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잡대 청춘에게 고한다 11

피렌체 정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시뇨리아 광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붐빈다. 거기에는 르네상스 시대 탑상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베키오 궁전이 웅장한 위용을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사실 ‘베키오’라는 단어는 ‘오랜 된’이라는 뜻이다. 정식 명칭은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이다.) 광장 한 쪽에 줄지어 있는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에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멋진 식사와 함께 베키오 궁전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다.

▲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좌)와 그 앞을 지키는 다비드상(우)

시뇨리아 광장에 들어서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베키오 궁전, 그리고 그 앞에 4미터가 넘는 다비드상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걸작 중 하나이며,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훨씬 더 거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다비드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부식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약 100여년 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복제품이라고는 해도 진품과 다를 바 없이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어 충분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다비드상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피렌체의 정치 상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특히 다비드상의 시선이 중요하다. 과연 다비드상은 무엇을 보고 있으며,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켈란젤로 뿐 아니라, 당시 피렌체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다비드상 진품. 핏줄부터 세세한 근육의 표현이 놀랍다.(아카데미아 미술관)

천재 미켈란젤로와 메디치

르네상스의 시작을 단테가 열었다면, 르네상스의 마지막 문을 닫은 사람은 미켈란젤로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 수많은 천재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손 꼽힌다. 그 이전까지는 조각, 회화, 건축 등 각 분야 별로 천재들이 나왔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세 가지를 통합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조각가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건축과 회화에서도 매우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 준다. 건축가로서 미켈란젤로는 산 로렌초 성당 내부의 메디치 도서관을 직접 설계했는데, 도서관 입구 계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 메디치 도서관 입구 계단(산 로렌초 성당)

또한 바티칸 성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는 그의 뛰어난 회화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미켈란젤로 역시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다. 15살 때 그의 천재성을 간파한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미켈란젤로를 메디치 저택으로 데려와 머물게 했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예술뿐 아니라 신플라톤 주의 등 철학에 대한 공부도 하게 된다.(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매우 아껴 항상 함께 식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귀빈 응대 등 중요한 일에도 자신의 친자식들과 함께 데리고 다녔다.)

또한, 피렌체 공화정에 대한 자부심도 배우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공화정의 위대한 수호자였기에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피렌체는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공화정 체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군주제를 채택했던 밀라노 등 타 도시국가의 국민들과 피렌체인들의 성향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 역시 공화정을 신봉하고 귀족들보다는 서민들을 지지해왔다. (메디치 가문이 원체 유명하다 보니 가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왕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메디치 가문은 훗날 군주가 되기는 하지만, 그 전까지는 법률적으로 일반 시민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엄청난 부자긴 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겸손했다. 공익을 위해 헌신하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기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메디치 가문을 지지했고, 이를 기반으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외국 군대에 의해 포위된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홀로 적국으로 들어가 담판을 짓고 오기도 했다.)

당시 피렌체는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주변 국가와 로마 교황청은 피렌체를 견제하고 공화정을 전복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각종 음모를 꾸민다. 실제 여러 번의 전쟁도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 시민들을 가장 분노하게 했던 음모는 당시 교황 식스투스 4세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암살을 사주했던 사건이었다.(이 때 로렌초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19번이나 칼에 찔려 숨지게 된다.)

이런 위협 속에서도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는 그들의 공화정을 굳건히 지켜 나간다. 하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과 함께 피렌체는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고, 미켈란젤로도 피렌체를 떠나게 된다.


추방당한 메디치 가문

1492년 43살의 나이로 로렌초가 세상을 떠나자, 메디치 가문을 이어받은 인물은 그의 장남 피에로 데 메디치였다. 피에로는 자신들의 선조에 비하면 정치력이나 인문학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에 겸손하지 못하고 사람을 함부로 대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피에로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원성은 커져갔다.(1494년, 피렌체에 큰 눈이 내렸을 때 미켈란젤로에게 초대형 눈사람이나 만들어 보라고 지시한 일화는 그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공익보다는 개인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던 피에로를 참다 못한 피렌체 시민들은 결국 들고 일어나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서 추방하고, 메디치 저택을 약탈한다. 피렌체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내고, 시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던 메디치 가문이 그들의 덕목을 잃어버리자 순식간에 추락해버린 것이다.

