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말이야, 나 그거 좋아하는 건데...

아내의 발령지가 바뀌었다. 사는 집에서 차로 40분, 좀 밟으면 30분 걸리는 곳으로. 아내의 출퇴근이 부담스러운 상황. 고민 끝에 첫째와 둘째의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을 바뀐 곳으로 옮기고, 차 뒷자리를 방처럼 꾸미고는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다섯 달 동안 그렇게 했다(그 과정동안 이사 준비를). 아침잠 많은 나에게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

밥 차려 먹고, 애들 준비 시키고, 이 짐 저 짐 둘러메고, 아직 자는 둘째 둘러메고, 둘러메다보니 가끔 빠뜨리는 둘째 신발도 챙기고, 아내가 자주 빠뜨리는 안경 스마트폰 열쇠도 챙기고, 내가 가끔 빠뜨리는 아내도 챙기고 차를 출발시켰다.

출발하고 나면 가족여행 기분이 났다. 아이들은 뒤에서 좀 놀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아내 출근, 첫째 등교, 둘째 '등원'하고 나면 나는 근처 도서관에서 6시간 동안 일했다(나는 프리랜서 작가이므로). 모두가 마치면 다시 집으로 복귀해야 하므로 6시간은 너무 귀했다. 딴 짓할 여유가 없다. 매일 6시간의 집중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함께 느껴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못 다한 일, 집안 일.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는데...
오늘도 마누라-첫째-둘째를 학교-학교- 어린이집에 출근-등교-등원시켜놓고 도서관에 왔더니, 내 가방을 안 들고 왔다. 노트북, 타블렛, 외장하드, 원고뭉치 등의 작업도구가 든 내 가방을 집에 두고 왔다. 일단 아침 커피를 즐기며 고민했다. 40분 차 몰고 집에 가서 가방을 챙기고 40분 차 몰고 올까? 6시간 중 1시간 30분 남짓의 시간과 기름이 낭비된다. 어쩌나?

그래서 문방구에 가게 되었다. 싸구려 제도샤프 한 자루와 소프트 점보 지우개 하나, 0.5B 진한 샤프심, 그리고 연습장 하나를 샀다. 잘 꾸며진 인테리어나 걷고 싶은 유럽의 거리, 하얀 모래바다 빨강파랑 등대가 보이는 휴양지 등의 연습장 표지를 싫어해서(특히 Dreams Come True 등의 메시지도 없는), 아무 것도 없는 하얀색 표지의 연습장을 찾느라 고생 좀 했다. 제도샤프 안에 장착된 심들을 모두 버리고 0.5B 진한 샤프심으로 채웠다. 음... 곰곰이 떠올려보니 정말이지 워드프로세서 말고 손으로 글 써본 게 10년만인 것 같다. 자, 이제 페이스북에 이 글을 올리려면 스마트폰으로 타자 쳐야겠고...

그러고 나니 1시간 30분 다 지나갔네. 그냥 차 몰고 갔다 올걸 그랬나? (아내: 기름 아꼈잖아. 돈! Money!) 딱 한 숨만 돌리라고 내 가방이 숨었나보다. 이제 곧 이사 와서 살게 될 낯선 동네 산책 한 번 해야겠네. 아무런데서 점심도 먹고. 다섯 달 동안 왜 한 번도 안했을까? 산책 말이야. 나 그거 좋아하는 건데 말이야.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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