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이어 7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을 봤다. 설 연휴를 맞아 극장 한 프로 땡기고픈 마음에서 인터넷 극장가를 서핑하던 중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세간의 평이 너무 형편없어서(평점이 3점대였다) 잠깐 망설임이 일었지만 음악영화이고 하니 무조건 보고 싶었다. 내심 괜찮은 영화로 보이는데 대중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이 영화 너무 괜찮다. 작품성 면에서 국제시장보다 뛰어난 수작으로 평하고 싶다. 영화는 음악잡지사 여기자가 가수 이장희씨를 찾아 인터뷰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장희는 70년대를 풍미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쎄시봉의 전설을 있게 한 주역이기도 하다. 기자는 모종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은퇴
박창진 대한항공 사무장, 정말 멋있는 남자다.저렇게 자존감이 강한 남자가 연산군처럼 포악한 여군주 앞에 무릎을 꿇고 수난을 당할 때 그 비참함의 정도가 충분히 그려진다. 사람은 자존감이 강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 하지만 인간에게 돈보다 심지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예다.십상시들, 사람 잘 못 봤다박창진 사무장이 국토교통부에서 첫 조사를 받은 지난 8일, 조사 1시간 뒤 대한항공 임원이 박 씨를 불렀습니다. 이 임원은 국토부측이 승무원들이 작성해 제출한 사실관계 확인서가 국토부의 시간대별 항공기 동선이나 내부 상황 관련 자료와 맞지 않는다며 다시 써줄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확인서를 다시 쓰는 일이 10차례 이상 반복됐습니다. - KBS1 뉴스 -
교사의 삶은 가르침을 떠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교육하는 삶의 행복은 무엇보다 이 가르치는 일에서 생겨납니다. 일찍이 맹자도 군자의 세 가지 낙 가운데 하나가 가르침에 있다고 말씀하셨죠.우리는 보통 가르침과 배움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은 배움과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을 이룹니다. 교사의 본분인 수업은 교수와 학습의 상호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수업지도안을 ‘교수-학습 계획안’이라 일컫는 것이죠.‘교수학습 과정안’이라고도 부르는 이 계획서는 교수활동은 교사의 몫으로 학습활동은 학생의 몫으로 칼같이 구분하여 나타내는데, 나는 수업설계도에 함축된 이러한 기계적 사고에 우려를 품습니다. 수업의 과정 속에서 교사는 가르치기만 하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 교육학 책들을 살피면서 가장 흥미있게 읽었던 대목 중의 하나가 ‘자기충족예언’입니다. 자기충족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은 사회학자 머톤(Merton, R.)이 개발한 이론으로, 정상적이라면 이루어지기 힘든 어떤 일이 행위자의 강력한 믿음에 힘입어 그 믿음과 행동 사이에 긍정적인 피드백이 일어나 마침내 그것이 실현되는 현상을 말합니다.“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이 이것과 관계있습니다. 머톤 이후 사회심리학에서 자기충족예언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었습니다. 권위 있는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의 고민을 해소하여 병을 낫게 한다는 플레시보 효과(placebo effect)가 대표적인 것이죠.교육학에서 자기충족예언은 ‘피그말리온 효
교직의 가장 큰 매력은 방학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교사인 사람 외에 이렇게 긴 휴가 기간을 갖는 직업인은 잘 없을 겁니다. 대통령도 못 누리는 호사가 교사의 방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방학은 학생을 위한 방학이지 교사를 위한 방학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생이든 교사든 일반인이든 사람은 '휴가'를 통해 의미있는 변화와 성장을 꾀할 수 있다는 논거로 '비움과 채움'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방학’은 영어로 ‘vacation'인데, 라틴어로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하는 '바카티오(vacatio)'에 그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유사 어원으로 라틴어 'vacuus'는 ‘텅 비우다’란 의미인데, 이로부터 파생된 단어가 vacant(텅 빈)나 vacuum(진공)입니다.
