있는!) 투쟁을 지근거리에서 기록한 이 장대한 연작은 21세기 한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강제 개발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 기록영화와 놀라울 만큼 닮은꼴이다. 즉 밀양과 소성리 등 수많은 투쟁 현장을 기록한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들의 선조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작업이다. 그만큼 현재의 창작자들이 이 기념비적 연대기 시리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국경을 초월해 인접한 국가들의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각의 동일함이 핵심에 자리하기 때문일 테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영화 스틸 이미지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영화 스틸 이미지

 

2_ 연대기의 시작,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과의 재회

이번 오가와 신스케 기획전에서 상영되는 9편의 영화를 몽땅 다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영화제에 참여했다. 9월 24일 토요일 오후, 9편 중 처음이자 <산리즈카> 연대기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 작품이기도 한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몇 차례 드문드문 <산리즈카> 연작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전편을 다시 만나는 건 처음이다. 그런 두근거림 속에 마중물인 본 작품을 출발선으로 삼았다.

이 기록영화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BBC의 촬영 기술과 특수효과의 극한을 추구하는 선명한 요즘 다큐멘터리와 차원이 다른 과거의 산물이다. 농민과 연대투쟁 단위가 공권력에 맞서 벌이는 치열한 투쟁을 다루기에 만만찮은 진입장벽이 있다. 영상과 음향의 불일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요즘 영상물에 익숙해진 눈과 귀를 괴롭혀댔다. 그 당시엔 지금처럼 휴대전화나 미러리스 카메라 녹화 버튼만 누르면 소리와 영상이 자동으로 통합되어 기록되는 시절이 아니다. 덩치가 산만한 필름 카메라는 오직 시각적인 부분만 담을 수 있었고, 소리는 큼직한 녹음기로 따와서 별도로 작업실에서 통합시켜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아무리 공을 들이더라도 열악한 독립영화 제작 과정에서 딱딱 맞아떨어지는 ‘칼 싱크’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영화에 담긴 내용이나 주제와 별개로 현대 문명의 기술발전 속도를 돌아볼 계기도 되는 셈이다.

영화는 이후 진행될 다른 6편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공권력 집행에 맞서는 농민들의 투쟁을 주요 국면별로 기록한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 순으로 쭉 나열해 주요 투쟁을 뉴스 보여주듯 소개하는 방식은 아니다. 주요 국면별로 영화가 제작되지만 시기별·상황별로 연출 스타일에도 변주가 이뤄지는 건 물론, 사건별로 투쟁하는 주민과 연대단위 당사자들의 반응과 의견을 바로 옆에서 일일이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려 시도한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과 촬영 팀은 농민들의 마을에 이주하다시피 옮겨와 함께 모내기를 하는 등 신뢰를 쌓았다. 감독의 전작인 1967년 <압살의 숲> 제작 과정에서 맺은 학생운동권과의 교류는 일종의 신원보증 역할을 해주었다. 그 덕분에 인터뷰 대상자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카메라는 놀라울 정도로 대상에 근접해 있다. 클로즈업된 투쟁 대오 개개인의 표정과 목소리가 관객 개개인과 직접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영화 스틸 이미지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영화 스틸 이미지

 

3_ 나리타공항 건설 저지 투쟁의 출발선

1960년대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망을 딛고 바로 옆에서 일어난 한국전쟁 덕분에 급속도로 재건되어 고도성장기에 이르렀다. 일본 최대의 밀집 권역인 도쿄 일대의 항공물류수요를 기존의 하네다 공항만으로 소화하는데 포화상태에 이르자 일본 정부는 제2공항 건설을 추진한다. 문제는 1순위 대상지역의 주민 반발이 거세지자 이를 포기하고 2순위로 산리즈카 지역을 타깃으로 삼은 이후부터다.

