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치의 타락을 이끈 두 명의 거물 정치인 이야기

 

“그때 그들”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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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 정치인의 죽음으로 돌아보는 현대 이탈리아 정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1936-2023)가 지난 6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21세기 이탈리아 정치의 한 축을 넘어 상징하는 존재였던 이 50대 총리는 정권교체가 일상다반사인 이탈리아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에서 최장수 총리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다. 3회에 걸쳐 10년을 집권했고, 죽기 전까지도 현 이탈리아 집권여당 연합의 한 축인 ‘전진 이탈리아’ 정당 대표로 권력의 중심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다. 21세기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절반은 여당으로, 절반은 유력야당 당수로 그의 존재감은 거대하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 이어 4번째라는 부동의 위상으로 ‘G7’의 당당한 일원이기도 한 이탈리아는 (국내 언론의 자국 띄워주기가 가미되긴 했지만) 21세기 이후 거듭된 정체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다. 어느새 한국과 ‘선진국’ 문턱에서 각축을 벌일 정도로 자존심을 구긴 데다 뿌리 깊은 부정부패와 높은 실업률로 인해 한때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던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로 분류될 지경이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 위상이 벼랑으로 추락할 갈림길에 섰지만 뚜렷한 혁신 시도가 통 보이지 않는 21세기 이탈리아의 권좌를 누렸기에 실질적으로 이탈리아를 망친 정치가로 첫 손에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도 늘 불사조처럼 부활해 제대로 이탈리아 정치와 사회를 망치는 데 톡톡히 한몫을 도맡은 그의 매력 비결은 대체 무엇일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등장과 전성기, 그리고 재기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탈리아 현대 정치역사에 대해 약간의 소양이 필수다. 이탈리아는 19세기 말에 독일과 함께 뒤늦게 통일을 이뤄 서구열강 반열에 늦게 합류하는 바람에 ‘2류 열강’ 취급을 받았고, 열등감을 떨치기 위해 양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1차 대전에선 승전국임에도 푸대접을, 그 결과로 인한 국내 혼란 때문에 무솔리니의 파시즘 집권, 2차 대전에선 편을 바꿨다 패전하는 바람에 전범국으로 몰락하고 만다. 전후 이탈리아 정치는 국내의 수습되지 않은 혼란과 냉전 시기 유럽의 앞마당인 지중해의 중심축으로 동서 대결의 한복판이라는 외적 조건 사이에 처한다.

그런 구조적 상황을 이용해 장기 집권한 정치인 2명이 오늘날의 이탈리아 정치사회적 난맥상을 상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1대 총리 줄리오 안드레오티와 50대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바로 그 거물 정치인이다. 현대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중 한 명인 파울로 소렌티노가 그 둘을 다룬 정치 드라마를 공들여 선보인 덕분에 안방에서 편하게 이탈리아 정치의 어두운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

 

“일 디보”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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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디보>

 

무솔리니의 빈자리를 차지한 냉전 시기 보수정당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패전국이 된 이탈리아 정치는 완전히 뒤집혀 요동친다. 20여 년 넘게 집권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몰락하고 국민투표결과 왕정이 폐지되었다. 전범국이다 보니 연합국의 간섭도 강했다. 패전 후 파시스트들이 숨을 죽인 채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전국을 아우를 수 있는 정치세력은 두 부류였다.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를 끌어내리고 연합국에 가담한 가톨릭+왕당파+보수우파 세력 vs 레지스탕스로 치열하게 파시즘과 싸웠던 공산당 세력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을 가진 공산당 계열 정당이기도 했다.

이제 유럽을 가로지르는 냉전 틈바구니에 처한 이탈리아는 특히 소련이 지중해로 뚫고 나오지 못하도록 책임져야 할 남유럽의 핵심축이었다. 좁은 아드리아해 바다를 건너면 바르샤바 조약국 천지인 발칸반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은 어떻게든 이탈리아에서 반공세력이 집권하길 희망했다. 그 결과가 가톨릭 중심의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의 탄생이었다. 이로부터 반세기 동안 기독교민주당의 장기집권과 만년 야당 이탈리아 공산당의 시대가 시작된다. 마치 일본에서 전후 자유민주당(자민당) 일당독재와 제1야당 사회당의 동거가 이어진 것과 흡사한 구조다.