교사에게 ‘권위’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가 자칫 권위주의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에 교사는 자신의 교육실천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권위주의를 피하면서 권위를 지켜야 하는데, 이는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권위적이어야 한다는 뜻으로서 일종의 모순어법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어법은 형식논리상의 모순일 뿐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어떤 묘한 역설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절묘한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합적 관점’이 요구됩니다.모든 사물은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 심오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 놓인 컵 하나를 봐도 빛이 들어오는 쪽은 밝고 반대쪽은 어두운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알
예부터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했습니다. 그만큼 선생 노릇하기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되다는 뜻이겠죠. 제 초임 때와 달리 지금은 학교교육 여건이 여러모로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이 말이 유효한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이삼십년 전에 비해 현재 교사의 사회적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교육환경도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종합해볼 때 교직생활이 예전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말하겠습니다. 해마다 명예퇴임을 하는 교사가 늘고 있는 통계치가 이를 잘 설명해줍니다.어떤 상황이 교사를 힘들게 할까요?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저는 간명하게 딱 두 가지 상황으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하고자 하는 일이
지구온난화의 주된 원인제공자는 부자들이지만, 그 피해를 입는 쪽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우리 생활에서 이러한 사례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에어컨입니다. 어린 시절에 에어컨을 처음 접했을 때 두 가지 측면에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저렇게 시원한 공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어컨 실외기에서 엄청나게 뜨거운 공기가 빠져 나오는 것을 알고선 문명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을 실감하였습니다. 이 문명의 이기로 인해 혜택을 입는 쪽과 피해를 입는 쪽이 철저히 “계급적으로” 운명 지어지는 이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봤으면 합니다.2010년 내 나이 마흔 일곱에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나설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국 미시건대학(MSU)에서 4주간 영어연수를 받았는데, 과정
지난 글에서 ‘life guidance’의 본질적 의미가 우리 교육현장에서 왜곡되어 그릇된 방향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논했습니다. ‘삶의 안내’든 ‘생활 지도’든 그것이 복도에서 뛰지 못하게 하고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는 형태는 교육이라 일컬을 수 없다 했습니다.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학교 일상 속에서 “교사가 학생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습니다. 이게 교육학개론에서 다루는 ‘교사론’의 핵심 내용인데, 보통 ‘학급경영’이라는 주제로 논의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생활지도’라는 영역은 이와 무관합니다. “복도에서 사뿐사뿐”이나 학생 두발 단속 따위의 문제를 다루는 교육학이론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교육학서적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훈육적 조치를 생활지도라는 이름으로
교육실천 과정에서 교사는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수많은 악동을 만납니다. 교사의 삶은 아이들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데, 교직이 힘들다 하는 것은 아이들과 부대끼는 것이 힘들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교육의 본질은 사랑이지만, 교사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나 사랑의 그릇은 무한하지 않아서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모든 아이들을 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사랑하기보다는 덜 미워하는” 우회적인 형식을 취하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교사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는 아이는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교사를 힘들게 하는 아이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를 힘 빠지게 하는 아이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흔히 ‘말썽쟁이’라 일컫는 부류인데 이런 아이들은 교사뿐만 아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학습노동량이란 측면에서 한국은 단연 으뜸입니다. 그 결과 한국학생은 성적은 최상이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는 최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행복수치가 OECD국가 가운데 제일 낮다고 합니다. 행복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학교는 ‘교실붕괴’라는 말로 요약되듯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모든 불상사가 빚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치열한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입시위주의 교육시스템에 있기 때문에 이 낡은 교육제도를 혁파하지 않으면 치유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우리 교사들이 구조적인 모순을 탓하며 최선의 교육을 위한 개인적 차원의 노력을 게을리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구조의 혁신 없이 학교는 바뀌지 않으며
