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강구민
▲ 사진 강구민

 

도시의 텍스트들을 읽다

영천은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이다. 그리 유별날 것도, 정감 있는 것도 없는 이 도시는 그나마 ‘걷기 좋은’ 곳인 것만은 분명하다. 금호강이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데 시민들은 둔치를 걷기도 하고 가끔은 샛길로 빠져 보기도 한다. 평소 익숙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펼치는 새로움의 향연. 도시를 걷는다는 행위는 그 유명한 사회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도시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이다. 개발의 논리와 물신주의에 빠져 잃어버리고 있는 이 도시의 텍스트를 발견해 보고자 한다.

첫 행선지는 영천의 과거 원도심 중 하나인 창구동에 있는 ‘백신애길’과 ‘영천문학자료실’로 잡았다.

 

▲ 백신애길 지도를 그린 벽화. 사진 강구민
▲ 백신애길 지도를 그린 벽화. 사진 강구민

 

백신애(白信愛)의 흔적이 숨 쉬는 영천 원도심

백신애(白信愛, 1908~1939년)는 신춘문예 여성 첫 등단 작가이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여러 작품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영천 창구동에서 태어나 건강 문제로 영천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대구신명학교로 전학하였다. 이후 대구사범 강습과를 졸업하고는 영천공립보통학교, 경산자인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때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여자청년동맹(女子靑年同盟) 등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이게 탄로 나 교사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서울 상경 후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했다.

1927년 러시아를 둘러보고 두만강 국경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심하게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입원하여 다음 해 퇴원한 뒤 곧장 고향 영천으로 돌아와 글을 썼다.

 

▲ 사진 강구민
▲ 사진 강구민

1929년 박계화란 필명으로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를 발표해 여성 최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꺼래이」(1934)와 가난하기 그지없는 두 며느리, 특히 맏며느리의 출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매촌댁 늙은이’의 애환을 그린 「적빈(赤貧)」(1934) 등을 남겼으나 계속된 위장병으로 1938년 40여 일간의 상해 여행 이후 6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경북 칠곡 동명에 가족들 옆에 묻혔다.

 

▲ 백신애의 글을 새긴 벽화. 사진 강구민
▲ 백신애의 글을 새긴 벽화. 사진 강구민

 

하근찬으로부터 백무산까지 한 책꽂이에, 영천문학자료실

그간 조명 받지 못한 지역 작가 백신애를 주목하여 한국문학에 이름을 올린 것은 2007년이다. 지역 문인들은 백신애를 기념하는 백신애문학제를 개최하였고 탄생 100주년이던 2008년 ‘백신애기념사업회’를 발족하여 문학 선집을 발간하는 노력을 통해 지역에서의 문학운동을 펼쳐왔다.

그러던 중 2021년 기념사업회원들을 중심으로 여러 문인들이 힘을 합쳐 백신애 생가터에 영천 출신 문학인들의 서적과 사진을 전시한 ‘영천문학자료실’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기념사업회의 사무실이기는 하지만 좀 더 많은 시민과 방문객들이 영천 지역 문학인과 지역 문학에 대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에서 영천문학자료실로 조성되었다.

 

▲ 2021년 백신애 생가터에 영천문학자료실이 문을 열었다. 사진 강구민
▲ 2021년 백신애 생가터에 영천문학자료실이 문을 열었다. 사진 강구민
▲ 영천문학자료실에 전시된 책들. 사진 강구민
▲ 영천문학자료실에 전시된 책들. 사진 강구민

백신애, 왕평, 정희준, 김성칠, 김양헌(평론가) 등 분야를 망라하고 우리나라 문화, 예술, 역사계에 기여한 작고 문인들의 작품들부터, 현재 활동하고 있는 백무산, 서하진, 이중기, 지역 문인 50명 이상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영천문학자료실에서 찾은 99편의 시와 영천 작가들’

최근에는 영천에서 태어났거나 영천에 살고 있는 시인들이 펴내고, ‘영천문학 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시집들을 엮어 시첩을 발간하였다. 160여 권의 시집 중 아흔아홉 편을 추려내어 『영천문학자료실에서 찾은 99편의 시와 영천 작가들』 시첩을 발간하여 지역 학교, 시민들에게 보내 지역 문학을 매개로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단일 문학인이 아닌 수많은 지역 출신 문학인을 조명하는 지역문학관을 조성하기 위한 연구도 추진 중이다.

 

▲ 올해 발간한 책 ‘영천문학자료실에서 찾은 99편의 시와 영천 작가들’. 사진 강구민
▲ 올해 발간한 책 ‘영천문학자료실에서 찾은 99편의 시와 영천 작가들’. 사진 강구민
▲ 작품이 수록된 작가의 이름들. 사진 강구민
▲ 작품이 수록된 작가의 이름들. 사진 강구민

 

문학이 삶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거리를 꿈꾸며

그 외에도 문학 자료실과 백신애기념사업회는 시 낭독 모임, 영천 문학지도 제작, 문학기행 등의 프로그램을 시민들과 준비 중이다.

청년부터 칠십 노인까지 시낭독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모여 저 유명 시인의 유명 시가 아닌 지역 출신 시인의 지역 이야기와 정서가 담긴 시를 낭독하는 것이다. 한편, 문학 작품 속 배경이 된 장소를 지도 위에 표현한 영천 문학지도를 제작하여 도시 속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텍스트를 다시금 되살리려는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연말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하근찬 장편소설 『야호(夜壺)』를 연극으로 만들어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농촌 여성, 일본군 ‘위안부’, 소시민들의 아픔과 애환을 처음 ‘발화’하는 시간도 진중하게 준비 중이다.

 

▲ 소설가 백신애 초상화. 사진 강구민
▲ 소설가 백신애 초상화. 사진 강구민

 

있는 그대로의 지역문학을 느껴보려면 영천으로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운동은 사실 그 힘을 잃고 있다. 그간 문학은 철저히 쓰는 사람 중심의 고도의 정신적 창작활동 중심이었고 문학인들은 문학과 공간(독자, 대중, 시민 등)이 만나는 지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거리감을 좁히는 획기적인 방법은 없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했다.

하지만 영천에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쓰는 사람’으로 살기를 자처했던 백신애의 정신이 백신애길과 영천문학자료실 일대에 남아 지역 문학의 새로운 방식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듯하다. 변화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만나는 공간과 활동의 장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됐다. 투박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지역문학을 느껴보고 싶다면 영천 백신애길과 영천문학자료실을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영천문학자료실 주소 : 경북 영천시 백신애길 28 (창구동 57)

 

 

글 _ 강구민 도시사람콘텐츠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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