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3)

같은 교사라도 초등교사와 중등교사 사이에는 정체성에 있어 적잖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교대 혹은 사대를 졸업한 뒤 초등교사와 중등교사는 서로 다른 교직사회화 과정을 밟게 됩니다. 무엇이 초등교직과 중등교직의 차이를 낳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차이가 초등학생과 중등학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봅니다. 교사는 결국 학생의 교사입니다. 초등교사는 초등학생의 교사이기 때문에 초등교직의 특수성은 어린이의 발달단계에 따른 특수성에 말미암습니다. 일상적으로 초등교직을 거론할 때 부각되는 부적절한 관점 또한 어린 학생의 미성숙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코흘리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뭐 그리 대단할 수 있겠냐는 식이죠. 이 편지는 이러한 사고가 왜곡된 무지의 소치임을 밝히면서 초등교사들이 자기 존재론에 자부심을 갖기 바라는 마음에서 드립니다.
 

 


초등교직의 특성을 논할 때 흔히 회자되는 말이 초등교사는 전문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등교사와 달리 초등교사는 전 교과목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 교과목을 다 다뤄야 하는 입장을 전문성 일탈과 결부 짓는 것은 그야말로 전문적인 관점이 못 됩니다. 오히려 아동의 전인적 성장을 위한 기초교육을 지향하는 초등교육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적 소양은 초등교사의 전문성을 구성하는 필요충분조건이라 하겠습니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전인교육이어야 합니다. 학생을 전인격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먼저 교사 자신이 전인격적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물론 초등교사는 모든 교과에 깊이 있는 식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초등교사가 전 교과목에 갖는 교양의 깊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 그 한계가 곧 초등교직의 전문성을 비껴가는 것도 아닙니다. 초등교육의 본질은 기초교육이고 공통교육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저는 학문 일반의 본질이 그러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학문을 탐구하는 행위를 빗대어 ‘판다’는 은유법을 씁니다. 그런데 삽으로든 포크크레인으로든 땅을 깊이 파기 위해서는 우선 넓게 파야 합니다. 넓게 파지 않고 깊게 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스티브 잡스 이후에 교육계에서 융합과학(STEAM)이니 융합인재니 하는 개념이 급속히 전파되고 있습니다만, 한 부분에만 정통한 지성은 절름발이 지식이며 그 자체로 ‘정통함’ 또는 ‘전문성’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철학자 칸트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했습니다. 이성과 감성, 개념과 직관, 이론과 실천, 이 상호대립적인 범주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느낄 수 있고 느끼는 만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 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가슴을 갖춘 인격의 완성은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예술적 소양을 두루 섭렵하는 통합적인 학문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이렇게 성장해야 하겠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 초등교사가 전 교과목을 다 다뤄야 하는 것은 ‘고역’이 아니라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초등교직을 폄하하는 두 번째로 초등교사는 쫀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달갑지 않은 평론이어서 이삼십대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이 말을 듣기가 참으로 거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초등교사는 쫀쫀할 수밖에 없고 또 쫀쫀해야 한다고 말이죠. 적어도 초등교사에게 쫀쫀하다는 말은 세심하고 섬세하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교사가 스케일이 적고 고지식한 것은 초등학생이 그러한 것과 필연적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어떠냐 하면, 교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운동회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아이들에게 교사가 “저기 보이는 결승선까지 뛴다.”고 하면 아이들은 결승선 근처에 와서 속력을 줄이면서 그 선 위에 딱 멈춰 버립니다. 선생이 시키는 대로 결승선까지 뛴 거죠. 때문에 미성숙한 아이에게 “결승선을 지나쳐도 된다.”는 가르침을 빠뜨리지 않는 것, 이것이 초등교사의 소임인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 입장만을 강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0분 수업을 마치고 좀 쉬려고 하면 너도 나도 달려와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느니 하면서 일러 바쳐대는 것이 초등아이들입니다. 보통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런 행위를 고자질이라 치부해버리겠지만 초등교사는 아이들이 나름 진지하게 제기한 각종 민원을 해결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호민관 노릇도 해야 합니다.

