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박작가 에세이 '목욕탕에서'
김수박작가 에세이 '목욕탕에서'
  • 뉴스풀협동조합
  • 승인 2017.11.0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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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내가 요즘 아무렇게 꾸는 꿈 중 하나는 (운이 좋다면)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바래다주고 전봇대 앞에서 아침 담배 한 모금을 하다보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 손녀를 등원시키는 모습을 본다.

그들이 ‘아비’나 ‘어미’라고 부르는 분들은 ‘생활전선’에 나가계신 모양이다. 지금과 같은 숨찬 세상에 자주 보게 되는 풍경이다. 꾸밀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것이 손주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인 것 같다. 웃고 있지 않더라도 주름 깊은 눈에 기쁨이 가득하다.

오늘 아침에는 고향집에 온 김에 비도 추적추적하여 나의 오래된 목욕탕에 갔다. 스무 살 때부터 있던 목욕탕이 지금도 그대로다. 옷장도 화장실도 이발의자도 그대로다. 다만 이십여 년 어치 낡았다. 가만히 보니 관리 아저씨도 그 분인 것 같다! 스물 네 살쯤에 앉아서 ‘외롭다... 외롭다... 외롭다...’라고 생각하던 그 네모난 탕에 들어가서 ‘그랬지... 그랬지... 그랬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가 탕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아비’는 같이 오지 않았다. 놀라웠다. 할아버지가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손자를 데리고 목욕탕에 오다니.

- 들어 온나, 안 뜨겁대이.
- 진짜?

손자는 탕에 들어오더니 이내 물장구를 쳤다. 할아버지가 나를 힐끗 보더니 손자에게, 아저씨가 이놈 한 대이. 하시길래 나도 할아버지를 힐끗 보곤 꼬마에게, 괘않다. 사람 없을 때는 막 헤엄치도 된대이, 아저씨 잠수! 으덱덱덱푸... 아무런 칫솔과 면도기를 주워들고(이 짓도 그만해야 되는데, 형편이 나아지질 않네.^^;;;) 높은 샤워기 앞에 서서 우당탕탕 씻는 동안에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가 들렸다.

- 뭐라? 엄마차가 바뀌었다꼬? 어떻게 바뀌었노?
- 어... 전에는 검은 차였는데 하얀 차 됐다.
- 그라모 검은 차는 어데 갔는데?
- 어... 아빠가 운전하지.
- 어... 어... 일로 온나, 이누마야! 때 미는데 탕에 또 드가모 우야노? 으허으허!

나도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만약 손주가 생긴다면 그 아이의 유치원에 같이 걸어가고 그 아이와 목욕탕에 가고 싶다. 맛있는 것과 신기한 것도 사주는 머리 하얀 할아버지 되고 싶다. 할아버지가 재밌는 개인기도 스무 가지나 할 줄 알고. 아이가 관심이 있다면 오래전 그 구질구질했던 2010년대에 있었던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줄 수도 있는데.

그러려면 담배도... 좀 그만 피워야겠고(지금은 하루에 다섯 개피^^), 목욕탕에서 남의 칫솔과 면도기를 씻어서 쓰는 일도 멈춰야겠지. 그런 종류의 꿈도 꾸어본다는 이야기다. 그 아이의 교육과 유학을 책임지는 할아버지는 못되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멋지고 조금 웃긴 할아버지. 내 자녀가 나 몰래 차 바꾼 소식도, 나 몰래 소고기 먹으러 다녀왔다는 소식도 모른 척 해줄 수 있는데.

물론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꾸어보는 꿈이로세.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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