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의 상대방으로 ‘존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의 방학기간에는 오전 일상이 이러하다.

아침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바래다주고, 아내와 어디든 가서 어떤 종류의 브런치를 먹는다. 바쁜 하루하루,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이때밖에 없고, 이 시간마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맥을 놓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서로 말없이) 하고 있다. 서로의 맥을 놓치는 순간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까마득히 멀어질 것도 알고 있고, 어느 날 문득 어깨를 부딪치는 순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생경함을 맞이하게 될 거란 것도 알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가능한 한 쉽게 해야 된다. 생활처럼. 그러므로 ‘의무’를 요구해선 안 된다.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된 것은 (누구나) 이야기는 ‘하려고’ 하는 것이지,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이야기는 ‘하는 재미’이지 ‘듣는 재미’가 아니라는 거다. 상대방의 ‘이야기함’을 존중해 주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역시, 반드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의무’는 없다. 귀 기울이는 것은 이야기의 흥미정도에 의해 좌우된다.

이렇게 자연스레 형성된 조건에서 아래와 대화가 탄생하게 된다.

“이마트 회전초밥이 평일에 무제한 일인당 12000원이래, 어때?”

“좋지, 휴머니스트란 출판사를 좋아하는데 말야, 흄 어니스트라고 부르면 재밌지 않아?”

“말 되는군, 검색해보니 13900원으로 올랐네? 그래도 갈까? 안 먹어본지 1년은 된 것 같아.”

“씨발, 삼성! 그래도 생각나면 먹어야지. 철학자 흄이 있잖아. 그러니까 정직한 흄이라는 뜻이지. 하하하”

“다른 사람에게는 써 먹지 마. 가격이 올랐으니, 더 많이 먹으려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살찔 것 같은데, 그래도 먹을까?”

“하루쯤은 교직원식당을 피하고 싶어. 이렇게도 부를 수 있어. ‘휴, 머니스트.’ 이것도 말 되지 않냐?”

“오해살만 한 말은 안하는 게 좋아. 법륜스님도 뭘 먹을지, 먹을지 말지에 관해 고민할까? 너무 법륜스님만 듣는 것도 머리 아픈 것 같더라고.”

“스스로 선택하는 자세는 좋은 거야. 물론 난 휴머니스트 출판사를 참 좋아해. 보리출판사에서 먹는 보리밥은 보리보리밥이라고, 하하하”

“그 얘긴 전에도 했어. 어제는 법륜스님에게 정치에 관해 묻고 답하는 게 있었어. 흥미진진했는데, 그게 몇 화더라...”

“내 스마트폰으로 찾아보자. 보리출판사에서 젤 인기 많은 사람이 보리스타지. 바리스타가 아니고 보리스타.”

“집어치워. 583회구나. 어떤 사람이 전라도에 대선후보감이 없어서 걱정하는 고민이었는데, 법륜스님의 대답이 지혜로웠어.”

“그럼, 블루투스로 들으면서 가자. 보리출판사를 지켜주는 사람은 보리가드야. 바디가드가 아니고, 보리가드! 난 보리 출판사를 정말 좋아해.”

“그러고도 왕따라고 고민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 언젠가는 법륜스님 강의에 직접 가봐야겠어... 물어볼 게 생각났어.”

“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안네의 일기는 키티잖아. 그럼 안네가 일기를 쓴 책상 이름은......?”

참... 오전의 대화를 솔직하게 쓰고 보니, 솔직히 남들이 들을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대부분이 그저 뜻 없이 하는 말들이니 개의치 마시길 바라며... 결론은, 이렇듯 각자가 자연스레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에 반응해주길 굳이 원하지 않고 있다. 몇 년의 생활로 터득한 사이좋게 지내기 방법 중 하나이다. 즉, 말하는 사람의 말에의 성실한 반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기의 상대방으로 ‘존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스런 삶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존재해주어야 한다.

가끔은 골 때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원하지도 않는 말을 실컷 하고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지 술값을 내지 않는 사람이 가끔 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도 없다. 모두가 자연스레 알고 있질 않나? 말을 많이 한 사람 순으로 술값을 내는 거다. 가장 많이 ‘들어주는 이로 존재’해 준 사람은 술값 공짜다. 불변의 진리다!

만화가 김수박
뉴스풀협동조합 조합원
만화 [아날로그맨], [오늘까지만 사랑해], [내가 살던 용산](공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 사람 냄새], [만화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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