하지만 기독교민주당은 단일정당이라기보다는 급조된 성격이 강했다. 선거에서 공산당이 치고 나오면 재빨리 집권연합을 구성해 다른 소수정당들을 끌어들였다. 당시 유럽에선 보기 드문 ‘빅 텐트’ 정당, 혹은 정당연합에 가까운 모델인 셈이다. 그런 정치공학적 노력 덕분에 이들은 연정까지 포함 냉전이 끝나는 1990년대 초반까지 반세기 가깝게 장기 집권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의 섬나라를 떠올릴 테다. 놀라울 정도로 이탈리아와 일본, 두 나라의 현대 정치사는 닮은꼴이다.

기독교민주당은 빅 텐트 정당으로 장기집권하다 보니 만년야당과의 관계보다 당내 계파 간 권력투쟁이 사실상의 경쟁 시스템으로 작동하며 근 반세기를 보냈다. 이 당 안에는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기묘한 동거상태를 이어갔다. 의원내각제이다 보니 당내경쟁에서 승리한 계파의 보스가 정부 수반인 총리가 되는 구조에서 몇 명의 거물 정치인이 수십 년 넘도록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전형적인 보스정치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요원하다 보니 계파경쟁이 치열해지고 이해관계자들과의 담합으로 표와 자금 지원이 대가 용도로 통용되었다. 기독교민주당 핵심들은 그렇게 기업과 가톨릭교회, 마피아들과 유착하는 거대한 커넥션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일 디보”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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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남자’,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시대

마피아의 정전 격이라 할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는 3부작으로 완결된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된 3편에서 마이클 콜레오네의 평생 숙원이던 합법기업화를 가로막는 이탈리아의 권력자로 ‘돈 루체시’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정치인이지만 재계와 마피아를 아우른 거대한 흑막의 구심으로 실제 발생한 사건인 바티칸 은행 거대 금융 스캔들의 주역이기도 하다. 그런 루체시와 콜레오네 패밀리에게 복수하려는 마피아 세력들과의 항쟁이 대부 3편의 핵심 줄거리가 된다. 이미 미국 최강의 마피아 조직인 콜레오네 패밀리에 도전할 정도라면 그 권력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쉽지 않을 정도다. 그런 루체시의 실제 모델이 7번 총리, 25번 장관직을 역임한 거물 ‘줄리오 안드레오티’다. ‘신이 내린 남자’란 거창한 뜻을 지닌 <일 디보>는 바로 그런 거물의 역정을 다룬 정치드라마다.

영화는 일반적인 전기영화처럼 연대기적 서술을 취하지는 않는다. 현대 이탈리아인이라면 그의 행적을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늘어지기 쉬운 인생사 설명을 과감히 삭제하는 대신에 영화는 그가 관련된 여러 의혹사건과 정치적 국면을 교차해가며 현대 이탈리아 정치의 거대한 아이콘으로서 줄리오 안드레오티라는 존재를 상징화하는 데 도전한다. 파울로 소렌티노 감독의 페르소나 격인 배우 토니 세르빌로의 명연기가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뿜어내는 바람에 희대의 부정부패 정치인의 몰락을 기대하는 이들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한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이 얼마나 악당인지 낱낱이 파헤쳐 정의의 응징을 받기를 기대하던 이들에게 제작진은 전후 이탈리아 정치사가 환멸과 냉소로 기울어지게 된 배경 및 그 이면을 장대한 역사화를 방불케 그려내는 데 힘쓴다. 그렇게 입체화된 노력 덕분에 현대 이탈리아 역사에 논쟁적 인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주인공은 그저 부정부패의 수괴가 아니라 복잡한 단면을 지닌 캐릭터로 형상화된다.

