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보호하는 것과 인권을 옹호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 마당을 드나드는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줄 사료와 물을 준비해둔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얌전히 깨끗하게 삭삭 비우고 가는데 다른 날에는 온 사방에 사료가 흩뿌려지다시피 하곤 했다. 미관상 좋지도 않고 덥고 습한 날엔 사료가 상하기에 십상이니 신경이 은근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범인이 대체 누군지 잡히기만 해라 벼르게 되었다.

범인은 얼마 후 밝혀졌다. 전선에 잔뜩 앉아 있던 동네 새떼였다. 참새는 아예 그릇에 퍼질러 앉아 먹었고 좀 더 덩치가 큰 비둘기나 까치, 까마귀들이 드물지 않게 출몰했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큰 새들이 부리를 흔들면 사료가 주변에 씨 뿌리듯 흩어졌다. 그때마다 투덜거리며 새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솝 우화에 나오는 황새와 여우의 일화처럼 사료로라도 배를 채워야겠고 부리로 쪼아서 먹기엔 불편한 새들이 억울한 측면도 있다. 물론 새 모이로 준비한 건 아니라는 항변을 할 순 있겠지만 새들이 알아먹을 리도 없다.

 

“수라” 스틸 이미지
“수라” 스틸 이미지

사실 길고양이들은 심심풀이 혹은 추울 때 먹을 게 궁하면 새들을 공격하곤 했다. 예전에 키우던 개들의 경우 사냥 훈련 삼아 새들을 잡곤 했다. 현관 앞에 새의 잔해가 널려 있는 날도 가끔 있었다. 그런 개나 고양이의 잔혹함에 경악하면서도 하지 말라고만 했지 그들을 미워하진 않았는데, 역시 인간이란 종은 자신에게 친숙하고 외모지상주의로 타종을 제멋대로 함부로 진단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자기반성이다)

그런데 은근히 도시에서 어쩌다 목격하는 새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좀 무섭긴 하다. 감정표시도 개나 고양이 같은 익숙한 동물들에 비하면 뚜렷하지 않고 그 눈빛을 보고 있자면 새들이 파충류와 같은 ‘석형류’에 속한다는 동물 분류법이 수긍이 가곤 한다. 공룡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역시 조류라며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이다. 하지만 이미 도시의 생태계는 인간 위주로 형성되었고, 그들의 시골 친척들처럼 인간에 의지하지 않고 도시공간에서 인간 외의 생물군이 자급자족하며 생존하기란 불가능해져 버렸다. ‘닭둘기’라 매도당하는 도심 비둘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국가적 이벤트에서 평화의 새로 전시효과에 동원되면서 전국 도시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성화 제막 때 날아가지 않고 앉아 있던 수십수백 마리의 비둘기들이 통구이로 죽어갔지만 제대로 그 참극을 조명하거나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인간이 장악한 도시 생태계에 적응해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도 비둘기는 늘 게으르고 세균을 옮기는 숙주로 매도당해 왔다. 낯설고 인상이 썩 무표정해 친해지기 어려운 게 결정적 이유일 테다. 하지만 역으로 그들의 운명은 도시공간의 현 상태를 진단하는 바로미터 기능도 수행한다. 예전에 환경영화제에서 유럽 어느 도시의 새들을 특별한 서사나 해설 없이 그저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단편을 보면서, 그 무표정한 눈빛 속에서 새들은 과연 인간들의 도시를 어떤 생각과 시선으로 바라볼까 갑자기 궁금해지곤 했었다.

그리고 도시의 화려한 마천루 빌딩과 대형 공공건축물들이 외관을 장식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투명 외벽과 유리창이 그런 환경을 접해본 적 없는 새들에겐 재앙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알게 된 후로 뇌진탕으로 비틀거리는 새를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낯설고 거북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인간이 강제로 가로막은 장벽들 속에서 생존 투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가련한 존재들이었다.

 

<수라>, 새만금 잼버리의 이면을 고발하는 기록 작업

<작별>, <어느 날 길 위에서>, <잡식가족의 딜레마>, <광장의 닭> 등의 작업으로 한국 환경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항상 중요하게 거론되는 황윤 감독은 2022년에 지난한 숙제를 하나 끝마쳤다. 감독이 2000년대 초반부터 기록 작업에 참여하던 새만금 갯벌에 관한 이야기였다. 10여 년 동안 감독 주위에는 우여곡절이 많았고 소중하게 생각하던 주변 동료들을 거듭 잃기도 했었다. 그런 뜻하지 않은 이별은 때로는 도망치고픈 상처로, 때로는 작업을 완성해야겠다는 결의로 다가왔고, 감독은 모두가 끝난 싸움이라 생각하던 새만금 현장을 지키며 그곳의 잔존 생물군을 기록하는 시민조사단과 만나 작업을 이어가게 된다.

