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혁신의 차이

‘진보적인 음악이야기’라는 화두로 일련의 글들을 써오고 있다. 통진당 이후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일고 있듯이, 진보의 본질을 감히 말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가 뭔지는 몰라도 진보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진보는 낮은 곳에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핍박받는 이웃의 고통에 무심하면서 어찌 진보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 글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눌리고 그늘진 곳으로 감옥을 이야기하였다.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특별한 공간이 감옥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감옥은 비단 교도소에만 있지는 않다. 고3교실에 밤늦도록 불 밝혀진 학교를 지나칠 때나 첫 휴가 나온 사병이 귀대를 앞두고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든다. 넓게 보면 이 거대한 사회 시스템 자체가 하나의 감옥인 지도 모른다. 이러한 발상에 터하여 1950년대의 보수적인 미국사회, 메카시즘으로 이성의 자유를 억압당한 폐쇄적 자본주의 미국사회를 묘사한 영화가 있다. 개리 로스 Gary Ross 감독에 토비 맥과이어와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플레전트빌 pleasantville>, 50년대 미국의 정치적·문화적 맥락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갖춰져 있으면 흥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괜찮은 영화다.

 

 


□ 스토리라인

주인공 데이빗(Tobey Maguire 분)은 그 또래에 흔한 여자 친구 하나 없이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고교생이다. 그에게 유일한 낙은 1950년대 복고풍의 TV 가족드라마 <플레전트빌>을 시청하는 것. 오빠와 달리 성적 욕망 추구에 적극적인 당돌한 소녀 제니퍼(Reese Witherspoon 분)는 학교에서 찍어둔 잘 생긴 남학생을 집에 초대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소년과 TV를 보면서 달콤한 데이트를 가질 심사였다. 그런데 마침 그 날은 오빠가 죽고 사는 <플레전트빌>이 방영되는 시간인지라 남매는 서로 TV 시청권을 다투다가 리모컨을 망가뜨린다. 그 때 마침 집밖에 서있던 늙은 TV 수리공이 두 남매의 고민을 풀어주는 해결사를 자청하면서 리모컨을 고쳐준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던가? 남매는 이 기이한 노신사의 권고대로 TV 속에 빠져 들어가 ‘플레전트빌’에 떨어진다. 이들은 드라마 <플레전트빌>에 나오는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때는 흑백TV 시절이어서 그곳에선 모든 것이 흑백으로 묘사되는데, 90년대로부터 원치 않은 시간여행을 한 이들에게 그곳의 삶은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미래에서 날아든 이들 남매는 폐쇄적인 마을의 구성원들은 알 까닭이 없는 선견지명을 발휘해 그 사회에서 모종의 혁신을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차츰 플레전트빌에서의 삶에 흥미와 애착을 갖게 된다. 플레전트빌을 이끌어가는 보수적 남성 지도층의 입장에선 이 두 사람이 위험한 파괴분자이지만, 자유와 변화를 추구하는 다수의 마을사람들에게는 혁명가와도 같았다. 이들이 나타나고 나서 마을사람들의 삶은 흑백에서 컬러풀하게 변해간다. 그러나 보수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가부장 세력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다.

 

 


□ 플레전트빌, 유쾌한 사회인가?

pleasant와 village의 합성어인 ‘플레전트빌’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즐거운 마을이다. 단, 그 즐거움은 폐쇄적인 그곳의 룰을 지킬 때만 유지된다. 학교 지리 수업시간에 제니퍼는 “플레전트빌 바깥에는 뭐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교사나 동료학생들로부터 싸늘한 반응이 돌아온다. 사람들의 머릿속엔 ‘플레전트빌 바깥’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형적으로 이 마을은 원형 구조로 이루어져 아무리 차를 몰고 멀리 나아가도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길이 그러하듯 이곳의 일상 또한 시계바늘처럼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점에서 플레전트빌은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와 유사하다. 플라톤의 명저 <국가, the Republic>에 따르면, 국가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모든 것이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질서와 규칙 따위를 강요하게 되는데, 플라톤은 시인을 가장 위험한 존재로 보았다. 시인은 불필요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인간의 영혼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가 시인을 통제해야 하며 순치되길 거부하는 시인은 추방돼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개념이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마을의 행복이 마을 사람들의 ‘상상의 나래’에 족쇄를 채움으로써 유지되는 플레전트빌은 ‘죽은 시인의 사회’다.