영화는 이것저것 다양한 실제 사건과 정보를 공개하지만 요즘 상업영화처럼 친절하게 요약해주는 방식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서 정작 관객이 해설을 열람하고 단정적으로 주인공을 단죄할 구체적 증거는 보여주지 않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관객은 거의 완벽하게 재연된 줄리오 안드레오티에 대한 판단을 각자의 숙제로 떠안게 된다. 물론 그를 둘러싼 수많은 ‘우연’의 일치, 또는 ‘신의 뜻’으로 일어난 무수한 죽음과 의혹이 낱낱이 소개되기에 영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거물 정치인의 침묵과 미묘한 손동작은 더욱 기괴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일 디보”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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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의 위협 속에서 자기 보신으로 치달은 의회정치

21세기 한국의 관객이 이 영화 속 주인공의 행보를 독자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20세기 후반 반세기 동안의 이탈리아 정치사를 기본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안드레오티가 정계의 거물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기는 1969~1984년, 소위 ‘납의 시대’와 거의 동일하게 들어맞는다. ‘68혁명’이라 불릴 만큼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정치-문화 혁명의 와중에 파시즘을 제대로 청산하는 데 실패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기성세대가 파시즘에 동조하거나 방관했던 것을 기억하는 청년세대는 존경보다는 전복적 태도를 취하는 게 당연하게 사고 되었으며 청산되지 못한 극우세력 역시 격동기에 활개를 펼치기 시작한다.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정당 간의 경쟁보다는 직접 참여가 선호되었고, 답답한 현실은 좌우 양극단의 급진세력을 양산했다.

여기까지라면 시대 상황상 자연스러운 귀결일 테지만, 이탈리아의 혼란은 더 심각했다. 극우와 극좌세력 급진파는 정치적 입장은 전혀 다르지만,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점에선 유사했다. 이들은 테러를 일삼으며 서로 경쟁하듯 수위를 올린다. 사회 전체에 공포와 불안이 횡행하기에 이른다. 극우파의 백색 테러도 만만찮았지만 ‘붉은 여단’이라 불리는 좌익 무장투쟁조직은 일본의 ‘적군파’, 서독의 ‘바더 마인호프 그룹’과 함께 악명을 전 세계적으로 떨쳤다. 그 희생자 중엔 안드레오티의 당내 최대 라이벌이자 중도좌파 그룹의 대표로 역시 7번 총리를 역임한 알도 모로도 있었다.

<일 디보>는 그런 혼란의 시기에 안드레오티가 배후에 있거나 연루된 것으로 의심을 사던 사건들을 꼼꼼하게 삽입한다. 범인을 알 수 없는 암살과 테러가 횡행하는 가운데 극단주의 세력의 위협을 두려워한 이들은 안정을 희구하게 된다. 그런 여론을 발판 삼아 ‘차악’으로 기존 집권세력의 장기 권력 유지가 가능했다. 숱한 위기와 함께 여러 의혹에 발을 걸친 혐의가 종종 드러나지만, 그런 위기를 거치면서도 권력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과 그의 계파 핵심인사들을 영화는 거대한 이권 카르텔로 구축해낸다. 이들이 밀실에서 논의하는 권력 유지 방안과 치밀한 정치공작 풍경을 보고 있자면 소름이 돋고 혐오스러운 감정이 몰아친다.

하지만 정치모리배의 전성기는 그들이 묵인하고 방조했으며 심지어 비밀결사를 구성해 야합했다는 혐의가 상당 부분 인정된 마피아 재판 과정을 통해 몰락으로 치닫기에 이른다. 1980년대 후반 마피아들은 자체 패권분쟁 과정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를 쌓았고 이를 수사하던 공권력에 도전해 판사와 국가헌병대 장성을 암살하는 등 막 나가는 바람에 국민적 공분을 산다. 마피아 내부 고발로 범죄조직과 기업-정치인 간의 방대한 커넥션이 밝혀지고, 1,000명의 정·재계 관계자가 구속되기에 이른다. “마니 풀리테(하얀 손)” 운동이다. 이런 거대한 부패 스캔들의 결과로 집권당이던 기독교민주당이 해산, 즉 공중 분해되는 지경에 이른다. 줄리오 안드레오티 또한 인생의 말년을 재판으로 보내지만 끝내 공식적인 단죄는 이뤄지지 않았다. 안드레오티는 마피아의 ‘침묵서약’처럼 일평생 자신의 오래된 비서만 캐치가 가능한 손동작이 의사표시 수단일 정도로 보안을 지킨 덕분에 교묘하게 유죄구속은 면하지만, 정치생명은 끝나고 만다.

