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한 성공담에 가려진 제3세계 빈곤의 구조와 현황 르포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영화 포스터

▲영화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포스터



1_ 빤한 할리우드 신파극과는 조금 다른 영화화

 

아주 유명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국내에도 출간된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사실 이런 부류의 이야기는 여기저기 회자되기는 하지만 막상 제대로 내용을 파고들어 확인하는 경우는 잘 없다. 고작 인터넷에서 입맛에 맞게 차포 다 떼어낸 채 편의적으로 가공된 몇 줄 요약이 전부다. 그저 훈훈한 미담만 남아버리는 특색 없는 사례들은 마치 유령처럼 온라인 공간에서 부유하는 중이다. 고작해야 공중화장실에 부착된 출처 불명의 동서양 격언에 불과한 수준이기 십상이다.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은 그렇게 흘러가기 딱 좋은 내용을 가졌다. 적당히 과장된 극적 긴장과 최루성 짙은 감성에 호소하는 신파를 가득 끼얹기 아주 적합한 줄거리다. 그런 위험에 사방으로 노출된 채 제작되는 과정을 거쳤을 테다. 소재 때문에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다 몇 해 만에 결국 보게 되었지만 할리우드 특유의 가족용 전체관람 버전일 거라 단정했다. 극적인 소재를 무색무취하게 하향 평준화해버리는 상업영화의 만행을 상상하며 영화의 문을 조심조심 두드려보았다.

그렇게 보게 된 영화는 예상보다 원작 재현도가 상당히 높았다. 이게 그리 큰일이냐는 반응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올 법하다. 원작을 가진 영화가 이를 충실히 영상화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굳이 이 당연한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야기, 그저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미담 서사, 심하게 표현하면 긍정 혹은 노력 드립의 전형으로 써먹기 딱 좋아 보이는 해당 일화가 실제로 들여다보면 상당히 어두운 배경과 세밀한 문제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은 독립예술영화라 불리는 부류의 파격적인 실험성이나 치열한 윤리의식까지 도전하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상업영화의 전형적 구성 속에서 원작이 가진 내용을 함부로 손대지 않고 억지 신파를 끼워 팔지 않는 미덕을 가진 영화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다행스러운 결과라는 안도와 함께 관람을 마칠 수 있었다.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스틸 이미지

2_ 윔베 마을과 캄쾀바 가족의 기아 생존기

 

영화는 5개의 챕터로 구분된다. 이중 세간에 알려진 내용, 주인공 소년의 흐뭇한 도전은 대체 언제 시작되느냐 기다릴 관객들을 한참 기다리게 한 후 맨 마지막 챕터가 되어서야 등장한다. 누구나 예상하며 기대하던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관객으로선 예상 밖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5개의 챕터는

①‘파종’ ⇒ ②‘재배’ ⇒ ③‘수확’ ⇒ ④‘굶주림’ ⇒ ⑤‘바람’의 순서로 구분된다. 이중 앞의 4개 챕터는 소년의 도전 스토리라기보다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흔히 지구에서 가장 저개발 상태로 정체된 것으로 알려진 동네에서 벌어지는 빈곤한 일상과 사회적 혼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르포에 가깝다. 1987년생인 주인공은 꽤 냉철하게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 객관적 시야를 갖고 빈곤의 악순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20살 갓 넘은 나이에 꼼꼼하게 서술해놓았다. 원작을 영화 앞뒤로 읽는다면 제일 좋은 선택이겠지만 간단하게는 2009년과 2011년, 주인공이 실제 진행한 TED 강연이나 온라인에 적지 않게 올라와 있는 소개 영상 한두 개 정도만 찾아봐도 전반적인 상황 이해에 제법 도움이 된다.

영화의 배경은 우간다와 모잠비크, 탄자니아 사이에 끼어 있는 동아프리카의 내륙국 말라위다. 아마 99%의 한국인은 이렇게 설명해도 말라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할 테다. 남한보다 조금 큰 면적에 삼분의 일 정도 인구가 사는 빈국이다. 세로로 길게 뻗은 국토가 의외로 한반도 지형과 흡사한 형태라 가끔 회자되곤 한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 전체로 봐도 최하위에 속하는 저소득 국가다. 인접국에 흔한 내전이나 무장군벌은 거의 보이지 않는 정치적 안정에도 불구하고 부존자원이 없는 한계가 치명적이다. 거의 전 국민이 오직 농업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기후변화나 세계경제 부침에 쉽사리 흔들리곤 한다.

