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사리를 먹으려면 결심이 필요했다. 잘 씹히지도 않고 쿰쿰한 향이 났다. 흙의 향기 같은 것이 그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코를 막고 대충 씹어서 꿀꺽 삼키는 것이 내가 하교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비고사리라며 조심스럽게 다라이에 넌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하니 우리 집에 자연산 고비고사리가 있다는 것을 이웃에게 들키면 안 되는 모양이다. 아마 나눠줄 수 없을 만큼 넉넉하게 채취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고비고사리를 널어놓은 다라이는 옆집, 앞집,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볕 잘 드는 마당
나는 식물을 기르는 데 서툴다. 얼마간의 주기로 화분에 물을 줘야 하는지 모른다. 누군가 화분에 흙을 만져보고 말라 있을 때마다 물을 주라고 했지만, 어제 물을 줬어도 오늘 흙을 만져보면 메마른 것 같았다. 식물은 목이 말라도 말을 하지 못하니, 마지막으로 물을 준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야만 했다. 식물의 생명은 전적으로 내 기억에 달려있다. 정신없는 매일을 보내다 보면 내가 물 주기만을 기다리다 바싹 말라버린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화분은 얼마 남지 않은 잎이 시들하고, 어떤 화분의 잎은 낙엽처럼 손만 대도 바스라 진다. 그제
아주 특별한 ‘혼인식’의 기억 2022년 9월 중순, 온라인 청첩장이 왔다. 원래도 그랬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핑계 대기 워낙 좋아진 이후로는 거의 모든 경조사를 가지 않던 중이었다. 또 누가 눈치도 없이 귀찮게 하는 거지? 그런 짜증 섞인 반응과 함께 일단 무슨 내용인지 들여다봤다. 9월 24일 혼인식 일정을 전하는 주인공들은 익숙한 이름과 얼굴이었다. 박배일 감독(, , , 등)과 그와 함께 얼마 전부터 갖은 닭살 행각을 더불어 보여줬던 황남임 님이다. 그들은 통상적인 예식장 대신에
집은 햇볕과 물과 바람과 흙과 나무와 쇠로 빚는 연금술이다. 바람길을 따라 창을 내고, 물길을 침범하지 않도록 비켜서고 햇볕이 지나는 길을 따라 앞마당과 뒤란을 내야 한다. 그런 집은 아침이슬에 젖은 지붕과 담벼락을 낮 동안 태양과 바람이 말려주면 곰팡이와 벌레들이 슬지 않는다. 창으로 볕과 바람이 들어와 집 안을 노닐다 가고 나면 하루가 지난다. 저녁엔 산과 내에서 일어난 시원한 바람이 뜨거움을 식혀준다. 물길은 누르고 밟지 않아야 강한 물기운에 가위눌리는 일이 없다. 단단하게 쇠와 나무로 땅에 뿌리를 박고 벽과 지붕은 비와 칼바
“너도 그 뭐 성소수자, 그거냐?” 아빠가 물었다. 마치 밥은 먹었냐고 묻듯이 가볍게. 아빠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베이비부머’ 세대의 60대 남성,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거쳐 국민의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정당을 지지하며 오랫동안 대형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다. 평소 ‘잘 지내고 있냐, 졸업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냐, 미래 계획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로 하던 아빠는 비슷한 뉘앙스로 내가 성소수자인지 물었다. 그때 아빠의 질문과 나의 대답 사이에 흐른 찰나의 순간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직감했다.재작년
1. 잭 런던과 그의 소설 이야기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의 일원이다. , 등 지금은 고전에 반열에 오른 장편 소설과 , 같은 명작 단편을 남겼다. 원래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유년시절 공장에서 일하고 청년기에 금광 붐이 일었던 클론다이크 지역에서 몇 년간 골드러시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후 인기작가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가혹했던 노동환경에 대한 기억은 그의 작품세계 속에 사회개혁과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지난 추석을 맞아 평소에도 이미 만연하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활개를 쳤다. 명절을 늘 따라다니던 가족갈등과 스트레스는 위선적 포장의 내부를 들추는 역할을 해왔는데, 전염병 상황은 이마저도 ‘합법적으로’ 피해 갈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가족에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오랜 전통과 체화된 문화는 지적,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제1원칙이다. 가족이라는 성역 앞에서는 모두가 비슷한 꼴이 된다.사회적 성공을 향한 기나긴 행렬의 구성원들은 각기 다른 몫을 차지하지만,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근본적 이유이자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