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베어있는 곳

군사분계선 아래 동해의 최북단 대진 등대는 강원도 고성 현내면 대진항과 마차진해수욕장 사이 튀어나온 곶에 우뚝 솟아있으며 북쪽의 저진도등과 지금은 무인 등대로 바뀐 남쪽의 거진 등대를 원격조정하는 동해지방해양항만청 소속의 항로표지관리소(등대)이다.


 


대진 등대에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배어있다. 대진 등대가 처음 불을 밝힌 1973년은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직후의 계엄 같은 상황이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서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남북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맞서던 시점이다. 60~70년대는 강원도 북부 대진항과 거진항, 속초항소속 어선들의 납북, 월북 사건이 빈번하였다. 특히 68년부터 72년까지 남측의 10월유신 선포와 북측의 ‘모험주의적 반동’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이었다. 이 와중에 대진 등대가 들어섰다.

동해안 최북단 등대들은 남북관계에 따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어로한계선이 지금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있던 60년대는 대진 등대 아래쪽 1965년 12월 건립된 거진 등대를 기준으로 어로한계선이 설정되었다. 70년대는 대진 등대가 어로한계선의 기준이 되었다. 지금의 대진 등대는 무인 등대(도등-Leading Light)로 출발하였다. 뒷산 멀찍이 산자락에 후도등(後導燈) 철탑이 서 있고 오늘의 대진 등대 자리에 전도등(前導燈)이 서 있어 양 도등을 연결하는 선이 어로한계선이었다.
70년대 상황에서 대진 등대의 불빛은 오로지 북방한계선을 실수, 혹은 의도적으로 월경하는 어선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검열하고 자제하게 하려는 빛으로 그려진 ‘금단의 선’이었다.

그 후 어족자원이 고갈되어 새로운 어장의 개방을 요구하는 어민들과 진전된 남북관계에 따라 1991년 어로한계선이 5.5km 북상하면서 도등의 역할을 마치고 1993년 4월 1일 일반 등대로 전환되었다. 대진도등으로서 고유 임무인 어로한계선 표시기능을 북단의 저진도등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거진 등대도 유인등대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대진 등대에게 원격조정 당하는 무인 등대가 된다. 북위 38도 33분에 설치되어 북방 어로한계선을 표시하던 저진도등도 2012년 8월에 그 역할을 저도도등에게 넘겨준다. 새롭게 건립되는 저도도등은 저진도등보다 1마일 북쪽에 있으며 주간조업 중에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LED도등 등명기가 설치된다.

대진 등대의 북쪽, 마차진해변의 끝부분 돌출한 곳이 저진마을이고 그 앞섬이 저도이다. 저도는 흡사 돼지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이곳에는 1945년까지 동해 북부선 저진역이 있었다. 동해안 최북단 저도어장은 정착성 수산물이 다량으로 서식하는 황금어장이다. 인간의 손을 덜 타서 황금어장이 된 것이다. 북방어로한계선의 북상으로 이 일대의 황금어장에서 조업이 가능해 졌다.

※도등이란?
항로표지의 일종으로 동일한 수직면에 두 개의 등화를 설치하여 일직선으로 보이도록 함으로써 선박을 안전하게 유도하는 시설이다. 전도등, 후도등을 바다에서 바라 볼 때, 멀리 있는 후도등이 가까운 전도등보다 좌측에 있으면 월경, 우측에 있으면 한계선을 넘지 않은 것, 일직선상에 있으면 경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대진 등대>

등탑은 높이 31m 팔각형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층계를 무수히 올라가면 위쪽에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이 전망대 그 자체이다. 사무실 위층이 진짜 전망대이다. 북쪽으로 마차진해수욕장이 굽어보이고 정면으로 저진도등도 확인 할 수 있다. 북방 어로한계선을 표시하는 저진도등은 홍백 사각의 콘크리트 등대로 전도등 높이 35m, 후도등 높이 20m 이다. 맑은 날에는 금강산과 해금강 일대까지 보인다. 남쪽을 바라보면 대진항이 보이고 저 멀리 아득히 거진 등대도 눈에 들어온다. 등탑 바로 아래에 보이는 2000년에 새로 지은 직원용 숙소도 등탑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대진 등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 16-4
 






 

<대진항>

대진은 처음에는 대범미진(大汎味津)이었으며, 그 후 안 씨와 김 씨가 개척하였다고 해서 안금리(安金里)라고 칭하다가 고려시대에는 여산현(驪山縣), 그 후에는 열산현(烈山縣)에 속해 황금리(皇琴里 황구리)라고 불러왔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한나루(大津里)라고 개칭하였다.