초등교직의 전문성은 이 쪼잔한 일상에 기초해 이루어집니다. 이 세밀한 일상사를 하찮게 생각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진지한 자기 존재론으로 정립하는 것, 초등교직의 전문성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미세한 영역에까지 전문성에 터한 교육실천을 하기가 말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때는 학급을 벗어나 교과전담교사를 오래 해봤습니다. 초등에서 교과전담업무는 학급담임업무에 비해 노동 강도나 스트레스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담교사를 오래 하면서 특정 과목에 대한 수업역량은 발전하는지는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타 교과에 대한 식견이나 학급경영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학급담임으로서 아이들에게 재밌는 이야기와 좋은 노래를 가르쳐 줬을 때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그 반응이나 교실에서 아이들과 치열하게 부대끼는 그 쪼잔한 일상이 그리워졌습니다. 요컨대, 초등교사로서의 총체적 전문성과 거리가 멀어져 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초등교사의 전문성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교육실천과 생활지도를 하면서 길러집니다. 앞글에서 사람은 가르칠 때 자신의 지식이 최고 수준에 달한다고 했습니다. 최고의 지식전문가는 무엇을 쉽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초등교사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쉽게 가르치려고 고민하는 사이에 자신의 지적 역량을 발전시켜 갈 수 있습니다. 교사도 생활 속에서 학습자가 되어 누구로부터 무엇을 배울 때가 있죠. 그때 우리는 간혹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저 분은 왜 그렇게 어렵게 설명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을 탓할 것이 아니라 혹 우리가 우리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교수법의 달인이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초등교사에 대한 세 번째의 평으로 초등교사는 순진하다고 합니다. 순진하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 듣기 좋은 말일 수도 있고 불편한 말일 수도 있죠. 부정적인 의미로 이 말은 ‘잘 속는다’는 뜻으로 씁니다. 실제로 교사들이 의외로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 무엇을 팔러 오는 사람들, 이른바 잡상인에서 시작해서 신용카드나 보험 판촉 활동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학교를 찾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 제일 우호적인 사람들이 학교교사라 합니다. 부정적 의미든 긍정적 의미든 ‘순진하다’는 말은 교사, 특히 초등교사의 성향을 잘 대변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명저 <나와 너 Ich und Du>에서 ‘나’라는 존재는 결코 혼자서 규정되어 질 수 없으며 반드시 ‘나와 너’라는 관계의 형태로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너’로 인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성(becoming)은 ‘너’라는 존재로 말미암습니다. 여기서 ‘나’를 ‘교사’, 너를 ‘학생’으로 바꾸어도 부버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사를 교사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학생’입니다. 교사의 성향이나 정체성은 학생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죠. 매일 흉악범을 상대하는 강력계 형사와 어린 아이들을 상대하는 초등교사가 각각의 직업사회화 과정을 통해 길러지는 모습이 같을 수가 없겠죠. 그것이 좋은 의미든 그 반대 의미든 초등학생인 어린이들이 순진하니 초등교사가 순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아한 문체로 초등교직의 특성을 다소 미화한 측면이 있었으리라 돌아봅니다. 솔직히 우리들 가운데 제가 위에서 말한 고도의 전문성이나 윤리성을 지니고 있는 초등교사가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초등학교 뿐만아니라 대학교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만 내일의 우리 교직삶이 오늘보다 더 나은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자세만 견지해도 좋을 겁니다.

초등교직은 교사가 처신하기에 따라서 초등교육기능공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상존해 있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초등교사는 순박하기만 한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한없이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얄팍한 이익이나 편의를 쫓을 요량으로 이 순진무구한 어린 영혼들을 얼마든지 기만하고 유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아침자습시간에 1학년 아이들을 팔이 아프도록 글씨 연습시켜 놓고선 동학년 교사들은 학년연구실에서 커피 마시며 수업 종이 쳐도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무익한 잡담을 지루하게 뻗치곤 하는 것이 초등교직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는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천국과 지옥 양극단 중의 하나에 속할 수도 있는 것이 초등교사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교사문화라는 측면에서도 중등에 비해 초등 교직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치부도 적잖습니다. 그 하나가 교직원배구대회에 목숨 거는 문화, 친목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풍속도입니다. 그리고 연구시범학교 따위의 행사를 치를 때 내용보다는 형식, 질보다는 양에 치중하는 것도 초등교직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그럼에도 학교 관리자나 장학사들은 초등학교의 이런 경향성들을 미화하고 자찬해대지만, 이러한 습속은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치부이자 교사의 전문성을 좀 먹는 독버섯일 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초등교직은 한없이 편하고 쉬운 직무일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굉장히 고되고 어려운 직무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에선 초등교직의 긍지와 자부심은 전문성의 획득 여부에 달려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했습니다.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얼치기 전문가, 지식 전문가가 아니라 지식 기능공, 교육자가 아니라 지식 장사꾼으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 초등교직입니다. 반대로, 끊임없이 자기연찬 하는 가운데 아이들과 자신이 동반 성장해가며, 지성인으로서 즐거움과 보람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 초등교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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