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파의 무기, 알고 보니 도덕적 가치?
보수파의 무기, 알고 보니 도덕적 가치?
  • 김수민 문화기자
  • 승인 2014.07.14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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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여기, 카드 넉 장이 있고 그 카드마다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E        K        4        7

“카드의 한 면에 모음이 적혀 있으면, 그 뒷면에는 짝수가 적혀 있다”고 한다. 이 규칙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뒤집어봐야 하는 카드들은 다음 중 어느 것일까? 이는 <바른 마음>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가 소개한 ‘웨이슨의 네 장의 카드 과제’라는 논리 문제인데, 정답은 이 글의 맨 밑에서 공개하겠다.

<바른 마음>은 심리학과 정치학의 가교를 놓고 있다. 저자 조너선 하이트가 사는 미국정치가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되어 있다면, 한국은 소위 진보 또는 개혁과 보수로 나뉘어져 있다. 한국의 보수가 진정한 보수인지 진보(개혁)이 과연 얼마나 진보(개혁)인지 의문의 여지는 매우 크나, 미국과 비슷한 구도로 짜여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둘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면 자신이 보기에 상대방은 옳지 않음은 물론 ‘옳음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데 그들은 왜 틀린가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나는 이른바 진보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인간성과 도덕성에서 큰 차이가 없다. 만일 ‘깨어있는 시민’들이 여기는 것처럼 ‘무지몽매하게 잠든 시민’이 한국 정치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면 이 사회는 벌써 무너졌을 테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불의에 분노하는, 불의에 항거하지는 못해도 가담하지 않는, 불의에 가담하더라도 모든 면에서 불의를 저지르려고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수없이 바라보고 겪는다.

<바른 마음>의 부제는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이다. 소신을 지니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자신의 소신은 옳고 그와 반대되는 것이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상대방 혹은 적을 “올바른 삶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양 규정하는 것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나는 한국의 소위 진보개혁파 중에서도 소수파에 해당하며, 그 덕분인지 한국의 자칭 진보가 자칭 보수보다 도덕적이기는커녕 딱히 논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역사왜곡은 소위 수구보수세력이 다 저지르는 것 같지만, 자칭 진보파 중 일원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실제로는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보수 정부로서 반-서민적 정책을 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모른체하거나 은폐하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두둔하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나오는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최후 무기와 동일하다: “시대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

지난 대선에서 개발독재의 후예와 신자유주의의 후예를 지지한 사람의 총합은 무려 99.6%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이 99.6%중 상당수도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같은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고 있고,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이들은 사회에 큰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바른 마음’의 보유자이다. 우리는 이제 자신과 다른 정치 성향의 사람들이 '왜,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직관에 안 맞으면 어떤 지적도 불통... 코끼리가 먼저다!

인간은 우선 판단부터 내리고 나서 그 근거들을 하나둘씩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대 댄 근거라는 것도 실상은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른 마음>이 펼치는 심리학적 전제다. 하이트는 버지니아 대학에 재직하며 여러가지 실험을 했다. 한 번은 어느 남매의 근친상간 줄거리를 들려주고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책의 92~93쪽에 실린 대화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못이다. 내가 종교에 독실한 사람이라 그렇다.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잘못이다.”
-어디가 잘못인가?
“근친상간 개념 전부. 근친상간으로 임신하면 대부분 아이가 기형이 된다.”
-이들은 콘돔과 피임약을 사용했다.
“아 그렇군. 그랬다고 했지. 그냥 그렇게 하는 건 잘못이다.”
-나는 당신이 그것을 왜 잘못이라고, 무엇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내려고 한다.
“가만있자, 생각 좀 해보자. 음, 그 둘이 나이가 얼마나 되나?”
-스무살 정도다.
“나 이거 참(낙심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다. 난 그냥... 음... 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다. 용납이 안 된다.”
-용납 안 될 일이라고 다 잘못이라고 할 순 없지 않나? 여자들이 취직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고 치자. 그때도 여자들이 취직하는 게 잘못이라고 할 텐가?
”아이고 이거 어렵네. 뭐라고 얘기해도 내 맘은 바뀌지 않을 거다. 둘의 행동은 그저 미친 짓이다."

한편, 근거를 찾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도덕성은 선천성과 사회적 학습의 조합이다. 하이트는 말한다.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인 추론은 그 다음이다.” 하이트는 인간의 ‘자동적인 인지과정’이 코끼리라면, ‘통제된 인지과정’은 그 등에 올라탄 기수이자 코끼리의 시중을 들어주는 하인이라고 비유한다. 이것이 이 책의 제1의 주요 비유이다.

또 “도덕적 사고는 진실을 찾는 과학자보다 표를 잡으려는 정치인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강박적으로 염려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자동적으로 정당화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직관에 어긋나는 지적을 받았을 때는 이성적으로 이를 따져보고 수용하기보다는 전력을 다해 빠져나가려 한다(가령, 문재인 지지자는 때때로 박근혜 지지자들이 친일과 독재로 점철된 현대사의 진실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광신적 인간이라고 여기지만, 문재인 지지자들중 일부는 “노무현의 한미FTA와 이명박의 한미FTA는 다르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달고 살고 있다. 사실 이런 태도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고 제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이 사람이다). 따라서 하이트는 기수보다 코끼리를 먼저 설득하라고 조언한다.

