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런가 보다 하자.

살다보면 내가 누구인지를 매번, 그것도 있어보이게 포장해야 되는 경우가 많다. 참 피곤한 일이다.

2011년 5월 살인배추가 결성됐다. 그리고 우리는 구미 예스락페스티벌을 준비했다.
당시 예스락 페스티벌은 지역 인디밴드들에게는 가장 큰 무대이면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다보니 구미지역 밴드들은 이 페스티벌이 일년 중 가장 중요한 공연이기도 했다. 우리 역시 이를 준비하기 위해 참가 지원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가 지원서 항목을 보고 우리는 당황했다.

지원서에는 밴드 소속 멤버들의 개인 신상을 적게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각자의 직장을 적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밴드가 지향하는 음악 장르나 성격 등에 대한 건 한 줄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멤버들의 직장과 주소를 '형곡동 초록마을'로 기입했다. 원서를 접수하고 며칠 뒤 행사 주최 측에서 연락이 왔다. '도대체 거기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내 주관적인 느낌일 수도 있으나, 그닥 마음에 들지않는 말투였다. 당시 우리 멤버 중 절반 이상이 구미 지역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결국 사실대로 직장을 얘기해줬다.

'아, 그래요? 거기서 일하시는 분들이에요?'
어쨌든 직장을 얘기해주자 전화주신 분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밴드면 그냥 밴드로 평가할 일이지, 거기에 직장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공연 전 리허설은 안해도 술은 마신다. 페스티벌 당일이 되면 각 팀마다 2~30분 간의 리허설 시간이 주어진다. 많은 팀들이 톤을 잡고 마지막 점검을 하느라 분주하다. 그래서 시간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많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연습을 많이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살인배추가 아닌가. 리허설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는다.
'아! 아! 소리나네요. 기타도 소리나나?'
'지이이이이잉!! 오... 소리나네요.'
'소리나면 됐다. 예, 리허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러고 내려간다. 그러면 음향 엔지니어 분께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직 리허설 시간 남았으니까 더 맞춰봐도 된단고 외친다. 하지만, 우리는 소리만 나면 된다. 리허설할 시간보다 공연 전  술 한잔 마실 시간이 더 중요하다.

남들에게 중요한 것이 꼭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고, 어떤 명함을 가지고 있는지 목청 높여 얘기하기 피곤하다. 그리고 그걸로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밴드들이 리허설에 신경쓴다고  모든 밴드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냥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고, 이런 밴드다.

우리 살인배추는, 세상에 60억명의 사람이 있다면, 60억 개의 인생이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그냥 자기 모습 그대로 살게 놔두자. 우리는 리허설을 5분 밖에 안하니까 남는 25분은 리허설 시간이 더 필요한 밴드에게 주면 된다. 남들이 리허설 30분을 꽉 채운다고 우리도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살인배추는 체력이 저질이라 30분 공연도 힘들다. 거기다 리허설까지 하라고 하면 체력 떨어져서 못한다.

혹시나 살인배추를 섭외하실 분들은 당황하지 마시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해주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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