 

 


□ 유쾌한 것과 자유로운 것의 사이

정상적인 인간세상과 달리 플레전트빌에는 불과 비,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고 도서관의 책들은 모두 표지에 제목만 적혀 있을 뿐 속 내용은 텅 비어 있다. 불은 욕망을, 비는 카타르시스를, 무지개는 컬러풀한 삶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상징하며, 책 내용이 빈 것은 사람들의 지적 욕구와 이성적 판단의 금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활약으로 이 모든 것에 변화가 일어난다. 스캔들메이커이자 연애박사인 제니퍼는 키스조차 할 줄 모르는 마을사람들에게 사랑과 섹스의 욕망을 전파하고, 데이빗은 자신이 읽은 책 내용을 기억해냄으로써 도서관의 책들에 내용이 살아나게 한다. 이제 플레전트빌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이성과 감성이 채워지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이성과 감성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기 시작한다. 장르상 이 영화는 판타지fantasy이다.

판타지의 절정을 이루는 한 장면은 성과 관련된 것이어서 언급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정작 영화에선 너무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싱글침대에서 따로 잠자리에 드는 플레전트빌 부부에겐 섹스의 개념이 없다. 그러면 자식은 어떻게 만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마시라, 판타지다! 정숙한 중년의 베티 파커는 연애박사 딸 제니퍼에게서 남편의 협조 없이 혼자서도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방법을 배우고선 그날 밤 실습을 감행한다. 그동안 닫혀 있었던 여인의 욕망에 봇물이 터지면서 뜰 앞 정원수가 불길에 휩싸여 타오른다. 화면에서는 불꽃이 폭발하지만 보는 관객의 입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온다. 계속해서 우스운 광경이 이어지는데, 데이빗이 소방서에 가서 화재신고를 하여 불을 진화하게 한 공로로 모범시민 상을 받는 것이다. 플레전트빌 사람들은 ‘불’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발생한 화재사건에서 소방서 사람들조차 소방도구 사용법을 모르고 있었는데 데이빗의 도움으로 불을 끄게 된 것이다.

 

 


데이빗이 ‘연인의 호수’에서 첫 데이트를 나눌 때 여친이 데이빗에게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서 데이빗에게 건네는 장면이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구약성서 창세기의 패러디이다. 주어진 시스템대로만 움직이면 모든 것이 즐거운 ‘플레전트빌’이라는 이름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는 순간 마을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갖게 되고 또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무릇 인간 세상에서 자유는 절대로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 보수의 역공

Honey, I’m home!

귀가할 때 파커씨가 습관처럼 내뱉는 한마디 “여보, 나 왔어”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파커 여사는 '주인님'을 맞이하러 나오고, 식탁엔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안사람도 없고 식탁에 음식도 차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바깥엔 플레전트빌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마누라는 밥도 안 차려 놓은 채 사라지고 없으니 세상말세다! 비에 젖고 허탈한 마음에도 젖어 파커씨는 볼링장으로 향한다. 플레전트빌을 움직이는 남정네들이 퇴근 후 여가시간을 즐기는 곳이다. 파커가 자신이 겪은 신세 한탄을 늘어놓자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네오는데, 개중에는 파커보다 더 심한 불상사를 겪은 남성이 있었다. 파커의 참혹한 경험담에 이어 그 남자가 다리미 자국이 난 와이셔츠에 시선이 모아지면서 밥쟁이들의 반란에 대한 남성들의 공분은 극에 달한다. ‘유쾌한 마을’을 지키고 가부장적 권위를 되찾기 위해 보수들이 결집하자는 뜻으로 모두들 ‘다함께(together)!’를 외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금지된다. 흑백의 색채밖에 모르는 플레전트빌에서 가장 갑갑한 사람은 화가일 것이다. 데이빗이 일 하는 햄버거 가게 주인 빌은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날 자신이 그린 그림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온 베티 파커는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두 사람은 난생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보수들이 결집하며 ‘투게더’를 외칠 때, 베티는 빌의 품에 안겨 사랑의 포만감에 젖어 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를 용감하게 세상에 알리려는 듯이 햄버거 가게 창문을 베티의 누드 그림으로 도배하는데, 보수들이 첫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당연히 빌의 가게였다. 창문에 그려진 베티의 적나라한 누드화를 향해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를 신호탄으로 폭도들은 빌의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도서관에 있는 책을 불사르는 야만행위를 펼쳐간다.
 