일본 정부가 2순위 지역을 공항부지로 결정한 것은 그들이 힘이 없고 목소리를 내기 힘들 것이라는 오만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일단 이 지역에는 일본 황실 소유의 목장부지가 넒게 차지하고 있어 토지 수용이 반절은 해결된 셈이라 판단했고, 주민 상당수가 ‘히키아게샤’라 불리는 최하층이었다는 게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히키아게샤’는 과거 일본제국 시절, 가난한 농민들을 식민지배의 도구로 강제이주했던 이들이 일본 패망 이후 만주와 중국, 조선 등에서 가진 걸 대부분 잃고 귀국한 존재들이다. 그들이 자급자족 겸 전후 식량난에 시달리던 일본에서 공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던 후예가 산리즈카 인근 주민들의 다수를 점유했다. 거기에다 당시만 해도 미군정 체제하에 놓여 있던 오키나와 출신들도 적지 않은 숫자였다고 한다. 눈치 볼 것 없이 밀어붙이면 된다는 일본정부의 오판은 이렇게 힘없는 이들을 무시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부는 주민들의 토지수용 동의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측량과 토지 접수를 추진한다. 이에 맞서 1966년 8월부터 지역 농민들이 공항반대동맹을 결성하고 당시 일본학생운동의 대표 조직이던 전국학생연맹(이하 ‘전학련’)이 결합하면서 투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1968년 1월, 오가와 감독과 동료들이 산리즈카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투쟁하는 340가구 농민들은 그야말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공권력에 대한 분노와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평생 겪어온 국가권력에 의한 이용과 희생의 정서가 깊숙하게 체화한 때문일 것이다. 무일푼으로 해외에서 일군 모든 걸 다 잃은 채 빈손으로 돌아와 빈한하지만 어떻게든 뿌리내리고 살 새로운 고향을 건설했던 ‘히키아게샤’들의 결속력과 투쟁력은 가공한 수준으로 폭발한다.

물론 마을 주민 중 상당수가 투쟁 대오 참가 대신 정부에 대해 관망이나 협조를 택한다. 제작진은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주민들과도 인터뷰를 기록했지만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영화 내내 반대 동맹 참가자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다큐멘터리가 흔히 내용의 객관성을 인정받기 위해 활용하는 참고 자료, 신문이나 TV의 관련 기사 인용도 일절 없다. 대신에 영화 속에서 투쟁 대오는 압도적인 경찰기동대의 폭력에 맞서 스스로 지키고 맞서기 위해 ‘무장투쟁’에 나선다. 영화의 적지 않은 분량이 무장투쟁 관련 각 개인의 격렬한 논리 싸움으로 조명된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영화 스틸 이미지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영화 스틸 이미지

 

4_ 첫 번째 작품 이후의 투쟁 진행

공권력과 반대동맹의 충돌이 점점 격화되면서 인명피해는 늘어만 간다. 주로 경찰기동대의 강제진압에 시달려왔던 반대동맹은 자위용 무장으로 짱돌과 쇠파이프 등을 장비하고 국면 전환을 위해 점거 투쟁을 수시로 도모한다. 그 과정에서 1971년 9월 16일에, 도호 십자로 사건이 발생한다. 격렬한 충돌 과정에서 경찰기동대가 시위대의 공격으로 경찰관 3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터진 것이다. 공권력의 발동으로 해당 사건은 100여 명의 체포자를 내고 이중 57명이 기소된다. 도의적 책임과 투쟁 상황에 대한 절망을 겪던 헤타 마을의 청년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경찰 희생자가 생기자 가난한 농민들의 투쟁에 온정적이던 사회 분위기는 갈수록 첨예해지고 만다.

그런 가운데 1974년이 되자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6년여간의 산리즈카 생활을 청산하고 야마가타현 가미노야마시 마기노 마을로 옮기게 된다. 감독은 자신이 써 내려간 저작에서도 왜 산리즈카를 떠나게 되었는지 명쾌히 설명한 바는 없다. 하지만 3년 후 산리즈카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연작의 대미를 차지하는 <산리즈카 : 오월의 하늘>로 마침표를 찍는다. 하지만 반대 동맹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원래 예정했던 나리타공항 3개의 활주로 중 딱 1개만 완성되었을 뿐인데도 시일에 쫓긴 정부는 정상적인 공항 기능을 수행하기 힘든 나리타공항을 1978년 5월에 오픈한다. 무려 11년이 걸려버린 데다, 엄청난 사회적 피해를 초래한 데 비해선 너무나 초라한 실정이다. 그에 대해 반대 동맹은 관제탑 점거 시도나 수제 박격포 공격 등을 이어나간다. 특히 항공기 진출입을 방해하기 위한 철탑 건설 투쟁이 돋보인다. 하지만 투쟁에 지친 농민들이 농사지을 토지를 구해 이탈하거나, 자신들의 실책을 평가한 정부가 보다 온건한 방식의 대화로 전환하자 당시 무라야마 총리의 주민들에 대한 정부 차원 사과와 더불어 1994년 이후 2번째 활주로가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반대 연맹은 80년대 정부와의 대화 진행 이후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1994년, 무라야마 총리대신의 공식 사과를 받고 온건파는 해산하고 만다.

