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이 있다면 기회가 공정했으면 좋겠다.

 
곳곳에서 과도한 카드사용의 결과로 빚어진 일들에 대한 소식이 들렸다. 아버지의 친구는 갓 결혼한 아들이 쌓아놓은 엄청난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날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많은 신용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카드들로 빌릴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금으로 아들의 채무를 탕감시키고 혼자서 산으로 숨었다는 이야기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당시 경찰 공무원에 합격한지 1년 된 한 친구는 서울 방배동에서 근무했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날은 한 구의 시신을 건지자마자 건너편 다리로 바로 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입경찰로서 짧은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을 많이 보게 된 이 친구는 가능한 한 빨리 고향으로 근무처를 옮기고 싶어 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채권추심 사례는 많이 들을 수 있었지만, 경찰 친구에게서 들은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뉴스에 잘 나오지 않았다.


다들 이 막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분야를 달리한 나 역시 무엇 하나 신통할 리 없다.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용역회사를 통한 막일을 다녔는데, 현장에서 당시의 사회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얼마 전까지는 다른 일을 했었다고 말했다. 사업을 하다 망한 사람, 해직당한 사람, 몇 년 동안 그나마 축적한 자금이 바닥난 사람, 카드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 신용불량자가 되어 가족과 헤어져 있는 사람, ‘당분간생활비를 벌면서 다른 일을 준비하는 사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등 갖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막일은 원래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숙자란 단어가 생겨났다. 현장에는 노숙자로 지내면서 오늘의 생활비를 벌려고 온 사람도 많았는데 사용자들은 그들이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며 꺼려했다. 몇 년 후, 시골 마을에 숨은 동네친구는 아이가 생겼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다시 사회로 나오기로 결심한다. 그는 나중에 아이가 공공교육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한다. 묻혀있던 빚을 처리해야했다. 나는 그의 일을 도우며 개인회생, 파산신청과 같은 제도를 알게 되었다. 그가 사채를 사용했고, 현금을 만들기 위해 카드깡과 같은 지하경제제도를 이용했었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갚아야 할 원금보다 축적된 이자가 더 많았다. 이러한 정부의 신용불량자 구제책이 불편했던 사람들은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너네는 빌려서 써보기라도 했지.’ 어쨌든 그도, 나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를 포함한 주변에서도 막막하기만 했던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들은 우연히 34세 되는 해에 많이 결혼했는데, 다음 해에는 입춘이 없어서 과부해라는 근거 없는 우려를 주변에서 들었다. 아내는 과부가 된다는 것에 큰 불만이 없겠지만, 나는 죽을 수 없지 않은가. 34세에 결혼은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동갑내기를 기준으로 보면 절반쯤은 아직 미혼이었다. 입춘이 한 해에 두 번이면 쌍춘년이란다. 그 전후로 쌍춘년’, ‘황금돼지띠의 해’, ‘백호랑이띠의 해’, ‘청룡띠의 해등의 사회적인 부추김이 결혼과 출산을 상당히 견인했다고 볼 수 있다.

결혼은 새 출발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축적된 자산이 없었다. 그해 가을, 졸업한 대학 선후배가 만나는 홈커밍데이(Homecoming Day)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열심히 공부를 하든지, 열심히 놀든지 둘 중 하나만 하면 나중에 잘 산다.’88학번 선배가 한 마디 하겠다고 일어섰다. 회사생활 하는 동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 적이 없는데, 후배들 앞에서 짝다리짚고 말해도 되겠냐며 유머러스한 양해를 구하고 한 첫 마디가 미안하다.’였다.

그는 자신이 취업을 수월하게 했다고 말했다. ‘힘들겠지만 이 어려움은 자네들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들의 책임이 아니면 뭘 어떡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미안하다는 선배의 솔직한 말이 고마웠지만, 이내 쓸쓸해졌다. 저 선배의 지난 10년과, 내가 속한 세대의 지난 10년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혼자 쫓겨났던 92학번 선배가 생각났다. 저 선배는 당시에 살아남은 자였을 것이다. 잠시 오래된 갈증에 목이 탔고 맥주를 들이켰다. 우리는 안정이란 것을 구경해본 적이 없어서 그것이 뭔지 모른다. 뭔지 모르면 무덤덤하다. 삶은 계속 되어야 하므로 늦었지만 또 걸어가야 할 뿐이었다.

아이를 방패막이 삼아 시위를 하는 잔인한 엄마


2007년 대선에는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다. 당선이 너무 확실해 보이는 어느 후보가 사기꾼 같아서 싫었다. 이것도 정치적 무관심일까? 2008년 소고기 집회에 나갔다. 갓 태어난 내 아이가 컸을 때 광우병 소고기를 먹이기 싫었다. 집회가 축제 같았다. 어느 언론에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회에 참석한 엄마들에게 아이를 방패막이 삼아 시위를 하는 잔인한 엄마라고 말했다. 너무 유치해서 화가 났다. 우리는 엄마들이 외출하고 싶을 때 아이를 특별히 맡길 곳이 없다는 점을 잘 안다.

그 엄마들에게 벌금이 200만이 부과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월단위로 메우며 사는 가정경제에 예상치 못한 200만 원의 구멍이 나면 몇 달을 고생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생각보다 넌센스(Nonsense)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아이를 방패막이 삼는 엄마라고 생각하는 넌센스 정부라고 생각했다.

