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같은 국가의 병신년

   삶은 ‘살음’이고 여기서 ‘사람’이란 말이 생겨났다. 삶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삶의 행불행도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로 말미암는다.

   서로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선 ‘주고받는 관계’, 즉 ‘기브 앤 테이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아닌 인간을 오직 인간으로서만 만나는 관계에서는 ‘give and take’가 ‘giving is taking’ 즉,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 되고,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역설이 성립한다. 교사인 사람이나 아이를 낳아 길러본 사람이라면 이 같은 기쁨을 맛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교사나 어미가 아닌 사람도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함에도 우리는 이 역설적 진리를 간과하고 살아간다. 프로이드적으로 말해, 우리 자신에게 내재된 모든 이기심(ego)을 무장해제하고 오직 원초적인 모습으로 상대를 품으며 “나로 인한 너의 기쁨(pleasure), 너로 인한 나의 기쁨”을 아무런 대가없이 공유하는 이 인간적인 관계를 보통 우리는 ‘섹스’라 일컫는다. 성행위에서 우리는 나의 혼신의 노력으로 상대방에게 쾌감(pleasure)을 줄 때 ‘손해 본다’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쾌감은 곧 나의 쾌감이 된다. 이것은 울던 아기를 가슴에 파묻었을 때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모성애의 그것과도 같다.

   성관계(sexual relationship)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형태의 관계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닌 이것은 동시에 가장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관계일 수도 있다. 쾌감의 평등한 나눔이 이루어질 때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축복일 수 있으나, 어느 일방의 쾌감을 위해 폭력이 수반될 때는 한 인간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점에서 악마적 행위가 된다.

     성적 관계가 비인간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매춘과 성폭력이다. 돈을 매개로 하든 흉기를 매개로 하든 쾌감의 공유가 아닌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지는 점에서 강간이긴 매한가지이다. 쾌감(기쁨)의 본질은 아프리카어로 ‘우분투(ubuntu)’이다. 인간이 나누는 어떠한 관계에서도 나의 쾌감은 너의 쾌감을 전제로만 성립한다. 나의 행위가 너의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절대 쾌감을 느낄 수 없다. 그런 쾌감을 ‘사디즘’이라 일컫거늘 이것은 심각한 정신병일 뿐이다. 술을 마셨든 뭐든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강간을 통해 쾌감을 느낄 수 없다. 강간은 아무나 저지르는 게 아니다. 오직 정신병자만이 강간을 통해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쉽게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리는 특수한 상황이 전쟁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불구화시킨다. 이 특수한 실존적 상황 속에선 평소 같으면 가장 잔인한 범죄라 할 ‘살인’도 정당화 아니 권장된다. 살인이 권장되는 상황 속에서 뭐든 못할 게 없다. 살인의 일상화는 강간의 일상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살인의 일상화와 강간의 일상화가 맞물려 돌아가는 기제는 역사상 최악의 식민정복자라 할 일본제국주의가 잘 보여준다. ‘위안부’가 그것이다.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소름끼치는 용어에서 여성이 사람이 아닌 사물로 전락해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에서 죽음의 공포나 죽임의 가책으로부터 병사를 위로하기 위해 사물로 내던져진 실체가 ‘위안부’인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더 많은 살인을 부추기기 위해 더 많이 강간하게 하는 조치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강간의 정치학'이라 일컫겠다.

 

     In 1944, the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report of interviews with 20 Korean comfort women in Burma found that the girls were induced by the offer of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 위키피디어

   이 조치의 실행을 위해 조선인 여성은 강제 혹은 사기의 피해자로 끌려 왔다. 돈 많이 준다고, 집안 부채를 갚을 수 있다고, 일이 어렵지 않다고, 새 세상에서 희망찬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속아서(induced)” 온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한 신천지는 낙원이 아니라 지옥 그 자체였다. 이곳에서 그들이 수행한 일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는 서술하지 않겠다.

   다만, 최근 한일 양국 지도자 간에 오간 ‘기브 앤 테이크’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거래였다. 국가가 사주한 희대의 집단적 강간 범죄에 대해 그 피해자들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는데 그들을 소외시킨 채 양국 지도자간에 뭘 주고받음으로써 가해-피해 관계를 청산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피해자들은 피눈물 흘리는데 양국 지도자가 서로 윈윈 했다며 쾌감을 자랑질 해대는 것을 보며 이건 또 다른 강간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이 세상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의 상처받은 가슴이 치유되길 염원하는 선량한 세계 시민들과 한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두 사디스트 정부가 간통하여 이분들을 또 다시 짓밟았으니 '강간의 정치학'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은 동포의 적극적인 협조로 가능했다.

   병신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병신년의 세상에선 도무지 희망이 안 보인다. 과거에 우리의 누이들이 짐승들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묵은해의 끝자락에 그 후손을 대표하는 자가 누이들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가해자의 대리인에게 합의해주고 새해를 맞이했다. 여기에 아무런 울분을 못 느끼며 ‘희망찬 새해’ 운운하면 그건 병신을 넘어 집단적 정신병이다.

   삶은 관계이고 행복의 본질은 연대적 행복(우분투)이라 했다. 병신 같은 국가에 태어나 비극의 심연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고 오늘 내일 죽음을 기다리는 우리의 누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는데 같은 동포가 돼서 ‘새해 복 많이’를 말할 수 없다. 병신년의 세상에 맞이하는 이 보다 더 우울한 새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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