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10)

지난 글에서 ‘life guidance’의 본질적 의미가 우리 교육현장에서 왜곡되어 그릇된 방향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논했습니다. ‘삶의 안내’든 ‘생활 지도’든 그것이 복도에서 뛰지 못하게 하고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는 형태는 교육이라 일컬을 수 없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학교 일상 속에서 “교사가 학생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남습니다. 이게 교육학개론에서 다루는 ‘교사론’의 핵심 내용인데, 보통 ‘학급경영’이라는 주제로 논의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생활지도’라는 영역은 이와 무관합니다. “복도에서 사뿐사뿐”이나 학생 두발 단속 따위의 문제를 다루는 교육학이론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육학서적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훈육적 조치를 생활지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픈 우리 학교교육 세태는 한편으로 그만큼 학급경영의 문제가 녹록치 않음을 말해줍니다. 장밋빛 교육학서적이 학교를 성스러운 공간으로 미화하는 것과 무관하게 현실 속의 학교살이는 교사와 학생이 치열하게 부대끼는 일상으로 점철됩니다.

교육학 이론이 아동의 본성을 어떻게 규정하건 간에 교사는 수많은 악동을 만납니다. 교실이라는 공간은 사실상 교사와 학생이 부대끼는 치열한 전투의 장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학급경영의 주체인 교사는 이 기세싸움에서 밀리면 안 됩니다. 스승 된 사람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서도 선량한 대다수의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당사자인 악동을 위해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릅니다. 교사가 권위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권위를 잃으면 교육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최근 혁신학교 진영에서 회자되는 개념으로 ‘경계 세우기’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교사와 학생이 대등한 인격적 주체로 만난다 하더라도 교사와 학생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교사는 교사이고 학생은 학생입니다.

교실은 교사와 학생이 공동으로 학교살이를 해가는 삶터이기에 교사와 학생은 똑같은 인격체로서 수평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학급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은 순전히 교사의 몫입니다. 그리고 학급경영의 성패는 교사의 본업인 수업의 성패로 이어지기 때문에 성공적인 학급경영은 교사의 입장에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 그 자체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성공적인 교육은 교실상황에서 주도권이 교사와 학생 가운데 어느 쪽에 있느냐 하는 문제와 관계있습니다. 이 주도권을 쥐는 ‘장악능력’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 또는 능력임에도 교육학 서적 어디에서도 이를 거론하는 경우를 잘 보지 못합니다.

경계세우기에 실패한 교사의 교실에서 교육이 붕괴하는 장면을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초임교사들이 이러한 우를 범하는데, 아이들을 통솔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휘둘려서 쉬는 시간은 물론 수업시간에도 교실이 난장판이 되곤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심성이 착하고 기질이 부드러운 분이 이런 고초를 겪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무능’의 문제가 아니라 ‘심성’의 문제이며, 심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반대로 선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건 그러한 교사 개인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교실이 총체적 혼란상태로 일관한다면 이것은 그 누구도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착한 선생님이 결국 나쁜 선생님이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겁니다. 선량함은 교사의 중요한 자질이지만,  교사는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선 때론 모진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자신은 물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교사의 퍼스낼리티를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 바, 나는 이것을 “전략적 교사상으로서의 페르소나”로 일컫고자 합니다.

 

 


사람을 뜻하는 ‘person’이란 말은 ‘persona’에서 왔는데 ‘페르소나’는 라틴어로 ‘가면’이란 뜻입니다. 고대 로마에서 배우들이 무대에 오를 때 해당 배역의 캐릭터에 알맞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펼쳤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이런저런 역할극(role play)으로 짜 맞춰진 퍼즐이 아니겠습니까? 이 개념의 창시자인 칼 융에 따르면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고 사회적 관계맺음을 해가는 것은 ‘이중인격’이나 ‘위선’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가장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인간은 동일한 상대에 대해 여러 개의 페르소나로 만납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 맹목적으로 허용적인 태도로 일관하거나 반대로 엄격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아이를 망칠 뿐입니다.