그 후 동해안을 따라 신작로가 개설되고 1920년에는 고성군 현내면 소재리로 승격 하였으며, 한나루(포구)에 축항을 쌓아 조그마한 어항으로 축조되었다. 1925년 동해 북부선 철도공사가 시작되어 1935년에 개통을 보게 됨으로서 어항을 모체로 풍부한 수산자원(청어, 정어리)과 농산물을 원산으로 수송케 됨으로써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북지역이었으나 한국동란 후 수복되었다.








<거진 등대>

2009년 새롭게 조성된 ‘거진등대 해맞이 공원’에 있는 거진 등대는 대진 등대의 원격 조정을 받는 무인등대이다.
유인등대로 시작한 거진 등대 건립에 대한 그 당시의 신문 기사와 관보를 보면 아래와 같다.

「1965년 6월 29일 기공한다. 동해안휴전선에 가장 가까운 이 등대는 36마일까지 빛을 보내는 30만 촉광의 등과 무신신호기 등을 비치하여 어로잡업과 초계경비를 돕게 된다. 이 공사는 1백95일간이면 끝이 난다.」 (경향신문 1965년 6월 26일자 기사)

「동해안 굴지의 어항인 거진 앞바다에 30만촉광의 25마일 광달거리를 가진 대형등대가 준공되어 26일 점등식이 거행됐다. 9백16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건설된 이 등대는 성어기에 5백여척이 모여드는 황금어장인 이곳에서 안전항해와 어로작업을 돕게 된다.」(경향신문 1965년 12월 18일 기사)

관보 제4293호(1966년 3월 11일) 거진등대 무(霧-안개)신호 업무개시(교통부고시제1129호)

예전의 등대와 비교하면 등탑에 오르는 계단과 아래 부분은 보수하였고 등탑의 중간 이상 부분과 등롱은 예전 그대로이다.
 등대가 서 있는 곶의 끝부분 전망대에 가면 명태 축제비가 있다. 유인등대에서 무인등대로 변한 거진 등대나 명태가 사라진 고장의 명태 축제비... 지난 시절의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기념물로만 보인다.


<거진항>

500여년전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중 이곳에 들렀다가 산세를 훑어보니 모습이 클 '거(巨)'자와 같이 생겨 ‘큰 나루’ 즉 ‘거진’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강원도 동해안의 어항들이 모두 그러하듯 거진항도 태백산맥 줄기의 구릉이 해안을 둘러싸고 있어 오래전부터 천혜의 어항으로 발달해왔다. 1930년대는 120호의 작은 어촌으로 현재의 항구는 긴 백사장이었으며, 어선은 소향 전마선으로 연안 2마일 내에 당일 출항하는 1일 어업으로 노를 저어 고기를 잡았다.

겨울에는 명태, 여름에는 연안에서 등잔불을 켜고 오징어를 잡았고, 가을에는 멸치잡이가 흥행했었다. 해방 전에는 많은 양의 정어리가 잡혀 이것을 처리하기 위한 일본사람의 정어리 처리 공장이 3개소나 있었으나 해방 후 갑작스런 정어리 흉어로 지금은 그 자취가 없어졌다. 당시 어민의 생활은 영세했으며 잡아온 고기는 판로가 없어 인근 농촌에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곡식과 교환하는 생활방식을 취하였다.

거진항의 전성기는 오징어가 가장 호황이던 1970년대로 이 당시 인구는 2만5천명이었다.
그렇지만 거진항의 주력 어종은 명태였다. 다들 거진항의 발전은 명태가 유도했다고들 말한다. 예전의 거진항은 명태를 말리느라 읍내 전체가 명태 밭이었다. 해변덕장마다 북어가 겨울을 났다. 진부령, 대관령 덕장 따위는 훗날의 새로운 역사인 것이다. 명태의 주산지여서 별미음식도 다양했다. 신선한 명태 아가미만을 따내 무우채와 함께 버무린 ‘명태 서거리’, 차좁쌀로 버무린 ‘명란식혜’ 등 북방의 별미 음식이 거진항에서 익어 갔다. 동해안 명태의 소멸은 한때 흥청거리던 거진 읍내를 폭파시킨 사건이었다. 거기다 최근 몇 년째 이어지는 금강산 육로관광의 봉쇄는 지역 경기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 기사 및 사진제공 : 도영주 구미치과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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