주인공이 사는 말라위 중부 윔베 마을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척박한 농촌이다. 주인공 마이클 캄쾀바는 부모님과 누나, 갓 난 여동생과 함께 산다. 성실하고 화목한 가정이지만 농사 형편은 별로 좋지 않다. 아버지에겐 땅이 없는 데다 농사를 짓기엔 갈수록 기후조건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빈약한 말라위의 핵심 수출산업은 거의 수출액 절반을 차지하는 담배다. 윔베 마을 인근에도 대규모 담배 농장이 들어선 상태다.

담배 농장 쪽에서는 잎담배 건조를 위해 마을의 공유 숲을 좋은 가격에 구매할 것을 제안한다. 벌채해서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마을에선 성인남성들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한다. 마을 족장과 주인공의 아버지는 기후위기에 대비해 숲을 보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제안을 반대한다. 하지만 당장 현찰이 보장된 조건 앞에서 생계가 절실한 주민 다수는 찬성표를 던진다. 허탈한 표정으로 마을회관을 나와 거리를 걷는 아버지 앞에 곧 다가오는 대선 선거운동 차량이 선거운동원들을 가득 태우고 로고송과 함께 시끄럽게 지나가는 중이다. 그는 “민주주의는 수입 카사바와 같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이유를 묻자 답한다. “빨리 썩으니까” 그렇다면서 말이다.

14살 주인공은 손재주가 꽤나 좋다. 그는 돈을 받고 마을 이웃들의 라디오를 수리한다. 전기도 상하수도도 없는 동네에서 가장 가치 있는 현물자산은 곡식과 농기구를 제외한다면 고작 해봐야 라디오와 자전거 정도다. 이들은 냉장고도 에어컨도 텔레비전도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의 시점 배경인 2001년 당시에도 지구촌 광대한 지역의 사정은 대충이랬다. (유튜브에서 ‘라오스 오지마을 한국인’이란 채널을 검색해보면 지금 현재도 세계의 상당 부분이 별반 바뀐 게 없다는, 그리고 관련된 쟁점이 영화 속 동아프리카에만 국한될 게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을 엄습할 두려운 징후를 알아차리기엔 아직 어린 주인공 소년은 동네 형들 노는 데 끼어 보려고 시도한다. 친구 길버트는 자리에 끼워주는 청년들이 마이클에겐 차갑다. (길버트는 족장의 아들이다) 하지만 건전지가 떨어진 라디오를 수리해 방송을 듣게 해준 대가로 무리에 끼일 수 있게 된다. 되살아난 라디오에선 다급한 뉴스가 잡힌다. 바로 9.11 테러 속보다. 21세기 첫 10년의 가장 파괴적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후대에 기록될 테지만 아이들은 거기엔 별 관심이 없다. 들으려던 스포츠 중계로 채널 얼른 돌리라며 성화를 부릴 뿐이다.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스틸 이미지

하지만 기상 악화는 재앙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폭우가 쏟아졌다가 가뭄이 찾아온다. 마을에는 기아가 도래한다. 하지만 정부는 제대로 구호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임박한 대선 선거 승리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주인공의 아버지 등 마을 사람들은 족장에게 대통령이 지역에 유세차 방문할 때 구호대책을 강하게 요구할 것을 주문한다. 족장은 용기를 내어 집회에서 찬물을 끼얹는 발언으로 지원을 호소한다. 하지만 오히려 눈엣가시가 되어 경호원들에게 끌려가 심하게 폭행만 당한다. 게다가 집권세력은 실정을 숨기기 위해 기아상태를 은폐하며 반대파로 찍혀 미운털 박힌 이 지역에 식량 공급을 외면하기에 이른다. 마을에는 식량 약탈이 난무하고 삶의 터전을 포기한 채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 난민이 속출한다.

