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12년 학교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이야기로 말문을 열고 싶다. 좋은 기억이 아니라 악몽 같은 기억의 대상이다. 초등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는데, 얼마나 또 어떻게 안 좋았던 분인지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이 분의 인성과 무관하게 5학년 때 학교생활이 지긋지긋했던 또 다른 요인이 “행진을 죽도록 연습한 것”이다. 

철부지 어린애였지만, 그때 우리가 했던 행진 연습은 지금 신병교육대 수준을 능가했을 것 같다. 행진곡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발을 맞추는 것은 기본이었고(발을 틀리는 학생들에겐 우리 담임선생님이 회초리로 아이들의 엉덩이를 후려치셨다), 가로-세로-대각선의 열까지 맞춰서 행진을 했다. 행진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운동장 트랙의 곡선 구간을 돌 때다. 이때도 옆줄이 틀리지 않게 긴 대나무 장대를 손에 들고 도는 연습을 했다. 맨 안쪽의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가장자리의 아이는 최대한 보폭을 크게 해서 돌면서 정확히 열을 맞춰 도는 훈련을 시켰으니…. 그건 학교가 아니고 교육도 아니었다. 

매캐한 흙먼지를 마시며 죽도록 반복했던 그 지긋지긋한 행진 연습에서 내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한 가지가 있었다. 음악이었다. 행진은 고역 그 자체였지만 음악을 듣는 것이 너무 좋았다. 메들리로 연속으로 이어지는 행진곡들이 하나같이 왜 그리도 멋진지, 나는 지금도 그 시절에 들었던 행진곡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권위 있는 음악 미학자 아도르노의 관점에 따르면, 일정한 리듬과 템포로 일관하는 음악은 선량한 음악이 아니다. 즉, 대중음악이 그렇듯이 행진곡은 좋은 음악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논점을 떠나 그 시절의 행진곡 음악은 내 고달픈 초등학교 5학년 생활에 유일한 낙이었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체육 시간에 줄 맞출 때 ‘앞으로나란히’도 제대로 못 한다. 우리 초등학교 시절보다 천국 같은 학교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또 우리 때와는 다른 삶의 고충이 있을 수 있다. 삶이 힘든 아이들에겐 위로를, 삶에 만족하는 아이들에겐 음악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아이들을 위해, 음악 선물을 주기 위해 내가 주무자가 되어 경상북도 도립교향악단을 초청해서 근사한 공연을 구경시켜줬다. 5학년 학년 부장이란 역할 외에 ‘예술교육’을 담당하고 있는데, 교장선생님과 의기투합하여 이 행사를 유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행사를 추진하면 크고 작은 수고가 많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사업보다 오늘 이 일은 크나큰 보람이 수고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마도 그 기저엔 내 5학년 시절에 음악이 나의 학교살이에 큰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자리할 것만 같다.

 

 

오늘 우리 아이들도 내가 5학년 때 경험했던 음악이 주는 위로와 희열을 만끽했기를 바란다. 오늘 숙제로 ‘도립교향악단 공연에 대한 소회를 학급 밴드에 간단히 남기기’를 냈는데, 몇몇 친구들의 글에선 내가 기대했던 마음이 엿보여서 기쁘다.

끝으로, 오늘 우리 아이들에게 훌륭한 음악선물을 선사해 주신 경상북도 도립교향악단 관계자분들과 뮤지션 분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공연의 수준이 훌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_ 구미 사곡초 교사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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