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장에 적힌 죄명은 '강제추행'이었다.

형사합의부에 국선을 배정받고 가장 많이 접한 죄명이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다만, 강제추행죄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피고인도 할 말이 많은 사건이기 때문에 진실게임으로 흐르는 경향이 많아 국선으로 맡기에 그리 달가운 사건은 아니다.

이 사건의 피고인 A군은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피해자는 여중생 4명이었다. 범행사실은 간결했다. A군은 버스에서 여중생의 빈 옆자리에 앉아 허벅지를 쓰다듬는 방법으로 강제 추행했다.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여러 명에게 같은 수법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니 범행을 부인할 여지는 딱히 없어 보였다. 사건의 진행 방향도 명확했다.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합의한 뒤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

며칠 뒤 A군이 부모와 함께 사무실을 방문했다. 나의 상상과 달리 A군은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무척 소심해 보였다. A군의 아버지가 말하길, A군은 군입대 직후에 뇌수막염이 발병하였고 군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뇌기능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A군은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심리적 불안을 겪고 있으며, 지능지수도 정신지체 수준에 가깝다는 것이다. A군의 부모는 부모는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학에 보냈는데 통학하는 버스에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형사사건에서 피해자의 연락처를 알지 못하거나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합의 의사가 없다는 의사표시를 한 경우 합의가 불가능하다. 성범죄의 경우에는 피해자 국선변호인이 선정되어 있다면 피해자 변호인을 통해서 합의를 진행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범행 정도가 중하지 않아서인지 피해자 국선변호인이 선정되지 않았다. 첫 공판기일에 재판부에 피고인의 사정을 설명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합의 의사 확인을 부탁하였으나, 몇몇 피해자들과는 연락이 되지 않고 몇몇 피해자들은 합의 의사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 수 없으니 공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A군의 부모는 어떻게든 피해자들과 합의하기를 원했다. 나는 합의도 공탁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범행 내용이 경미하고 A군이 심신 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범행이니 실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결국 이 사건은 합의를 하지 못한 채 변론이 종결되었다.

선고를 며칠 앞두고, A군과 A군의 부모가 다시 사무실을 찾아왔다. A군의 부모는 피해자들에게 배상해 줄 수 없다면 합의금으로 마련해 놓은 돈(A군의 명의로 부어 놓은 적금이었다)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 '합의하지 않아도 실형이 나오지 않으니 걱정 마시라'라고 말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피해자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하기 위해 합의를 하고자 했던 A군과 그 부모의 마음을, 내가 그저 감형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A군의 부모는 장애인복지시설에 400만 원을 기부하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A군의 기부는 국선변호를 하면서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합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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