주인공의 가족이라고 여기에서 벗어날 리 없다. 화목하던 가족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애써 밭을 갈고 수확을 해도 1년을 넘기기엔 턱없이 모자란다. 설상가상으로 굶주린 옆 마을 주민들에 의해 생명줄 같은 옥수수를 약탈당하기에 이른다. 결국 주인공 마이클은 중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바람에 학교에서도 쫓겨난다. 대학에 가고 싶은 꿈 많은 누나는 자신을 좋아하는 학교 선생과 야밤에 도주하고 만다. 부부 사이도 멀어져 간다. 결국 굶주림은 사랑하는 가족을 그저 ‘먹는 입’ 개수로 파악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참상이 세밀하게 영화에서 구현된다. 의외로 신랄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 배경을 상세하게 녹여내었다. 이후 가족의 수난이 극점에 오른 극한상황에서 마지막 10여 분 동안 우리가 겉핥기로만 알고 있던 어떤 ‘신화’가 탄생한다. 모두가 얼른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훈훈한 기적의 시간은 짧지만 강렬하다.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스틸 이미지

3_ 영화가 들려주는 ‘저개발의 기억’

 

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아도 어디선가 들어서 알고 있는 이 미담의 감동을 극대화시켜주는 건 그 이전, 영화 전체 분량의 8할을 차지하는 말라위 윔베 마을의 기근 묘사다. 그 사실적인 재현과 세부 묘사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장 좌절했던 감정은 ‘무기력’이다. 그저 아버지 일 거들며 버티는 것만으로는 아무 답이 없는 상황, 수천 년 넘게 선조들에게서 계승되어 온 것들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지만 아무 확신이나 보장이 없는 지경이다. 이런데도 그저 고대부터 내려온 하늘에 기우제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도전해 볼 여지가 없다. 필사의 시도는커녕, 별다른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무력한 농부의 삶 외에 자신에겐 아무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할 뻔했다고 (실제 주인공은) 여러 경로로 밝힌 바 있다.

주인공은 가족을 사랑하고 마을의 전통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은 동일하지 않다. 영화 속에서도 마이클 캄쾀바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대립과 충돌은 제법 격하고 신랄하게 표현된다. 형의 장례식 때 등장한 샤머니즘 전통을 대하는 아버지의 시선과 영화 말미에 풍차가 기적을 만든 직후 등장한 샤먼들을 대하는 주인공의 시선은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소중한 전통은 계승해야 하지만 기후위기로 급격히 변해가는 환경에서 그저 과거의 관습만 의지해 살 수는 없다는 주인공의 변화를 향한 열망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이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의 아버지 입을 빌려 말라위 민주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선보인 바 있다. 이는 그저 정치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말라위는 1960년대 독립 후 친 서방 노선을 택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간을 보냈지만 경제면에서는 자급자족의 계획경제 모델을 선보여 왔었다. 30년간 집권한 권위주의 독재자 반다 대통령은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정적에겐 정치적 탄압을 일삼았지만 국민의 절대 다수인 가난한 농민들에게 비료와 농기구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가 선거 패배 후 물러난 뒤에 집권한 2대 대통령은 친 서구적 정치인으로 국제기구의 원조와 투자를 유치하면서 반대급부로 세계은행의 컨설팅을 따랐다. 그 결과가 농업 부문 정부 지원의 축소였다. 그 결과 2001년 전후의 기아를 초래했다. 인구 1만 명당 2명의 희생자를 낸 재앙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던 것이다.

훗날 세계은행은 3세계 국가에 일반론적인 시장경제 만능주의를 도입하는 건 위험하다고 스스로 고백하게 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일 따름이었다. 경제정책에서 자유시장주의는 정치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와 세트로 인식되었고, 그 당시 재앙을 경험한 주인공의 아버지 같은 이들은 굶어 죽을 판인데 정쟁에 혼란스러운 권력층을 보면서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저 우리네 온라인 정치지상주의 키보드 워리어들과는 차원이 다른 지점이다.

에너지 자원을 화석연료에 의지하는 말라위 시골의 상황은 산림파괴와 기후위기에 극도로 취약성을 드러낸다. 마을의 숲을 지키려는 지혜 있는 이들의 충고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돈뭉치에 꺾이고 만다. 하지만 소탐대실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곧 파괴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갈수록 예측 불가능한 기후 상황에서 그나마 안전망이 되어주던 숲을 팔아치웠으니 말이다. 공유재산인 나무는 팔아치웠고 석유나 석탄을 사 올 돈은 없다. 에너지 자립은 농사와도 직결되는 현안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우물에 의존하고 밤에는 가냘픈 등불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이들에게 비가 오지 않는 상황은 곧 죽음의 손짓에 다를 바 없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지만 잿밥에 눈이 먼 정부에서 교육정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한 학기 등록금 80달러가 없어 주인공은 학교에서 내쫓긴다. 문제는 학교를 못 가니 도서관에도 출입할 수 없게 된 것. 전기가 안 들어오니 구글 검색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겠지만) 마이클은 온갖 궁리를 해서 도서관에 몰래 드나들게 된다. 교육과 도서관의 순기능은 영화 후반에 유감없이 발휘된다.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스틸 이미지