 


이러한 반달리즘과 함께 보수를 상징하는 또 다른 한 축은 마을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에 족쇄를 채우는 ‘행동강령’이었으니 가히 매카시즘의 아류라 하겠다. 보수대결집의 구심점인 시장은 유쾌하기만(pleasant) 하던 마을에 최근 불쾌한(unpleasant)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멘트로 운을 띄운 뒤 참으로 단순명쾌한 해법을 제시 한다. pleasant한 것으로부터 unpleasant한 것을 분리해내자는 것이다. 이 단순한 근거로 제정되고 유포되는 행동강령은 더욱 단순무식하다. 청년들에게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연인들의 호수’와 도서관을 폐쇄하고 대중들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의 목록을 지정해주고선 그 외의 음악은 모두 플레전트한 음악이 아니므로 금지한다는 것이다.
 

 


□ 음악

종합예술로서 영화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나 헨리 맨시니 같은 영화음악 작곡자들이 만든 음악들은 영화를 빛낼 뿐더러 영화보다 더 유명한 경우도 있다. 또한 영화를 위해 창작한 음악이 아닌 기성곡을 영화 속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적절히 배치하여 극적 효과를 고조시킬 수 있기에, 음악이 없는 영화는 생각할 수도 없다. 영화의 서사구조와 음악이 갖는 이 유기적 관계 때문에,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음악에 대한 이해력이 요청된다 하겠다. 영화 <플레전트빌>에서도 음악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음악을 알면 이 영화를 보다 플레전트하게 음미할 수 있다.


# 페리 코모와 수자
보수집권세력이 작성한 행동강령 가운데 허용되는 음악의 목록 속에 페리 코모와 수자라는 뮤지션의 이름이 언급된다. 페리 코모(Perry Como:1912~2001)는 1950~1960년대 이지리스닝 계열의 노래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가수로서 그의 음악성은 백인중산층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다. 당대 미국의 국민가수 페리 코모의 힛트곡 [And I love you so], [Handy man] 등은 우리나라 팝송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 순자(荀子)가 있다면 미국엔 수자가 있다. 수자(John Phillip Sousa:1854~1932)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미국적인 뮤지션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서부개척시대에 인디언을 몰살시키고 ‘약속의 땅’을 건설한 일등공신 미기병대를 계승한 것이 세계최강의 군대 미 육군이다. 수자는 20세기초 해병대 악단장으로서 미육군의 진취적인 기상과 애국심을 반영하는 많은 행진곡을 작곡하였다. 미해병대 전용 행진곡인 [셈페 피델리스]를 비롯하여 [워싱턴 포스트]나 [성조기여 영원하라] 등의 주옥같은 많은 행진곡 음악을 작곡한 까닭에 수자는 ‘미국 행진곡의 왕’으로 불린다. 금관악기로서 튜바를 개조하여 마칭밴드에서만 사용하도록 만든 수자폰이 수자의 발명품이다.