그나마 가정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적절한 역할모형을 수행하면서 균형 잡힌 양육을 실천할 수 있겠지만 교실에서 교사는 이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여성성과 남성성의 균형을 꾀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 논하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인격(페르소낼리티, personality) 유형은 여성성과 남성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을 이렇게 성장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이러한 양성적 페르소낼리티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교실에 벌레가 출현했을 때 (이를테면) 여선생님은 속으로 당혹스럽더라도 아이들 앞에선 놀라지 않는 페르소나로 무장해야 합니다. 반대로 (이를테면) 남선생님이 거친 태도로 그 생명체를 진압하는 과도한 처신을 보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남성성이 강한 교사는 여성적인 페르소나를 여성성이 강한 교사는 남성적인 페르소나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미성숙한 어린 학생들에게 의미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s)로서 교사는 걸어 다니는 교육과정입니다.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이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칩니다. 잠재적 교육과정과 표면적 교육과정이 경합할 때 전자가 후자보다 학생들에게 훨씬 강력하게 다가간다고 하죠. 실제로 우리 삶에서 만난 어떤 선생님을 떠올릴 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도 그 분으로부터 배운 지식내용보다는 그 분의 행신(行身)이 전부가 아니던가요.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 하더라도 완전한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잠재적 교육과정의 실체로서 교사는 자신에게 취약한 페르소낼리티를 끊임없이 개발해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경계 세우기에 실패하는 교사에게 요구되는 페르소낼리티는 남성성입니다. 사실 교육행위는 본질적으로 여성성에 가까움에도 남성적 페르소나로 “무장”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긴 합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아이들이 점점 거칠어져 가고 주의가 산만해 지는 경향성이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아동의 본성에 대한 이론으로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인간의 인성(personality)은 개인적 특성과 환경적 특성의 함수관계로 빚어지지만, 어린 아이의 경우 환경적 특성이 절대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교실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환경은 말할 것도 없이 ‘교사’입니다. 아동의 성향은 교사 변인에 따라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탈(persona)을 바꿔 쓰는 겁니다. 교실이라는 무대에서 아동 또한 이런저런 페르소나를 쓰고 사회적 행위라는 연기를 펼쳐 가는데, 아동의 페르소나는 교사의 페르소나에 따라 선택된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표현이지만, ‘교육 메타포’로 현장에서 흔히 “아이들이 교사를 간 본다”라고 일컫는 사태가 이겁니다. 교사의 페르소나에 따라 조건적으로 아동의 페르소나가 형성되는 일종의 조건반사 기제인 것입니다.

이 음울한 기제를 떨쳐 내고 교실을 교사와 학생이 인간 대 인간으로 부대끼는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교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탈바꿈의 의지 말입니다.

착하기만 한 교사는 아이들을 악하게 만드는 역설을 발생시킵니다. 몇 해 전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을 장악하지 못해서 한 해 내도록 무정부상태로 흘러가는 교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 아이들이 특별히 ‘못된’ 녀석들인 줄 알았는데 그 다음 해에 영어전담을 하면서 만난 그 아이들은 내가 맡은 어떠한 학년도의 학생들보다 순한 아이들임을 알고선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벌이는 상호작용은 부단한 게릴라전투로 점철됩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아이들과의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됩니다. 그 승부처는 3월 첫 주입니다. 한 해 교실살이의 주도권을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것은 이 때 판가름 납니다. 경계 세우기에 실패한 교사가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페르소나로 거듭 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 이 시기입니다.

유념할 것은, 새로운 페르소나로 탈바꿈 하면서 어느덧 그것이 자신의 인격으로 고착되어 기존의 가치있는 자신의 페르소나가 밀려나는 것입니다. 제가 권고하는 페르소나의 변신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으로 그러하자는 겁니다. 교사의 중요한 자질로서 제가 ‘장악력’을 언급하는 것은 아이들을 지배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지배당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는 사족을 남깁니다. 교사의 권위는 스스로 지켜야 하지만 그것이 한 걸음만 넘어서면 자칫 권위주의로 돌변할 위험이 상존합니다. 그래서 늘 교사는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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