 

“수라” 포스터 이미지
“수라” 포스터 이미지

시민조사단은 죽어가는 갯벌에서 악착같이 생존하는 생물군 전체를 중시했지만, 특히 새만금의 지리적 특성상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드는 철새의 동향에 주목했고,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수차례 보호종으로 지정된 조류의 알이나 소리를 발견해 마지막 남은 수라 갯벌 등 잔존지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거듭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원래 계획과는 거의 모든 게 엇나가는 상황에서도 ‘지역개발’이라는 허상 아래 온갖 이해관계가 맞물린 무리한 일방적 개발은 레퍼토리만 바꿔가면서 중단되기는커녕, 갈라먹기식 부실 사업을 수십 년간 양산하며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하필 2022년 가을에 처음 공개된 <수라> 다큐멘터리는 공들인 준비 끝에 2023년 6월 하순에 개봉해 요즘 독립영화 극장 관객 스코어로는 이례적인 5만 가까운 관객을 기록했다. 여기까지만 봐도 대중적인 관심과 새만금 환경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순기능은 톡톡히 해냈다고 봐도 무방할 성과다. 하지만 개봉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사고가 터진다. 새만금 개발 여론을 부각하고 국가적 홍보 거리가 필요했던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거래가 맞아떨어져 큰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치된 세계 잼버리 대회가 국위선양 대신 나라 망신으로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하필 영화 속 배경인 땅에서 벌어진 이 기막힌 사건사고에 영화 제작진은 스카우트 대원들이 생고생을 겪은 새만금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자 시사회를 조직한다. 언론의 비상한 관심 속에 몇몇 환경문제에 관심이 높던 국가 대원들의 예약도 받지만 결국 필사적으로 다른 일정을 들이민 잼버리 수뇌부의 방해로 시사회는 온전히 치러지진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새만금 잼버리 파행이 우발적 실책이 아니라 모래로 만든 성처럼 위태로운 배경을 갖고 있다는 걸 환기하는 데엔 성과가 있었던 셈이다.

 

“수라” 스틸 이미지
“수라” 스틸 이미지

<수라>는 아름답고 슬픈 영화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알아서 잘 순환하는 지역 생태계를 이루며 유지되어온 거대한 습지대가 순식간에 죽음의 땅이 되어버리는 참극, 그런데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잃지 않고 저항하는 잔존 생물군의 생존 투쟁, 이를 깨닫고 마음으로 함께 하며 반전을 모색하는 시민들의 노력, 지독한 악의로 남은 희망마저 아무 실효성도 입증된 바 없는 허구적인 사업계획으로 신공항이다 첨단산업단지다 그저 전시행정에만 급급한 부정한 권력의 민낯이 영화 속에 어우러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목을 잡아끄는 건, 수라 갯벌을 경유하며 휴식과 끼니를 얻던 거대한 철새들의 흐름이 중단되면서 초래하게 될 거대한 재앙과 그런 비극 앞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조류들의 눈물 나는 아름다움이었다. (도시에서 음침하게 웅크리던 모습으로만 인식되던) 새가 저렇게 흥미롭고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다.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 트럼프의 장벽은 사람만 해치지 않는 법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가로지르는 리오그란데 강 주변 습지는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철새들의 쉼터로 대륙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생태적 지위를 지닌다. 알래스카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지구를 말 그대로 종단하다시피 하며 거대한 새들의 무리는 장대한 여정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들 역시 피로를 충전하기 위해 안전한 쉴 곳과 영양 보급이 절실하다. 북미와 중미를 구분하는 경계라 할 이 지역은 핵심 요충지가 아닐 수 없다.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 포스터 이미지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에서 제작해 스트리밍 서비스 중인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은 그 서식지를 관찰하고 관리하는 이들과 새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감독은 카메라에 담아낸 풍경과 말들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두 결의 묘미가 본 작품의 힘이다. 아름다운 습지대를 가로막은 흉측한 철골로 이뤄진 장벽이 영화의 시작과 함께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악명 높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을 베껴놓은 그 장벽이다. 그 꺼림칙한 이미지는 내내 뇌리에 남는다.