전교조 소속 선생님들이 사찰을 받았다고 하고, 해직 당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89년에, 학교에서 쫓겨나 울면서 떠나던 전교조 선생님이 뒤늦게 떠올랐다. 선생님은 떠나는 날 칠판에 우리가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써내려갔었다. 태백산맥, 장길산으로 시작 되던 목록들을 받아 적었었다. 그러나 2008년이다. 누가 먼저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러다 잡혀 간다는 말이 오고갔다. 우리에게는 두려움보다 짜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아침 뉴스에서 용산 재개발 현장의 화재사건을 보았다. 뉴스속보라고 강조된 자막에 6명 사망이란 글씨를 보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요즘도 시위현장에서 사람이 죽나? 4층 난간에 매달린 한 사람의 허리에 진압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떨어져 죽으란 말인가? 인간 진보의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나 보다.

몇 달이 지나서도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사망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가족들에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검찰이, 정부가 이 사건의 진실을 속 시원히 풀어주질 않는다. 영원히 땅속에 묻힐 것만 같았다. 언젠가 다시 조사하기 위해서라도 기록으로 남기자는 동료 만화가의 제안을 받아 유가족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서 만화집을 냈다.(내가살던 용산) 사람들이 나에게 운동권이이었냐고 묻기도 했다. 당연히 아니라고 말한다.

모임의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민중가요를 부르곤 했는데, 따라 부르지 못해 매번 머쓱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앨범에 있던, ‘광야에서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면 조금 자신 있게 따라 불렀다. 그렇지만 나는 자꾸 손님 같았다. 이방인 같이 느껴져서 소외감도 느낀다. 대학 선배 나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옛날이야기도 심심찮게 한다. 그들의 추억은 나와 아주 거리가 있어 보였다.

 
 

우리가 보기에도 기막힌 일들이 자꾸 벌어졌다. 쌍용자동차 사태, 노무현의 죽음, 불법적인 미디어법 통과, 한진 중공업 사태, 천안함 침몰, 북한의 연평도 포격, 2012년 대선 때는 국정원의 선거개입까지. 무엇 하나 진실이 없어 보인다. 유치하고, 거짓말 같고, 시대착오적이고, ‘구려서견딜 수가 없다. 의무라고 생각해서 간 건 아닐 거다.

답답해서 시청 앞에도 가보고 대한문에도 가보고, 쌍용 자동차 철탑, 현대 자동차 철탑에도 가보았다. 삼성 반도체에서 백혈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산업재해 판정이 한 번도 나지 않았다고 해서 만화로 만들어 알리기도 했다(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 사람 냄새). 겨우 가정도 꾸리고 아이들도 낳아 키우다 보니 애들 생각에 나가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 나와 비슷한 세대들은 선배들에게서 배워서 그곳에 나간 게 아니다. 가르쳐 주는 선배가 없었든, 선배가 가르쳐 주는데 우리가 거절했든, ‘공부하거나 놀거나를 먼저 배웠든 이렇게 답답한 세상에서 살기 싫어서 나갔을 것이다.

지금 키우는 꼬맹이들이 컸을 때는 경쟁교육이 이 정도로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얘들이 컸을 때는 대학 등록금도 이만큼 비싸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이가 노동자로 살아간다면 지금처럼 서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재력이 있다면 기회가 공정했으면 좋겠다. 힘 있는 자에 빌붙지 않아도 실력 있으면 성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모두가 훌륭할 수는 없으니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의 격차가 슬플 정도로 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땅값, 집값에 내 부모의 노후와 나의 삶과 아이들의 행복이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와 같은 바람은 원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와 무관할 것이다.

답답한 현실을 바꾸고 싶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그러나.


늦었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나와 같은 ‘X세대’는 필요에 의해서 사회에 참여하고 있고, 답답한 현실을 바꾸고 싶다. 시청 앞에서 사람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외치면 들어는 봤으니 입이 척척 맞진 않아도 아는 부분은 열심히 따라 부른다. 그래도 ‘불나비’나 ‘다른 노래’는 몰라서 못 부른다(제목이 생각나질 않는다). ‘동지’란 말도 ‘투쟁’이란 말도 어색해서 쓰지 못한다.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많다. 어떤 아저씨가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맥을 같이 해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몰라서 서운하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무안하다. 한편으로, 붉은 띠와 깃발과 힘찬 민중가요가 너무 과하면 사람들이 불편해해서 여러 세대의 연대를 더 폭 넓힐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방법에도 익숙하다. 더 신선한 소통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선배 세대들이 그들의 기억에 애착을 갖듯, 우리 세대의 기억도 존재한다. 서슴지 않고 개인성을 추구했음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나와 우리세대는 ‘X세대’, ‘개인주의자’라고 불렸다. 개성을 중요시하였고 스스로를 내세우고 싶었다. 자기다움으로 미래를 연 서태지를 꿈꾸었다. 그러나 앞길이 막혀 막막하던, 쓴 소주를 마시며 서른을 맞을 즈음에 나는 생각했다. 스무 살의 페스티벌이 마지막이었음을. 선배들이 이끈 민주주의의 혜택에 힘입어 개인의 가치를 추구하였기에 우리의 ‘연속하여 뒤틀린’ 10여 년을 드러내고 호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꾸고 싶다. 가능하다면 자기다운 방법으로 바꾸고 싶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잡아야 한다. 손잡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아야 한다. 이해가 필요하다. 배척하지 말고, 알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두렵지만 여기 나와 그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세월 또한 들여다보아야 할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 마지막 페스티벌 끝. 

(2편 /  서태지 같은 그의 정치에 열광 했다.)

만화가 김수박
뉴스풀 협동조합 조합원
만화 [아날로그맨], [오늘까지만 사랑해], [내가 살던 용산](공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 사람 냄새], [만화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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