하지만 강경파는 여전히 소수이나마 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 때문에 공항경비대는 늘 비상대기 상태이고 1년에 한두 번 소수지만 여전히 건재한 반대 동맹의 투쟁이 미디어에 보도되곤 한다. 반세기가 넘게 지나 자손이 토지를 팔고 떠나는 경우도 왕왕 생기지만, 여전히 공항부지 내에서 농사를 짓거나 거주를 유지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근래에는 공항 내/외 일대에서 투쟁을 알리고 재정 사업도 할 겸 숙박시설을 운영하며 작은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5_ 제작 현장 상황과 촬영 전후 숱한 비화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은 공권력과 주민들의 격렬한 대치와 투쟁을 화면 가득 선보인 뒤, 농민들 투쟁의 핵심인 산리즈카의 공항예정부지인 지대를 (저예산으로는 구하기 빠듯했을 게 뻔한) 헬리콥터 활용 부감 장면으로 찬찬히 관객들을 유인한다. 나리타공항 활주로와 부대시설로 뒤덮인 현재 대신 농민들의 분신이라 할 아름다운 풍광과 피땀이 배인 논밭을 찬찬히 돌아보게 해준다. 그런 장대한 풍경화는 이후 거듭 되풀이될 투쟁과 대응을 마치 전령이 도착해 소식을 전해주는 것처럼 묘사된다.

오가와 감독과 제작진은 농민들과 같이 기거하고 행동하며 때로는 공권력에 의해 폭행당하거나 체포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는 메인 카메라맨이던 오츠 고시로가 기동대에 체포되는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덩치가 크고 리더 격인 오가와 감독은 경찰의 표적이라 촬영 현장에 자주 나오지 못했다고 할 정도다. 그런 극악한 상황이다 보니 영화를 보는 이들까지 마치 반대 동맹 소속 투쟁공동체 일원인 것처럼 긴장감이 유지된다. 철저하게 공권력은 무시되고 공격당한다. 시위대뿐만 아니라 감독과 카메라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일방적인 편향에 의문을 품거나 불편해할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독은 특유의 ‘가담의 논리’를 통해 기계적 중립이나 방조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막대 구부리기’적 태도는 한국의 독립다큐멘터리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마기노 마을로 이주한 뒤 <마기노 마을의 전설>이라는 대작을 선보이며 민속생활사에 관심을 기울인다. 마기노 마을 옆 동네인 야마가타의 의뢰로 아시아 최초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1989년 출범시키기도 한다. 오가와 감독이 이후 지병인 암으로 별세하자 야마가타영화제는 아시아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 ‘오가와 신스케 상’을 수여한다. (<낮은 목소리>로 변영주 감독 등이 수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촬영감독을 맡다 체포되기도 했던 오츠 코시로는 말년에 산리즈카 동네에 돌아와 투쟁을 계속하거나 해당 지역을 떠나지 않은 이들을 취재한 후, 2014년에 <산리즈카에 살다>라는 회고적 기록영화를 선보인다. 그만큼 오가와 신스케 감독과 제작진들이 투쟁에 참여한 기억이 그들 각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을 비롯한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작품 9편은 10월 2일 일요일 24:00까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운영하는 온라인 다큐멘터리 플랫폼 <보다VoDA>에서 (유료 결제 후) 관람할 수 있다.

 

 


작품 정보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Summer in Narita

1968, 일본, 다큐멘터리, 105분

 

감독 오가와 신스케

제작 후세야 히로오, 이치야마 타카츠구, 코바야시 히데코

촬영 타무라 마사키, 오츠 코시로

음악 하야시 히카루

편집 세키자와 다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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