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을 기르는 데 서툴다. 얼마간의 주기로 화분에 물을 줘야 하는지 모른다. 누군가 화분에 흙을 만져보고 말라 있을 때마다 물을 주라고 했지만, 어제 물을 줬어도 오늘 흙을 만져보면 메마른 것 같았다. 식물은 목이 말라도 말을 하지 못하니, 마지막으로 물을 준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야만 했다. 식물의 생명은 전적으로 내 기억에 달려있다. 정신없는 매일을 보내다 보면 내가 물 주기만을 기다리다 바싹 말라버린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화분은 얼마 남지 않은 잎이 시들하고, 어떤 화분의 잎은 낙엽처럼 손만 대도 바스라 진다. 그제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간밤에 다녀간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은 동화책이었다. 지금은 내용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그때 나는 책 모서리가 닳을 만큼 매일 읽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산타 할아버지는 내년에도 또 올 테니까. 다만 한 권이 아니라 전권을 선물해 달라는 내 기도를 그가 들어줄지 걱정이었다.화장실에 갈 때면 꼭 책을 들고 갔다. 책을 다 읽어야만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다행히도 지금껏 ‘항문 외과’를 드나든 적은 없다. 집에는 몇 번씩 완독한 책이 빼곡했고, 읽을 책이 없으면 역사 교과서를 읽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문을 닫은 뒤에도 종종 영업 중이냐는 손님들의 문의가 있었던 터라 낯선 번호가 찍힌 폰 화면을 보며 잠깐 멈칫했다. 매년 OECD 국가 중 노동시간 1, 2위를 다투는 한국에서 모든 노동자에게 일과 쉼의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휴일 없이 매일 디저트를 만들고 책을 읽고 모임을 하는 나는 휴식할 때만큼은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 울려대는 폰을 몇 초간 응시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글쓰기 모임 신청하려고요.”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형님, 왕년에 제 앞에서 여자들이 질질 쌌습니다.”삶을 운동에 온전히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남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언제나 조합원들 앞에서 자본이 노동자를 어떻게 착취하는지, 노동자가 왜 하나로 뭉쳐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이성적인 모습으로 강단 있게 행동하면서도 적절한 때에는 감성에 호소하던 그는 베테랑 활동가였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칭송해 마지않는 훌륭한 활동가의 입에서 여성은 꽤 자주 성적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단순한 ‘농담’이었다.그가
엄마는 늘 깨어있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까지 반찬을 만들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차렸다. 30년 동안 일을 쉰 적이 없었던 엄마의 하루에는 언제나 밥상을 차려야 하는 노동이 있었다.엄마는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와 학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다가 ‘MSG가 가득 들어간 음식을 매일 먹을 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 후 매달 반찬으로 꽉 채운 상자가 자취방으로 배송됐다. 곰팡이가 생겨 반찬을 버릴 때면 엄마에게 전화해 쓸데없이 왜 이렇게 많은 반찬을 보냈느냐고 투덜거렸다.엄마는 나와 냉랭함이 감
나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재로 선발되어 매주 다른 학교 아이들과 함께 경북 과학 영재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일찍 마쳤던 수요일에 추가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늘어놓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는 내 IQ가 147이라는 것을 자주 말했다. 내가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거나 과학전람회에서 국회의원상을 받아오면 일과 가사노동에 지쳐 항상 그늘졌던 엄마의 얼굴이 환해지곤 했다.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뻤다.책 읽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언제부턴가 학교 공부보다 책을 통해 세상을
“아, 잠시만. 손가락은 들어가는데 왜 안 들어가지?”당황하며 허둥대는 H에게 안 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씻지 않은 손가락이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게 싫었고, 싫다고 하는데도 어떻게든 하려는 그가 무서웠다. 첫 섹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린 걸 원한 것도 아니었다.그 무렵 나는 ‘애인=섹스’ 공식을 친구들로부터 들어온 탓에, 약간의 두려움과 묘한 설렘을 품고서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H와의 끈적한 분위기를 상상해 본 적도 없었기에, 그날의 상황이 그의 계획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돌발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한 건 대학 입학 후 첫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다. 누군가 인생의 최악의 시기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그때를 말할 정도로, 그 무렵 나는 매일이 버거웠다. 가족에 대한 불만과 불신, 좋아하는 애와 자꾸 어긋나는 일, 학자금 대출.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고, 탈출구를 찾을 수도 없었다. 나는 정서적으로 무척이나 불안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곧잘 했다. 대개 우울함은 늦은 밤 혼자 있을 때 불쑥 나타났기에 나는 그것을 핑계로 안주도 없이 소주 두 세병을 먹다 잠들곤
대학 때 한 선배가 자신의 애인이 흡연자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함께 있던 남자들은 연신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하며 그 선배를 위로했다. 그들의 손에는 담배가 쥐어져 있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흡연하는 여자를 비난하는 그들을 보며, 당시 나는 그들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는 당연히 흡연하면 안 되고, 만약 흡연을 한다면 숨겨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예능에서는 여성을 흡연자로 몰아가는 행위를 장난이라 얼버무리며 방송하고, 인터넷에는 흡연하는 여성 연예인 리스트가 게시되거나 극 중 여성 배우가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꾸준히 내 나이를 증명해야 했다. 어려 보이면 좋은 거 아니냐고 묻곤 하는데, 상당히 귀찮고 짜증 나는 일에 휘말릴 때가 많다. 담배나 술을 구입해야 할 때면 거의 매번 점원에게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신분증을 놓고 왔을 때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정도는 기분 좋게 넘길 에피소드다. 나는 스트리트 파이터 기질을 갖고 있는데, 특히 중년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주특기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무례함에 대한 응징을 하는 것일 뿐 특별히 중년 남성을 찾아 싸움을
몇 년 전 시중에 유통되는 10여 종의 생리대에서 독성 유해 물질이 검출됐다는 뉴스가 보도된 이후, 생리컵이 생리대 대체재로 떠오르면서 많은 여성이 생리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생리대를 둘러싼 논란 이후 생리컵을 사용해왔다. 내가 생리컵을 사용한다고 말하면, 주위에서 사용 후기를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눈알을 한 바퀴 굴리며 “쩐다!”고 말한다. 또 생리컵을 사용하는 친구들과 함께 ‘이제 절대 생리컵 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생리컵을 찬양하기도 한다.생리컵은 1937년 미국에서 발명되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