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교원대 대학원 다닐 때의 일이다.

자가 운전을 하지 않던 때라 충북 청원군에 있는 학교로 가기 위해 조치원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구에서 조치원까지 2시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책을 읽으며 가는 것은 나의 평범한 일상사지만, 그 날은 특별히 전공과목 원서를 읽고 있었다.

내 옆에는 중년 부인 두 분이 앉아 계셨는데 이따금씩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중 한 분은 수레에 먹거리를 실고 판매하는 승무원이 지나가자 삶은 달걀을 사서 내게 건네주기까지 하셨는데, 나는 이 분이 내게 품으시는 특별한 호의의 배경이 대충 읽혔다. 나는 호의에 감사 인사를 드리며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다시 열공 모드로 돌아갔다. 뒷좌석에선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내 귀에 별로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건만 그 분은 “몰상식한 여자들이 학생 공부 방해한다.”며 내가 민망할 정도로 불쾌감을 드러내셨다.

이 아주머니가 내게 보인 호의의 절정은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었을 무렵에 나타났는데, 지나가는 행상으로부터 유부초밥 도시락을 사서 내게 건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처음 보는 내게 이렇듯 파격적인 호의를 표명하는 이유를 해명하는 즉, “영어 원서로 공부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못하지만 혹 이 글을 읽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계시면, 나와 똑 같은 상황을 연출했을 때 유부초밥이 건네지는지 문화인류학적 실험을 해보셨으면 한다. 하긴, 요즘 열차에서 행상이 없으니 도시락은 원천적으로 기대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뒤에서 수다 떠는 아주머니들을 향해 레이저 광선이 발사되는 모습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내가 그 때 그 아주머니의 나이 쯤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한적한 시간대의 커피숍에서 그 때 내 나이와 비슷한 청년이 열공 하는 모습을 보았다. 청년의 손엔 원서는 아니지만 토익 책이 들려 있었다. 책에 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청년이 가상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

가치문제는 구체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책 든 손이 아름답다 할 때, 어떤 책이 들려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인문학 책과 자기개발서, 셰익스피어와 토익책 든 손에 대한 가치 판단이 같을 수 없다. 가치문제를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할 때, “구체적으로”라 함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라는 말과도 같다. 열공 하는 자체가 아름다울 수는 없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열공 하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사회에서 열공 학도의 표상이라 할 고시생을 생각해 보자.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고졸 출신의 노무현이나 고문 검사 고영주 둘 다 열공 해서 사법고시를 패스한 뒤 변호사와 검사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내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수시로 말하는 바이지만, 책가방 끈 짧은 농부나 공사판의 인부가 이 나라를 안 망친다. 공부 잘 해서 요직에 앉은 인간들이 이 나라를 망친다. 열공 그 자체가 아름다운 행위가 아닌 결정적인 이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기차 안에서 영어원서 읽는 게 남에게 감동을 줄 만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자체가 감동적일 순 없다. 청년이 자기 입신을 위해 열공 하는 것이 처녀가 몸매 가꾸기 위해 헬쓰장에서 러닝머신 열심히 뛰는 것과 뭐가 다를까? 노동시장 혹은 결혼시장에서 자기 상품가치 높이려는 노력일 뿐이라는 점에서 둘의 차이는 없다.

우리가 한 사람의 행동에서 감동을 느낄 때는 그가 자기 자신보다는 이웃의 이익을 위해 헌신할 때이다. 그러한 이타정신을 요즘 청년들에게서 잘 볼 수 없는 세태가 유감이지만, 우리가 그들을 탓할 순 없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팍팍한 세상은 우리가 물려준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가끔씩 카페에서 토익 책이 아닌 철학 서적 펼쳐 놓고 탐독하는 청년들을 만나면 유부초밥 아니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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