추방된 피에로는 끊임없이 피렌체를 위협했던 로마의 교황에게 의탁하게 되는데, 이것이 피렌체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게 된다. 피에로는 한 술 더 떠 교황의 군대를 빌려 직접 피렌체를 공격하러 오기도 했다. 피렌체의 수호자였던 메디치 가문이 이제는 외세의 힘을 빌어 피렌체를 정복하기 위한 군대의 사령관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피렌체 사람들이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는 극에 달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대단했는데,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복귀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사형을 당할 수 있는 법이 있을 정도였다.)

로렌초가 죽은 다음 몇 년간 피렌체를 떠나있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복귀한 후 혁명정부를 지지한다. 어려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배운 공화정에 대한 신념으로 이제는 메디치 가문의 반대편에 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은혜를 저버린 배신자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메디치 가문에 있으면서 습득한 각종 철학과 지식으로 피렌체의 공화정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공화정의 근간을 유지해주는 메디치 가문이 오히려 공화정을 위협하게 되면서 여기에 반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혁명정부를 위해 다비드를 조각하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오자 피렌체 혁명정부는 그에게 대형 대리석을 맡기고, 이 대리석은 그 유명한 다비드상이 된다. 사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이전에도 베로키오와 도나텔로 등이 만든 여러 다비드상이 있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그 이전 작품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 도나텔로의 다비드상(왼쪽, 가운데), 베로키오의 다비드상(오른쪽). 바르젤로 미술관

 가장 큰 차이점은 사건의 시점이다. 그 이전의 다비드상은 골리앗을 처치하고 난 직후의 순간, 즉 승리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래서 다비드의 발 밑에는 잘린 골리앗의 머리가 놓여있고, 다비드는 승리의 기쁨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승리 직후가 아니라 싸움 직전에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일촉즉발의 순간을 표현했다. 근육은 잔뜩 긴장해 있고, 미간은 잔뜩 찌푸린 채 분노의 눈길을 적에게 보내고 있다. 사건의 시점을 이처럼 싸움 직전으로 잡은 것은 아직 적이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바로 다비드상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향하는 방향으로 알 수 있다. 다비드상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베키오 궁전 앞에서 다비드의 시선은 남쪽을 향하게 된다. 피렌체의 남쪽에는 로마가 있다. 로마는 오랜 세월 동안 피렌체를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주변 도시국가를 움직여 피렌체의 공화정을 위협해왔던 교황청이 있는 곳이다. 거기에다 그곳은 자신들이 축출해 낸, 이제는 공화정의 가장 큰 원수가 된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가 망명한 곳이다. 공화정의 가장 큰 적들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에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전투 직전의 긴장된 모습으로 로마를 노려보고 있게 된 것이다.

▲ 다비드의 시선은 베키오 궁전 앞에서 로마를 향하고 있다.

이렇게 다비드상은 피렌체의 공화정을 위협하는 적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피렌체 정부는 애초에는 다비드상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꼭대기에 설치하려고 했으나 계획을 바꿔 베키오 궁전 앞에 전시한다. 이는 모든 시민들이 가까이에서 다비드상을 보며 피렌체의 적에 대한 분노를 잊지 말게 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공화정에 대한 신념을 다비드상에 담았고, 이는 피렌체 혁명정부의 이해와 맞아 떨어지면서 베키오 궁전 앞에 전시되어 아직도 로마에 살아있는 공화정의 적들을 향해 언제든지 돌팔매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추방 당한 지 18년만에 복귀하게 되고 미켈란젤로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복귀한 메디치 가문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독재체제를 굳혀 스스로 군주가 되기 위한 작업을 하나씩 진행하게 된다.(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공화정의 수호자에서 피렌체 시민들의 증오를 받는 독재자가 되었는지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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