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을 기르는 데 서툴다. 얼마간의 주기로 화분에 물을 줘야 하는지 모른다. 누군가 화분에 흙을 만져보고 말라 있을 때마다 물을 주라고 했지만, 어제 물을 줬어도 오늘 흙을 만져보면 메마른 것 같았다. 식물은 목이 말라도 말을 하지 못하니, 마지막으로 물을 준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야만 했다. 식물의 생명은 전적으로 내 기억에 달려있다. 정신없는 매일을 보내다 보면 내가 물 주기만을 기다리다 바싹 말라버린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화분은 얼마 남지 않은 잎이 시들하고, 어떤 화분의 잎은 낙엽처럼 손만 대도 바스라 진다. 그제야 불을 끄는 소방관의 심정으로 부랴부랴 물을 부어주지만, 어쩐지 매번 때를 놓친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어떤 조치라도 할 수 있으련만 죽어가는 식물은 그저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물을 붓다 보면 화분 아래로 물이 흘러나온다. 식물이 충분히 마시고 뱉는 건지, 항상 때늦게 물을 준다고 시위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가진 화분은 대부분 받침이 없어서 화분에서 새어 나온 물은 그만의 길을 만들곤 했다. 바닥에 고인 물을 닦아내도 덜 잠긴 수도꼭지처럼 화분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꾸준히 물줄기를 만들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바닥에 닿은 물은 더 이상 화분을 위한 무엇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제 갈 길을 찾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물은 아주 느리게 아주 조금씩 앞으로 옆으로 자기의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물을 닦아 내려 수건을 쥐었던 그날은 물이 어디로 가려는지, 어디까지 나아가려는 건지 잠자코 보고 싶었다.

부고를 들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모욕하는, 연약한 사람들과 평생 함께한 사람이었다. 사진으로 마주하는 그는 온통 웃음 가득 평온한 모습이다. 사진을 찍었던 순간이 아직 이토록 선연한데, 사진 너머의 그는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전화 너머로 통곡의 소리를 들었다. 숨이 차서 꺽꺽 우는 울음.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짐승의 울음 같기도 했다. 떠난 그를 가만히 기억했다. 그는 어두운 바다를 밝히는 등대처럼 우리가 갈 길을 비추곤 했다. 등대는 자신을 향해서는 결코 빛을 보내지 못하고, 항상 혼자 서 있다는 걸 그간 알면서도 몰랐다. 고통을 혼자 간직한 채 영원 속으로 떠나간 고인에 대한 배신감, 미안함, 그리고 죄스러움이 뒤섞였다. 함께 했으나 홀로 떠나도록 내버려 둔 자책감은 등대의 빛을 따라 항해하던 배 안 사람들의 몫이 됐다. 움푹 팬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도 눈가는 축축해졌다. 서서히 메말라 가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그를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시들어가기 시작했던 때가. 최후까지 얼마만큼의 고뇌를 앓았을지, 얼마나 힘겨웠을지 답을 듣지 못할 질문을 곱씹는다. 문득 햇빛을 담은 화분이 눈에 걸린다. 물을 준 게 언제였더라, 하고 서둘러 개수대에서 물을 받아 온다. 화분은 저항 없이 물을 받아 마신다. 마지막으로 물을 주었던 게 언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바짝 메말라 끝내 바스러진 그는 이제 물이 되었다. 끝도 없이 제 길을 만들어내는, 작은 물방울들을 끌어모아 저만의 물길을 만든다. 어디까지 나아가려는 걸까. 어디로 가려는 걸까. 물줄기를 따라 가만가만 시선을 옮긴다. 화분 아래 물이 맺힐 때면 부러 물을 더 부었다. 행여라도 물길이 생기지 않을까 봐. 건조한 히터 바람에 금세 말라 사라질까 봐. 물을 더 부은 덕에 화분 아래에는 촘촘한 방울꽃들이 생겨난다. 방울꽃들은 더 많은 물의 덩이를 만들고 물의 덩이는 곧 작은 물줄기가 되어 나아간다. 옆 화분에서 생겨난 물줄기와 만나 조금 더 커진 물줄기는 새로운 길을 탐색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흘러나온 물을 닦아내지 않는다. 그저 화분에서 시작된 물길과 메말라 죽기 전 물을 듬뿍 머금은 화분을 보며, 조용히 애도할 뿐이다. 한때 화분이 머금었던 물이 조금 더 앞으로 치고 나가길 바라면서.

 

故 임보라 목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