# 로큰롤
보수파들이 권고하는 페리 코모나 수자의 음악이 미국적 가치와 당대 보수백인중산층 기호와 정서에 부합하는 음악들이라면, 그 안티테제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혁신파들이 선호하는 음악이 로큰롤이다.
이 영화에서 배경음악으로 맨 먼저 등장하는 곡은 진 빈센트Gene Vincent의 <Be Bop a Lula>이다. “Be bop a lula she’s my baby~”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서 ‘비밥빠 룰라’라는 구음을 유행시킨 이 노래는 팝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음악이다. 장르상 이 노래는 로커빌리rockabilly에 해당하는데 로커빌리는 나중에 로큰롤rock ‘n’ roll로 발전한다.

 

 


‘rock and roll’이란 말 자체가 남녀의 성행위를 연상하는 개념으로 탄생했다. 그러니까 메카시즘을 필두로 한 보수기의 미국사회에서 로큰롤은 섹스의 자유를 추구하는 성의 혁명이었고,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를 향해 펼치는 반항을 의미하는 카운터 컬처(반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로큰롤의 세례를 받은 청년들은 2차세계대전이 낳은 베이비붐 시대의 세대인데, 로큰롤은 전쟁세대와 전후세대 그리고 보수와 혁신의 갈등의 기폭제가 되었다. 플레전트빌 극우보수세력의 폭동 뒤 혁신파들이 은신처로 삼은 곳에서 운 좋게 파괴되지 않고 남은 쥬크박스가 발견된다. 청년들이 플러그를 연결하자 쥬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버디 홀리Buddy Holly의 [Rave on]은 1950년대의 전형적인 로큰롤 음악이다. 청년들은 용감하게 행동강령을 어기며 흥겨운 로큰롤 리듬을 즐긴다.


# 1950년대의 재즈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가장 미국적인 영화”라 한다. 가장 미국적인 무엇을 논함에 있어 ‘재즈’를 빠뜨릴 수 없다. 미국이 만든 위대한 음악 재즈가 딴따라의 성격을 벗어나 훌륭한 예술장르로 부상한 것은 1940년대의 비밥(bebop) 시기부터였다. 그 뒤 1950년대에 와서 화끈하고 격정적인 비밥은 쿨하고 소프트한 쿨 재즈로 대치된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50년대는 동해안에서 번성한 쿨 재즈와 경쟁을 이루며 서해안에서 하드밥이 발달해갔는가 하면, 마일즈 데이비스가 창안한 모덜 재즈modal jazz로 인해 재즈의 예술성이 찬란한 꽃을 피우던 재즈음악의 전성기였다.

 

 


이 영화에서는 1959년에 나란히 쿨재즈와 모덜재즈의 진수로 탄생한 기념비적인 두 앨범 속에 수록된 명곡이 등장한다.
쿨 재즈를 대표하는 명곡 <Take 5>는 햄버그 가게에 많은 청년들이 모여 데이빗이 오기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흘러나온다. 화재사건 이후 데이빗은 플레전트빌의 영웅이 되었는데, 청년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그가 불을 알고 있었던가 하는 점이었다. 그로부터 청년들은 “플레전트빌 밖에 뭐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 천착해 간다. 예전에 제니퍼가 지리수업 시간에 물었을 때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던 그 질문이다. 이제 청년들은 플레전트빌 바깥에도 자신들이 모르는 세계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의문을 가지면서 인식론의 확장과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의 시작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절대적 사고에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되는 법이다. 이 맥락에서 혁명의 서곡으로 상징되는 음악으로 재즈의 혁신성이 빛나는 [Take Five]를 배치한 것은 자연스럽다. ‘Take five’란 말은 ‘5분간 휴식시간을 갖자’라는 뜻이지만 이 곡의 박자수가 5/4인 점에서 ‘5박자를 취하자’라는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지금까지 음악가들이 만든 대부분의 곡들이 2박자, 3박자, 4박자, 6박자였던 점에서 [Take 5]는 박자수 개념에 일대혁신을 일으키는 공헌을 하였다. 앨범명 ‘Time Out’ 또한 박자(time)의 고정관념을 탈피하자(out)는 모토를 표방한 것이다. 이 앨범의 주역 데이브 브루벡 Dave Brubeck은 현대음악가 다리우스 미요 Darius Milhaud의 제자이다. 미요는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변박”을 필생의 음악 화두로 내건 인물이었다.