 

신자유주의 언론재벌이 냉전보수의 빈자리를 메우다

안드레오티와 그로 상징되던 기독교민주당이 사라진 자리엔 ‘하얀 손 운동’에 동참했던 시민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들어앉는다. 정치혐오와 경제위기 속에서 성공한 기업가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기독교민주당의 자리를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당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가 붕괴한 자리를 기업가와 관료들이 차지하기에 이른다.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실종과 이익집단 로비의 정치판이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역시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다. 일본이 그 닮은꼴로 현재까지 ‘갈라파고스’처럼 연속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어느새 점점 닮아가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전성시대와 동시에 찾아온 이탈리아 현대 민주주의의 부침은 주목받아 마땅한 사례로 자리를 얻는다. 이탈리아 국내용 노회한 보수정치인의 존재감은 전혀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를 포괄하는 ‘세계의 밝은 부분’, 속칭 1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베를루스코니는 언급될 만한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치는 존재다.

 

“그때 그들”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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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들>

 

모두가 미워하는 자의 권력 장악

감독 파울로 소렌티노는 본 작품으로부터 약 10년 전, 2차 대전 전후 이탈리아 정치의 거물 줄리오 안드레오티를 다룬 <일 디보>를 ‘목숨 내놓고’ 세상에 선보였다. 그 안드레오티가 소속된 정당 기독교민주당이 1992년, 전 이탈리아를 뒤흔든 ‘마니 풀리테’ 운동으로 붕괴하자 이제 이탈리아 정치에 혁신과 정화가 이뤄져 새판이 짜일 것이란 기대감이 당연히 생겼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민주당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언론재벌 출신 정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베를루스코니는 3번에 걸쳐 총리로 선출되며 근 10년이라는, 현대 이탈리아 최장기 집권자로 우뚝 선다. 많은 이들이 그를 혐오했고, 특히 당대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자국의 수치이자 환멸 그 자체로 베를루스코니를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도 그런 묘사가 즐비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정당 민주주의가 무너진 폐허에서 그가 대표하는 정치세력은 근 30년 동안 이탈리아 정치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죽기 전까지 유력정당 ‘전진 이탈리아’의 맹주이자 보수우파 진영의 거물로 자리매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기독교민주당과 선거연합을 이룬 다른 기성정당은 이탈리아의 특수한 정치지형 속에서 점차 기득권 이익집단으로 타락하고 있었다. 어느 세력이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지역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선거결과는 대개 2% 내 싸움이 되었다. 의원내각제 하에서 이권을 노린 막후협상과 야합이 횡행했고, 국민들은 정치혐오에 빠졌다. 그 빈자리를 유능한 기업가와 행정 관료들이 차지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시대는 그런 배경 속에서 장기적으로 고착되었다.

 

“그때 그들” 포스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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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욕망으로 대중을 유혹하던 정치가의 진면목

영화는 그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특정 시간대, 2010년 전후, 3기 집권 직전의 시간을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고 극화한다. 하지만 치밀한 정치사회 스릴러의 형태는 아니다. 전작 <일 디보>와 맥을 같이 하면서 이 현대 이탈리아 정치의 거물과 주변 가십이라는 넘쳐나는 소재를 적절히 가공해 고도로 상징화된 블랙 코미디를 선보인다. 실제 인물이 숨 쉬듯 온갖 망언과 스캔들을 쏟아내는 존재다 보니 소재가 부족할 리 없다. 그래서 초반에는 현란하고 선정적인 화면이 난무하는 당황스러운 순간도 곧잘 일어나지만, 차분히 보고 있자면 감독의 의도가 서서히 확인되는 구성방식이다.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명예훼손 소송 숱하게 당했을 테니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감독은 원래부터 직설적인 정치 고발 드라마를 만들 생각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장대한 대하드라마 급 분량이다. 그 덕분에 파트 1과 2로 나뉘어 완성되었지만, 너무 방대한 분량 탓에 국내 개봉 당시엔 1개의 편집된 판본으로 공개되었다. (원래 1·2부 버전은 온라인 스트리밍과 VOD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 디보>의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냉전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적 환경을 개인의 존재감으로 압축 표현한다면, <그때 그들>에서 동일한 배우에 의해 구현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냉전이 종식된 후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이탈리아 정치가 어떻게 망가져 버린 채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표상하는 존재다. 마치 마르크스의 저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무수히 인용되는 문구,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은 비극,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 서술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 디보> 속 줄리오 안드레오티 캐릭터는 당대 냉전이라는 시대의 어두운 면을 침묵으로 봉인하는 질서악의 주축이다. 그는 수시로 고해성사를 치르고, 마피아와 결탁한 숱한 범죄와 연관되지만, 개인적인 치부나 욕망보다는 부도덕한 체제의 수호자처럼 시종일관 고독한 존재로 묘사된다. 반면에 <그때 그들>에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욕망이 지배하는 혼돈, 악의 구심처럼 묘사된다. 성공한 권력자의 위용을 과시하면 할수록 대중은 그런 베를루스코니가 자신들도 행복하게 해줄 메시아란 착시에 빠진다. 그런 두 주역의 존재감 차이가 각 영화의 톤, 나아가 해당 시대를 규정하는 셈이다.