30여 분 남짓한 단편 기록영화의 전반부는 미국의 남단 텍사스 국경 지대에서 조류를 연구하고 관찰하는 이들과 탐조가들, 그들을 상대로 하는 가이드와 숙소 관계자들의 시간이다. 새들의 생태와 매력에 대한 찬사부터 새들이 가져다주는 과학적 사실과 경제적 혜택까지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한 단면들이 소개된다. 풍요로운 삼각주 일대에 매년 40여 개국 방문객이 찾아오기에 이들을 대상으로 숙소와 가이드 등을 제공하는 일로 지역 주민 수천 명이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난민 문제에 대한 해법이라며 강행한 멕시코 국경 분리장벽은 그렇게 자연을 보전해 인간들이 혜택을 입게 된 조화를 부정하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민감한 정치적 쟁점을 논쟁적으로 부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베테랑 탐조가 가족의 생태답사 중 아이들이 천진한 표정으로 꺼내는 말처럼 국경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남쪽 멕시코를 자유롭게 오갈 수 없게 된 아쉬움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상황의 부조리함을 자연히 강조해나간다. 미국 국경수비대의 순찰은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못할뿐더러, 새들의 신경을 거스르게 할 뿐이다. 미국으로선 텍사스의 남쪽이지만 멕시코 쪽에서 보면 베라크루즈와 타마울리파스의 북쪽이다. 이런 명칭 표기는 이 지역의 해묵은 역사적 비극을 은연중에 상기시킨다.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 포스터 이미지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 포스터 이미지

 

이번엔 멕시코 쪽 탐조 가이드와 자연보호 활동가들의 후반부 편이다. 국경 남쪽에도 시설이나 처우는 빈약하지만 자연보호 구역과 생태조사단이 활약 중이다. 철새 보호에 대한 신념과 새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북쪽이나 다를 바 없이 여전하지만, 현지 분위기는 조금 더 심각하게 조명된다. 새는 당연하게도 인간이 정한 경계와는 무관하게 국경을 오가게 마련이다. 멕시코 쪽 탐조가들 또한 양 국경을 넘나들며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고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 왔다. 분리장벽은 그런 자연스러운 노동자들의 이동을 인위적으로 가로막을뿐더러, 남북을 횡단하다 중간 정거장처럼 이 지역을 활용하던 철새 무리에게도 영역을 파괴하는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멕시코 쪽은 분리장벽 정책 시행 후 많은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물론 사람만 힘든 게 아니라 새들의 서식환경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그냥 벽 하나 세운 것 아니냐 싶겠지만 벽의 주변으로 100미터는 시야 확보를 위해 죽은 땅으로 만들어버린다. 인위적으로 지맥을 끊어버린 격이다. (우리 전래동화에서 고유의 지맥을 끊는 행위는 급살을 맞거나 가문의 재앙으로 귀결되는 게 일반적이다!) 알래스카부터 아르헨티나 남단까지 장구한 거리를 왕복하는 철새들의 시선에서 보는 인간들의 우매한 행태를 대신하듯 영화는 정치적 언급을 피하면서도 국경 봉쇄의 어리석음을 새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한 은유로 풀어내 비판한다. 남북 어느 쪽이건 아이들은 자연에서 만나는 새들의 풍경에 신기해할 뿐이다. 오랜 세월 새들을 만나며 인생 황혼에 접어든 베테랑 탐조가들은 다른 세계의 경이에 넋을 잃고 경외심으로 바라본다.

새를 통해 인생을 성찰하게 된 과거의 경험을 들려주는 멕시코 탐조 가이드의 마무리처럼, 사람이나 새나 그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건 자연의 이치이다. 오랜 여행 끝에 가족 곁으로 돌아오고 싶은 회귀 본능 또한 당연하다. 그라쿠스 형제가 원로원에서 비분강개해 외치던 말들, 이탈리아의 들짐승도 쉴 터가 있는데 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시민들에겐 그것조차 없느냐 하던 정당한 분노를 이 작품은 품속에 간직한 채 새들의 투명한 눈으로 필터링해 관객에게 들려주려 한다. 인간의 오만과 위선을 비웃던 동물들의 우화가 21세기에 영상으로 제작된 것처럼.