‘여섯 가지 미각’을 이해하지 못한 정치는 패배한다

진보파가 보수파에게 지는 이유도 인간의 ‘직관’을 하찮게 여기는 데서 나온다. 하이트는 서양적(W)이고 고학력(E)이고 산업화(I)되고 부유(R)하고 민주(D)적인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세상을 관계보다 개별 사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며, 이러한 ‘WEIRD’권 문화는 도덕을 대체로 자율성의 윤리와 연관 짓는다고 설명한다. 진보파의 문화라고 할 수도 있는 WEIRD권 문화에서, 체계화 능력은 높으나 공감 능력은 낮게 나타나고, 세상을 관계보다는 개별 사물들의 집합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기도 하다.

하이트는 그러나 자율성의 윤리 이외에도 <배려, 공평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이라는 여러 가치를 거론하며 “바른 마음은 마치 여섯 가지 미각 수용체를 지닌 혀와 같다”고 제2의 주요 비유를 든다. 이와 같은 도덕성 기반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자 각 개인이 ‘경험하기 이전에 구조화’된 선천성을 통해 주어져 있다. 하이트가 도덕성의 기반과 인간의 적응 도전 과제를 짝지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배려/피해 기반 - 무력한 아이들을 돌보는 과제
(2) 공평성/부정 기반 - 협동으로 보상을 얻되 착취는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과제
(3) 충성심/배신 기반 - 연합을 구성하고 유지할 과제
(4) 권위/전복 기반 - 위계 서열 내에서 관계를 구축해 이득을 챙겨야 할 과제
(5) 고귀함/추함 기반 - 잡식동물의 딜레마+병원체 및 기생충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제

미국이나 한국이나 시골 주민과 노동자 다수가 공화당-새누리당에 표를 던진다. 이에 대해 미국 민주당이나 한국의 진보파 시민들은 “보수세력의 농간에 넘어가서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신한다”고 비아냥거리지만, 하이트의 시선은 사뭇 다르다. 시골 주민과 노동자들은 위와 같은 도덕성 기반과 “도덕적 이해에 따라” 보수정당에 투표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미국과 한국의 진보파가 농민, 노동자의 표를 받지 못하는 이유, 못 받고도 이유를 엄한 데로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한 팀으로 뭉치는 대신 자신(들)만의 도덕 매트릭스에 갇힌다. 주지하다시피 진보파와 보수파는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하이트는 진보파가 보수파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이 더 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도덕성 기반들에 대한 이해가 보수파보다 더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아마도 그 몰이해의 중심에는 인간의 집단주의적 성질에 대한 몰이해가 있을 것이다.

하이트는 “인간의 본성은 90퍼센트는 침팬지, 나머지 10퍼센트는 벌과 같다”는 제3의 주요 비유를 내보내고, 인간은 이기적인 영장인 동시에 자신을 뛰어넘는 크고 고결한 존재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을 갖고 있음을 진화학, 인류학을 동원해 입증한다. 하이트처럼 연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점을 경험하거나 목도한다. 축구 경기장, 락 콘서트, 레이브 파티에서 말이다. 이런 마음은 사람들의 집합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경외에서도 드러난다. 종교도 그렇다. 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초월하면서 무리 지어 한 팀으로 뭉치고자 하는 인간의 성질과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게 하이트의 논리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성향을 비판하고 이를 뒤집으려는 것도 어렵고, 그런 성향에 대한 고려나 호소 없이 지지를 확보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이해 힘든 상대방의 성향도 '바른 마음'의 발로

근래 한국 정치권에는 ‘제사장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박통진리교’니 ‘노빠’니 하는 단어들이 그 단서다. 나로서는 기가 막히다 못해 기가 질리는 퇴행적 정치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 정치 또한 인간 본성의 발로이자 ‘바른 마음’을 갖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일 수 있다. 또한 나의 마음이라고 해서 그런 일면이 없을까? 나는 마음을 터놓고, 가능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나 자신 또한 체계적 추론 이전에 이미 유전자 발현과 편견과 오래 전의 경험으로 뒤섞인 ‘이미 내려진 결론’을 따르는 인간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녹색정치도 배려나 공평성 뿐만 아니라 (자연에 관련된) 충성심, 권위, 고귀함과 종교에 이끌리는 인간의 본성을 활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서로 잘 지낼 수 있게 함께 노력해보자.”(하이트가 글을 마치며 쓴 문장)

글 초반에 나온 문제의 답은 [E]와 [7]이다. [E]까지는 많이들 맞혔을 텐데 [7]이 아니라 [4]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이 우기기에 보수파와 진보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닐 듯하다. 내 글을 스쳐가며 읽은 사람 중에는 -자칭 진보파 중의 일부를 욕한 구절만을 읽고- 내가 보수파라고 어처구니 없이 우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기시라. 다만 그 우김을 가끔은 돌아보거나 쏘아보시라. 그것이 인간의 본성, 당신의 코끼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