 

“그때 그들”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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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리그에서 정점에 오른 권력자의 일상

영화 초반엔 현재 권력의 정점에선 물러났지만, 여전히 유력 야당의 대표이자 경제 권력과 언론 권력을 거머쥔 베를루스코니에게 접근하려는 젊은 야심가 세르조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세르조가 전 총리에게 접근하려는 도전이 꾸준히 진전된다. 세르조는 물론 (정직한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벼락출세와 일확천금을 노리며 욕망을 좇는다. 차근차근 자기 분야에서 기반을 쌓고 노력해 성과를 축적하는 대신에 권력의 핵심부에 근접해야만 기회가 온다는 일그러진 세태가 눈부신 쾌락의 이미지와 버무려져 화면을 가득 메운다. 상대적으로 이탈리아 사회에서 변방인 남부 해안 도시 타란토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세르조는 시골을 떠나 부와 권력의 심장인 로마로 뜨고 싶다. 그래서 거액을 들여 유명인사들을 초대하고 쾌락을 제공하는 파티를 통해 연줄을 얻으려 애쓴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이탈리아 사회에서 이런 접대와 향응의 대가는 공공계약이나 이권 제공이다. 마피아가 특별하다기보단 국가 전체가 마피아적 담합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그런 전개 때문에 (확장 버전 경우엔 3시간 30분에 달하는 전체 분량 중에서) 주역인 베를루스코니는 1시간 이상 지난 뒤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캐릭터의 존재감은 삽시간에 증발하듯 사라져버린다. 진정한 주인공이 출현한 이후로 모든 화면의 중심엔 그가 우뚝 서 있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군림하는 베를루스코니의 캐릭터는 극도로 상징화된 표현인 셈이다. 베를루스코니가 3차 집권을 위해 온갖 정치적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그가 머무는 사르데냐섬 별장 옆에서 세르조는 전 총리의 애인인 키라의 주선으로 쾌락의 정원과도 같은 파티를 벌인다. 조강지처 베로니카와 관계가 경색되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베를루스코니는 기꺼이 파티에 등장하고 세르조에게 접대의 기회를 준다. 그런 거대한 기회에 세르조는 흥분하고 전방위적으로 로비를 펼치게 된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에게 그는 그저 일회용의 거간꾼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베를루스코니는 쾌락을 즐기면서도 권력을 획득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성공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사랑받고 칭송을 얻고자 한 노회한 정치인도 모든 것을 이룰 순 없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관계 때문에 베를루스코니를 찬양하지만 2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온 베로니카는 남편의 위선과 욕망에 진저리를 내며 결별을 선언한다. 앞에선 충성서약을 하지만 측근들 역시 그의 뒤에서 음모를 꾸미느라 바쁘다. 물론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주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통달한지라 대부분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성공하지만, 그도 이제 뭐든 다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의 선배인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끝내 실패한 것처럼 국가원수인 대통령 도전에는 끝내 닿지 못한다. 고진감래 끝에 총리로 선출되면서 부풀었던 70대 노인의 욕망은 본인 집권기에 터진 대지진과 외교적 해프닝 등으로 벼랑에 놓이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베를루스코니가 쌓아 올린 현대 이탈리아의 파산을 극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그때 그들”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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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정치영화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엿보다