 

19세기에 활동한 <새를 사랑한 화가>가 21세기에 전하는 이야기

 

"새를 사랑한 화가" 포스터 이미지
“새를 사랑한 화가” 포스터 이미지

도널드 트럼프의 분리장벽 정책은 새삼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미국의 서부 개척 역사라 불리는 대륙적 팽창의 이념과 논리에서 수백 년 동안 내려져 온 현재형에 불과한 꼴이다. 아메리카 대륙이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서구에선 당연한 듯 인용하지만, 그곳에는 원래 살던 선주민이 엄연히 거주했고 야만 상태로 매도당할 이유가 하등 없는 거대한 문명과 국가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의도적으로 간과됐다.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 영화에선 굳이 강조되진 않지만 탐조가 자녀들이 궁금해하며 부모에게 질문하던 것처럼, 왜 미국의 남쪽 국경은 멕시코의 북쪽 국경과 제대로 균형이 맞지 않는지에 대해 살펴볼 일이다. 리오그란데 강 삼각주가 위치한 텍사스주는 원래 멕시코의 영토다. 물론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등 미국의 남부 대부분이 그랬다. 전쟁을 통해 불과 200년도 안 된 시간 전에 강탈한 것이다. 선조들의 행패가 은폐되길 바라면서 서부영화 고전의 상당수는 강제로 영토를 빼앗던 미국 백인들을 영웅시하고, 정당하게 내란을 진압하려던 멕시코 정부군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규정해 버린다. 그런 막무가내 일방적 침략은 ‘명백한 운명’이나 ‘개척자 정신’으로 포장되어 미국의 건국 정신이자 자랑스러운 역사로 교과서에 실린다.

하지만 백인 정복자 중 일부는 진실로 북아메리카 대륙이 가진 방대한 자연의 매력에 빠져 평화를 추구하거나 자연보호에 뛰어들곤 했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에서 미합중국으로 넘어간 중서부 루이지애나 일대에 거주하던 프랑스계 화가 제임스 오듀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미시시피강 일대를 여행하며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새들은 물론 습지대와 밀림 속의 생물군을 (아직 사진이 보급되기 직전이던 시기라) 세밀화로 기록해 도감을 완성한다. 가장 아름다운 책 중 하나로 수집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북미의 새들〉(전 4권, 국내엔 간추린 편집본 1권으로만 발행 중)이 바로 그 역작이다.

 

“새를 사랑한 화가” 스틸 이미지
“새를 사랑한 화가” 스틸 이미지

하지만 오늘날 리오그란데 삼각주를 가로지르는 장벽 때문에 철새들의 교통로가 장애물을 만난 것처럼, 미시시피강 유역에 밀어닥친 개발로 인해 상당수의 철새와 고유종들이 수난을 겪는다. 19세기 중반에 50억 마리의 개체수를 기록한 (당시 세계 인구가 10억 정도이던 시절이다) ‘여객비둘기’가 불과 반세기 만에 멸종하는 비극을 겪는다. 철새들의 서식 습관과 번식 방법을 모른 채 숫자가 넘쳐나니 괜찮겠지라는 무지와 안일함이 빚어낸 참사다. 그 결과 오듀본의 세밀화와 최후의 개체 박제만이 그들이 한때 북아메리카 하늘을 가득 메웠다는 걸 증언하는 자료로 남았다.

 

"새를 사랑한 화가" 스틸 이미지
“새를 사랑한 화가” 스틸 이미지

<새를 사랑한 화가>는 그런 오듀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가 작업 과정에서 품었을 소회와 현재도 여전히 더 악화하는 자연 파괴의 실상을 동시에 조명하려는 학습 교육 용도로 유용한 다큐멘터리다. 그저 자연 기록영화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미국 역사에 대한 거시적 비판과 문제 제기, 이면에 숨겨진 비극들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가며 잘 결합해낸 작업이다.

오듀본이 목격하고 도의적으로 기록한 작업과, 오늘날 미국의 우경화와 함께 심화하는 적대적 난민 정책에 맞서는 활동가들의 저항은 본질적으로 같다. 물론 새만금 시민조사단의 활동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새의 자유로운 여행과 그들의 생태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원주민의 권리, 난민과 이주노동자의 자유로운 통행, 탐욕스러운 자본 및 군사 세계화에 맞서는 것과 동일한 궤로 거대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말 운명이다.

 

 


작품 정보

 

수라 Sura: A Love Song

2022, 한국, 다큐멘터리

2023.06.21. 개봉, 108분, 전체관람가

감독 황윤

출연 오동필, 황윤, 오승준, 김도영

제작 스튜디오 두마, 미디어나무

배급 스튜디오 두마, 미디어나무, 스튜디오 에이드

2022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2023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하늘 높이-국경의 철새들 Birders

2019, 미국·멕시코, 다큐멘터리, 37분, 전체관람가

감독 오틸리아 포르틸로 파두아

제작 및 배급 넷플릭스 오리지널

 

새를 사랑한 화가 Birds of America

2021, 프랑스, 다큐멘터리

2023.01.25. 개봉, 84분, 전체관람가

감독 자크 루엘

수입 및 배급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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