교사는 학생을 교육하는 사람입니다. 교사가 실천하는 교육은 크게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으로 나뉩니다. 이 둘은 ‘수업’과 ‘생활지도’라는 용어로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교사의 본업에 해당합니다.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한 역량이나 자질은 이 두 가지에 관한 것이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이 둘 가운데 우선 수업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우리 직분인 수업과 관련하여 한 교사의 역량을 평가할 때 교육전문가의 위치에 있는 분들의 평과 학부모 또는 학생의 평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장학사나 연구사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수업명인’ 따위의 타이틀을 자랑하는 교사의 수업이 학생들로부터는 인정을 못 받는가 하면, 수업과 관련한 아무런 실적이 없는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는 경우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두 본분이 ‘수업’과 ‘생활지도’라 했습니다. 이번 편지의 주제는 ‘생활지도’입니다. ‘좋은 수업’에 관한 것도 그렇고 교육에 관한 제 이야기의 대부분이 교육현장에서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통념을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좋게 말해 창의적인 글쓰기 혹은 혁신적인 교육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지만 어떤 면에선 다소간에 제 주관에 치우치는 경향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하지만 제가 판에 박힌 이야기를 거부할지언정 일부러 상식을 비껴가려 애쓰는 사춘기적인 반항정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뜻은 없다는 사족을 남깁니다. 오히려 저의 문제의식은 항상 상식적인 차원의 가치론에 터해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이 글의 주제인 ‘생활지도’에 대해서도 상식에 입각하여 이것이 교육현장
이 책의 글들은 제가 짬짬이 제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한 작품으로 묶은 것입니다. 블로그와 연동된 제 페이스북을 통해 글들이 벗들의 벗들에게로 폭넓게 확산되면서 많은 분들에게 읽히게 되는데, 몇몇 분들은 제 글에 대한 비평 또는 소감을 블로그에 남겨주시곤 합니다. 긍정적인 평이 많지만 아쉬움이나 유감을 표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부정적인 평은 대부분 ‘승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 글이 승진파 교사들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말씀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그런 분들은 승진을 욕망하고 그 실현을 위해 애 쓰시는 분들이겠죠. 저는 그런 분들의 지적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 터한 뒤틀린 심사를 피력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게 주관적이라면, 반대로 승진을 포기하
교직경력 20여년 되는 선배교사랍시고 후배선생님들이 보다 신명나고 보람있는 교직생활을 영위하시기 위해 약간이라도 도움 되고자 하는 뜻에서 조언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야든 경험이 일천한 분들이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듣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이 될 수 있나?”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겁니다. 주위에 자신이 신뢰하는 선배교사가 있다면 같은 질문을 건네기도 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아끼는 후배가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냐"고 진지하게 물어온다면 저는 답하기가 무척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대신 저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같은 교사라도 초등교사와 중등교사 사이에는 정체성에 있어 적잖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교대 혹은 사대를 졸업한 뒤 초등교사와 중등교사는 서로 다른 교직사회화 과정을 밟게 됩니다. 무엇이 초등교직과 중등교직의 차이를 낳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차이가 초등학생과 중등학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봅니다. 교사는 결국 학생의 교사입니다. 초등교사는 초등학생의 교사이기 때문에 초등교직의 특수성은 어린이의 발달단계에 따른 특수성에 말미암습니다. 일상적으로 초등교직을 거론할 때 부각되는 부적절한 관점 또한 어린 학생의 미성숙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코흘리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뭐 그리 대단할 수 있겠냐는 식이죠. 이 편지는 이러한 사고가 왜곡된 무지의 소치임을 밝히면서 초등교사들이 자기 존재론에
몇 해 전에 대학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강의의 주제는 ‘교직실무’였습니다. 미래에 교단에 설 사범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저의 현장경험과 이론을 접목하여 “살아있는 교육학”으로 재구성하여 수업을 진행하고 싶었습니다.교재로는 어느 교육학교수가 쓴 [교사를 위한 교직실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은 내용도 있고 현장 실무에 관해서도 잘 소개하고 있지만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교육의 리얼리티가 없었습니다. 시종일관 막연히 좋은 말로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그때는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국가수준의 학업성취도 시험을 쳐서 학교간 성적을 매기던 시기였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과격한 기치를 앞세워 초등학생들에게 문제집 풀이 위주의 보충수업을 시키는 것이 ‘현장교육의
휴대폰 요금제 문제로 전화 상담을 받고 난 뒤 전화를 끊으면서 내가 말했다.“너무 친절하다. 우리나라 전화상담사들은 왜 이리 친절해?”그러자 옆에서 듣던 동료가 “선생님, 친절하면 좋지 뭐?”라고 한다. 그래, 친절 그 자체가 문제 될 게 뭐 있나. 문제는 그 이면에 있는 무엇이다. 진리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눈 앞의 현실 뒤에 있는 무엇을 읽으려 애써야 한다. 다른 나라 서비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친절하지 않다. 이를테면, 대한항공과 유럽항공 승무원들을 비교해보자. 지난겨울에 북유럽 여행할 때 느꼈다. 세 번의 비행기
진보란 무엇인가?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그러나 나는 진보가 무엇인가는 몰라도 진보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답할 것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그의 종들에게 철저히 낮은 곳으로 임하라 강변하셨기에 바벨탑처럼 오만하게 우뚝 솟은 대형건물의 교회엔 진보가 없다. 우리 시대 가장 빛나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체 게바라를 떠올리는 것도 그가 언제나 낮은 곳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혁명을 모르던 철부지 대학생 시절에도 그는 의대생으로서 호사를 부리기보다는 오토바이에 몸을 맡기고 라틴 아메리카의 낮은 곳을 찾았고 나환자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에도 게바라는 국립은행장이나 산업부 장관의 권좌를 뒤고 하고 소총 한 자루 들고 아프리카 콩
‘진보적인 음악이야기’라는 화두로 일련의 글들을 써오고 있다. 통진당 이후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일고 있듯이, 진보의 본질을 감히 말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가 뭔지는 몰라도 진보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진보는 낮은 곳에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핍박받는 이웃의 고통에 무심하면서 어찌 진보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 글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눌리고 그늘진 곳으로 감옥을 이야기하였다.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특별한 공간이 감옥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감옥은 비단 교도소에만 있지는 않다. 고3교실에 밤늦도록 불 밝혀진 학교를 지나칠 때나 첫 휴가 나온 사병이 귀대를 앞두고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든다. 넓게 보면 이 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