<그때 그들>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는 이탈리아 현대정치의 어두운 아이콘이 어떤 경로로 권력에 접근하게 되었는지, 언론재벌인 그가 현대판 우민화 정책을 자신이 가진 재력과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구현하게 되는 과정을 해부한다.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양과 같은 가축들은 마치 좀비영화 속 좀비들이 매스미디어와 체제 선동에 길들여진 대중의 은유인 것처럼 활용된다. 70대 노인인데도 과장된 미소와 공들인 패션으로 매력을 발산하는 베를루스코니는 정치의 품격이 아니라 대중에게 일시적으로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데 탁월함을 발휘한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포퓰리즘 정치인의 대선배 격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선전과 유혹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동물적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뚜렷한 사상이나 정견은 갖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의 정치는 그저 이권 분배와 구조적 문제에서 관심 떨어뜨리기라는 변칙적 수법에 불과할 뿐, 사회발전을 위한 어떤 대안도 진지하게 내놓지 못한다. 3기 집권 시기에 벌어진 대규모 지진에도 말치레 외에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실의에 빠진 권력자의 뒷모습을 영화는 지독한 블랙코미디로 구현해낸다. 모두가 욕하기 딱 좋은 대상인 악의 총수가 아니라 다양한 면모를 가졌지만 결국 실패로 모두를 이끌고 자신만 살아남는 존재를 영화는 소름이 돋도록 재현한다.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파울로 소렌티노 감독과 빙의 수준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토니 세르빌로의 위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렇게 공들여 완성된 영화의 작심하고 쏟아낸 정치사회 풍자극은 바다 건너 한국의 현재 정치판에도 묵직하게 참고할 쟁점을 숱하게 던지고 있다. 정당정치가 오직 표와 집권에만 몰두한 채 정체성과 초심을 잃어갈 때 대중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불신하게 되고, 그 결과 정치의 힘이 소멸한 자리에 거대한 기득권 담합이 둥지를 틀어버리는 끔찍한 상황은 이탈리아만의 모습은 아닐 테다.

 

 


작품 정보

 

일 디보 The Deity, Il Divo

2008, 이탈리아ㆍ프랑스, 드라마

국내 미개봉, 110분, 15세 관람가

감독 파울로 소렌티노

주연 _ 토니 세르빌로(줄리오 안드레오티 역), 안나 보나이우토(리비아 다네세 역)

출연 _ 줄리오 보세티(유제니오 스칼파리 역), 플라비오 부치(프랑코 에반젤리스티 역), 카를로 부치로쏘(파올로 시리노 포미시노 역), 조르지오 콜란젤리(살보 리마 역), 알베르토 크라초(돈 마리오 역), 피에라 데글리 에스포스티(에네아 역), 로렌조 지오엘리(미노 페코렐리 역), 파올로 그라지오시(알도 모로 역), 지안펠리스 임파라토(빈센조 스코티 역), 마시모 포포리지오(비토리오 스바르델라 역), 알도 랄리(쥬세페 시아라피코 역), 지오반니 베토라조(마지스트라토 스카르피나토 역), 아킬레 브루그니니

2008 칸영화제 기술상(벌칸상), 심사위원상

2009 유럽영화상 유러피안 남우주연상(토니 세르빌로)

2009 다비드 디 도나텔로 어워드 분장상(비토리오 소다노), 시각효과상(니콜라 스잔자, 로돌포 미글리아리), 남우주연상(토니 세르빌로), 여우조연상(피에라 데글리 에스포스티), 촬영상(루카 비자찌), 음악상(테호 티아르도), 헤어상(알도 시그노레티)

 

그때 그들 Them, Loro

2018, 이탈리아ㆍ프랑스, 코미디

2019.03.07 개봉, 157분, 청소년관람불가

감독 파울로 소렌티노

주연 _ 토니 세르빌로(실비오 역), 리카르도 스카마르시오(세르지오 역), 엘레나 소피아 리치(베로니카 역)

출연 _ 카시아 스무트니아크(키라 역), 유리다이스 악센(타마라 역), 파브리지오 벤티보글리오(산티노 역), 로베르토 드 프란체스코(파브리지오 역), 다리오 칸타렐리(파올로 역), 안나 보나이우토(쿠파 역), 마티아 스브라지아(마리마노 역), 리키 맴피스(스테파노 역)

수입ㆍ배급 _ 영화사 진진

2019 다비드 디 도나텔로 어워드 여우주연상(엘레나 소피아 리치), 헤어상(알도 시그노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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