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아!”

어머니는 먹다 남은 갈치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말이 문이지 하우스 문짝같이 구멍 뚫린 비닐로 막은 문을 열고 문 옆 밑에 종이를 깔고 갈치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방 건넛방에 갇혀 있었다. 치매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하는 통에 문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문 위쪽과 외벽 사이에 돌쩌귀를 걸어 놓았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길고양이는 야옹거리며 종이를 찢어가며 얼마 되지도 않는 갈치 살덩이를 알뜰하게 먹어치웠다. 특재는 허접하기는커녕 구질구질한 살림살이에 길고양이를 매일 챙기는 어머니가 못마땅했다. 매일 생선을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선 한 토막이라도 먹는 날이면 갈치든 고등어든 어머니는 먹다 남은 생선을 길고양이에게 가져다 바쳤다. 그럴 때마다 남의 집 살림살이를 알 길이 없는 고양이는 깔깔한 혓바닥으로 다 헤지도록 종이를 핥아먹었다. 깔깔한 혓바닥을 갖고 태어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특재는 안쓰럽다가도 미웠다. 동물을 안쓰러워하기엔 인간이 먼저 안쓰러웠다. 귀신같은 손놀림으로 파를 지푸라기로 엮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이제 치매에 걸려 갇혀 있는데 저놈은 무위도식으로 비린내 나는 갈치 부스러기를 핥아먹고 있지 않은가.

“잘 먹는다. 근데 왜 고양이는 비린 것을 저리도 잘 먹어치울까?”

“고양이가 비린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생선에 타우린이 많아서 그래”. 특재가 한마디 거들었다. 사람은 타우린을 몸에서 만들지만 고양이는 그럴 수 없어서 타우린을 먹는다고 들었다. 게다가 타우린이 부족하면 눈이 먼다는 얘기도. “그리고 고양이가 생선만 먹는 건 아냐. 고기도 먹고 오꼬시도 먹어.”

생선만 비리랴. 지금 사는 꼴이 특재에게는 비려도 너무 비리게 느껴졌다. 하지만 비린내 나는 삶을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지방기가 생선 특유의 비린내를 감칠맛 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피비린내까지는 아니더라도 집구석에서 풍겨 나오는 비린내를 특재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 비린내는 지방기가 섞여 감칠맛 나는 생선의 비린내가 아니라 마늘로도 없앨 수 없는 삶의 비린내였다.

“특재 어머니!” 옆집 아줌마가 엄마를 연신 불러댔다. 빗소리를 뚫고 나오는 목소리가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 “왜, 왜! 상순이 엄마”. “특재 어머니가 먹이 주던 그 고양이 있잖아. 아까 보니까 쓰레기 모아 놓은 곳에 손바닥보다 작은 새끼들을 품고 있더라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말야”. 특재 어머니는 혀를 찼다. “비가 며칠 왔으니 못 먹었겠네. 배고프겠다. 새끼들이”. 그날 어머니는 이젠 아예 갈치를 노릇하게 구워 쓰레기 더미 쌓인 곳으로 갔다. 이따금 생선을 얻어먹던 고양이가 사과박스 안에서 아기 손바닥만 한 새끼들을 품을 수 있는 대로 품고 있었다. 비를 흠뻑 맞았는지 머리털 없는 대머리처럼 털들이 갈라져 머리 쪽 살결이 하얗게 드러났다. 갈치 냄새가 빗소리에 뒤섞여 비린내가 더 진동했다. 고양이는 박스가 높은 곳에 쌓여 기어 나오지는 못하면서도 애미를 보고 야옹거렸다. 반갑다는 목소리였으리라. 그날 이후 어머니는 사과 박스를 찾았다. 돌쩌귀를 풀어 문을 열고 아버지 식사를 차려준 후 어머니는 생선이 남으면 새끼를 키우고 있는 박스 안의 고양이를 찾아 나섰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어머니는 쓰레기 쌓인 하치장을 찾았다. 하지만 웬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미가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면 털이 막 나던 새끼들은 박스 안에 올망졸망하게 남아 있어야 했건만 새끼들의 자취가 사라졌다.

나중에 상순이 어머니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저 옆집 담배 가게 주인이 고양이를 다 쓸어갔대. 고양이가 무릎 관절에 좋다면서 삶아 먹으려고 가지고 갔대나 봐. 어머니는 혀를 찼다. “그 비린내 나는 새끼들까지?” 특재 어머니는 박스 안에서 비를 피하던 고양이 새끼들의 조그만 눈망울들이 눈에 선했다. 비린내 나는 생선을 먹어도 여전히 비린내 나던 새끼들을 삶아 먹으려고. 삶은 물에서 비린내 나겠네. 특재는 어머니의 불평 섞인 말을 듣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생이 더 비린가? 슬레이트와 판자로 얼기설기 짠 집과 사과박스 중 어느 생이 더 비린가. 생선의 비린 맛이 고양이에게는 새끼를 키우는 향이었지만 나에게 생은 왜 아직도 이토록 비리기만 한 것인가. 죽은 생선의 비린 맛을 맡으면 희한한 신음 소리를 내며 미친 듯 핥아먹던 고양이가 못마땅했던 특재는 비린 자기 생을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나의 생을 저 새끼 고양이처럼 쓸어갔는가. 누가 나에게 비린내 나는 생선 한 조각이라도 던져 주었는가. 아버지의 방에서도 아버지 식사를 챙기는 어머니의 손에도 비릿한 냄새가 풀풀 풍겨 나왔다.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냄새가, 누구에게는 생명 줄이었을 생선 냄새가, 고양이들이 사라진 후 특재 네 집에서 사라졌다.

 

장편(掌篇)을 썼다. 비린내 나는 삶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오늘은 절기로 대한大寒이다. 대한 끝에 양춘(陽春)이 있다는데, 계묘년이 시작하자마자 양춘은 올 생각을 않고 세상만 위태위태하다. 예전엔 변죽만 울리며 노동탄압하더니 이젠 대놓고 노동탄압에 주휴수당 폐지에 사람들의 삶에 비린내를 퍼붓는다. 고양이도 먹는 갈치를 물가가 비싸져 먹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고양이는 그 맛있다는 츄르도 먹는데.

유구무언의 세상이다.



 

글 _ 이득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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