4_ 영화가 끝난 후의 현재

 

결국 주인공은 자신의 숨겨진 비범한 재능을 스스로 찾아내고 개화시킨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는 아버지의 자전거와 고철 쓰레기장의 폐기물, 자전거 12v 발전기를 활용해 전력 생산을 위한 풍차를 만든다. (말라위에는 ‘풍차’란 단어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말라위는 건기에는 아프리카 특유의 ‘하르마탄’이라는 열풍이 엄청나게 불어서 풍력발전에 아주 유리한 환경이었다. 소년의 무모한 도전 덕분에 가뭄으로 농사를 포기하던 마을은 양수기를 가동해 관개농업을 부활시키게 된다. 마이클 캄쾀바는 일약 마을의 영웅이 된다.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스틸 이미지

뒤늦게 말라위 내에서 그는 화제의 인물이 된다. 지역사회 추천으로 중등학교도 포기했던 14살 소년은 말라위 최고학부에 장학금을 받으며 다닌 후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 지도자 과정을 수료한다. 그리고 전 미국 부통령이자 환경운동가 앨 고어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다. 그는 아이비리그 명문 다트머스 대학에서 환경학 학위를 이수한 뒤 여러 후원에 힘입어 에너지 분야에서 활동하며 여전히 풍차를 만들어 마을에 보급하는 중이라고 한다. 어느새 그는 자기 나라 바깥에서 가장 유명한 말라위 인이 되었고, 미래에 환경부 장관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삼 남매이지만 실제 칠 남매인 그의 형제자매 중 마이클 캄쾀바와 같은 기회를 얻었던 건 본인이 유일하다는 것을 그는 강연 때마다 언급하고 현실의 모순을 지적한다. 자신이 만약 도서관에 출입할 수 없었다면, 그곳에서 미국에서 발간된 초급 에너지 개론을 보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미래에 대한 꿈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아버지처럼 메마른 땅을 갈며 하늘이 비를 내려주기만 바라는 인생을 살고 있었을 거라는 마이클 캄쾀바의 표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그리고 원작)를 통해 민주주의와 빈곤, 교육의 문제가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마이클 캄쾀바가 미국을 방문해 서구 선진국의 거대한 풍력과 태양광 발전소를 견학한 후 감상은 선망과 동시에 당혹감이었다고 한다. 자기 고향 마을에선 조잡한 폐품으로 만든 풍차 몇 개만 있어도 전등을 켜고 핸드폰을 충전하고 우물물을 퍼서 큰 도움이 되는데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 위치한 6천 개의 풍력 터빈은 말라위 전체가 24시간 전기를 쓸 수 있는 양이었던 것이다. 그런 웅장함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미국 대도시의 전력 낭비를 보며 과연 말라위와 미국이 같은 지구상의 존재라는 것을 동의할 수 있었을까? 세계의 불평등과 우리가 이젠 잊어버린 저 개발된 3세계의 실상을 새삼 떠올리는데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은 상업영화의 익숙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역할을 소화해낸다.

 

▲영화 <바람을 다스린 풍차소년> 포스터

 


작품 정보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 The Boy Who Harnessed the Wind

 

2018, 영국, 드라마, 113분, 12세 관람가

감독 치웨텔 에지오포

주연 맥스웰 심바(윌리엄 캄쾀바 역), 치웨텔 에지오포(트라이웰 캄쾀바 역)

출연

아이사 마이가(아그네스 캄쾀바 역), 릴리 밴다(애니 캄쾀바 역), 레모강 치파(마이크 카치군다 역), 필버트 팔라케자(길버트 윔베 역), 조셉 마르셀(윔베 족장 역), 노마 더메즈웨니(이디스 시켈로 역), 펠릭스 렘부로(존 캄쾀바 역), 로버트 아겐고(제러마이아 캄쾀바 역), 프레더릭 루케어(음쿠브위 역), 헤스팅지 피리(샤바니 음쿠브위 역), 로피움 밴다(바무시 역), 샘슨 캄발루(조 갓스턴 역), 레이먼드 오풀라(오페시 역), 마틴 기틴지(레지널드 응와치 역), 멜빈 알루사(저스틴 미트와 역), 에이머스 침포코서(미제크 치칸케니 역), 켈빈 맥스웰 응고마(말라무시 역)

원작 윌리엄 캄쾀바, 브라이언 밀러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

제작 및 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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