 

 


“플레전트빌 밖에 뭐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모두들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데이빗이 마침내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빙빙 돌며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뻗은 길이 있다.”

“끝없이 뻗은 길?”, “끝없이 뻗기만 하다고?” 청년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한 학생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거대한 미시시피강처럼 쭉 뻗어 있단 말이지?” 라고 말하며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꺼내 보인다. 도서관에 있는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의 일부분엔 글자가 적혀 있다. 제니퍼가 어릴 적 읽은 기억을 더듬어 회상해낸 내용까지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들이 제니퍼보다 똑똑한 데이빗은 내용을 다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지?”라는 질문을 또 던져온다. “So how does it end?”라는 질문과 동시에 마일즈 데이비스의 [So What?]이 흘러나온다. 인종주의가 지배하던 미국사회에서 피부색을 초월한 아이들의 끈끈한 우정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마크 트웨인의 작품들은 한때 백인사회에서 금기시되기도 했다. 백인 음악가 데이브 브루벡의 음악과 흑인 음악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이 나란히 사이좋게 흘러나오는 것이 우연인지는 몰라도 허클베리 핀이 탄생한 문화사적 맥락과 잘 어울린다.


# 비틀즈

 

 


이 영화에서 마지막 음악은 비틀즈가 장식한다. 엔딩신에서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가 여가수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파커씨 부부가 화사한 꽃밭 속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남편이 묻고 아내가 대답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모르겠어요? 당신 생각은요?”
“나도 모르겠어요."

이때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라는 노랫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처음엔 다소 심각하게 질문을 주고받다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우리 모두가 모르지만 “그 무엇도 나의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는 무언의 일치를 확인한 가운데 등장인물들이 활짝 웃으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린다.

 

 


비틀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유명하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부와 명예를 한 몸에 누리던 비틀즈가 돌연 인도로 수행의 길을 떠난 적이 있었다. [Across the Universe]는 이때 만든 곡으로서 가사나 음악에서 몽환적인 분위기와 신비주의의 색채가 물씬 풍긴다. “저 광활한 우주 너머(cross the universe)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말은 이 영화에서 일관되게 던져지는 물음 “플레전트빌 바깥엔 무엇이 있을까?”를 연상케 한다.


□ 맺는말) 보수와 혁신의 사이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를 지키려 하는 입장이 ‘보수’이고 반대로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입장이 ‘혁신’ 또는 ‘진보’다. 보수가 꼭 나쁘거나 반대로 혁신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변화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는데 섣부른 개혁을 주장하는 혁신파나 기존 시스템이 사회발전을 저지하고 있는데도 언제까지나 수구적 자세로만 일관하는 보수파 둘 다 문제가 있다.

마리 안통하네뜨와 수구정당에 반감을 품는 점에서 필자는 혁신파를 지지한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시절에 ‘금지곡’이란 족쇄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플레전트빌의 행동강령에 한숨짓는 청년들의 비애에 공감한다. 로큰롤에서 히피이즘으로 이어지는 당대의 혁신적이고 반항적인 미국청년문화에 갈채를 보낸다.

반면, 대학가에서 공동체문화와 데모가 실종되고 그 자리에 들어선 명품추구니 스펙 쌓기니 하는 개인주의적이고 감각적인 문화에 매몰되어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청년문화에 적잖은 반감을 품는 점에서 필자는 보수주의자이다. 우리 시절에는 데모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건만 요즘 대학생들은 소녀시대 공연장에서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경찰에 잡혀 간다고 하니 세상말세다! 록음악이나 재즈에는 귀를 닫고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의 댄스 음악에 집착하는 청년들이 한심하다고 느낀다면 이런 내 모습이 플레전트빌의 당권파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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