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목가적 삶에 대한 로망이 있는지라 간간히 고택이나 전원주택을 탐방하곤 하는데, 구미지역에는 의외로 고택이 많지 않다. 18세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이 선산에 있다." 하였을 만큼 인재가 많았고 양반가 역시 많았던 지역이기에 의외가 아닐 수 없다. 

해평면 일선리에 고가들이 많기는 하나 그곳의 고가들은 1987년 임하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전주류씨가 비슷한 지역을 찾아 집단 이주하여 만든 부락이기에 구미 선산지역의 전통가옥이라 보기는 어렵다. 불교 건축물, 유교 건축물, 이주 부락인 일선리의 건축물들을 제외하면 문화재로 지정된 고가는 해평리의 쌍암고택(雙巖古宅)과 북애고택(北厓古宅)이 유일할것 같다.

쌍암고택은 낙동강 자전거길을 따라 구미보 방향으로 가다가  해평솔밭을 약 1KM 앞둔 지점에서 우회전하면 나온다. 지금은 우회하는 자전거길이 생겼으나 불과 두 해 전만 하더라도 이 부락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자전거길을 지나가야만 했었다. 해평리 마을 회관앞과 두 고택 사이에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 회나무가 있어 예사롭지 않은 고택이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수많았던 오고감 속에 이 예사롭지 않은 쌍암고택을 이제야 방문하게 되었는지는 나 역시도 의문이 든다. 가까이 있기에 항상 다음을 기약했었던게 아닌가 싶다.

쌍암고택은 입향조인 전주 최씨 검재(儉齋) 최수지(崔水智) 선생의 후손인 최광익(崔光翊) 선생이 아들의 살림집으로 건축했던 집이라한다. 쌍암고택의 맞은편에 있는 북애고택은 쌍암고택의 북쪽 언덕(北厓)에 지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후일 큰집이 안쪽에(언덕으로 부터 안쪽) 있어야 한다는 정서와 새집이라는 이유로 동생댁이 형님댁과 집을 바꾸자 하여 바뀌었다고 한다. 형제애가 남달랐던 가문의 내력을 알 수 있다.

본래는 안채, 대문채, 안대문채, 사랑채, 사당 등 다양한 부속채가 있었으나 대문채와 부속채들은 소실되었다한다. 이 규모있는 양반가에 대문채는 평대문으로 다소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댁의 종손이신 최열 어르신께 여쭈어 보니 원래의 솟을대문이던 대문채는 허물어지고 난리통에 자재나 인력의 수급이 여의치 않아 평대문으로 지어졌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쌍암(雙巖)고택이라는 이름은 원래 대문앞에 있던 두 개의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문이 있던 땅은 매매되어 쌍암중 하나는 다른 가옥의 담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주초석이 되어 있다 한다. 안채에서 쌍암이 있는 담까지의 거리가 직선으로도 50m는 족히 넘어 보였으니 옛 쌍암고택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만 하다.

 

 

사랑채는 남향을 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좌측의 2칸에는 田자형 모양으로 구분된 온돌방이 있고, 우측 2칸에는 온습도 변화에도 잘 견디도록 우물마루(짧은 널을 가로로, 긴 널을 세로로 놓아 우물井자 모양으로 짠마루)를 깔았다.  대청 뒤쪽 1칸은 한 단을 높여 제청을 마련하였다. 이곳 사랑채의 이채로운 점은 안대문채 바깥의 한단 낮은 터에 지어져 있는점이다. 

 

 

안채는 동향으로 "ㄷ"자에 "一"자의 안대문채를 더해 트인 "ㅁ"자형 구조이다. 안채의 중심인 대청은 6칸 크기로 인근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이다. 안방의 맞은편 건너방을 "웃방"이라 부르고있다. 이 방 옆으로 마루와 방, 부엌이 있는데 부엌은 안방 옆에 있는 부엌과  대칭을 이루고있다. 안방과 건너방의 문 앞에는 모두 쪽마루가 연결되어 있어 신을 신지 않고 어디서나 쉽게 드나들 수 있다. 대청 왼쪽 윗벽에 설치된 5단 탁자형 시렁이 이채로운데 시렁은 세면도구 등 간단한 소도구를 얹어두는 구실을 하고있다. 

사랑채를 안채와 분리해 한단 낮은 위치에 별당형으로 꾸몄던 점이나 안채 전체와 연결된 쪽마루. 그리고 보기드문 시렁 같은 설비는 모두 집안 여인들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이는 최광익 선생의 실학 정신과도 무관하지 않을것 같았다. 

 

 

쌍암고택을 둘러 보다보면 이곳이 우리 근대사의 애환이 서린 한 현장이었음을 알리는 빗돌이 하나가 눈에 띈다. 빗돌에는 아래와 같이 세겨져있다.

甲午東學農民軍集結址 朝鮮開國 五百三年十一月

1894년 혼란한 시대 상황을 피해 해평 최씨 가문은 경남 합천으로 피난을 떠나 있었다.

쌍암고택은 당시 일본군이 해평에 설치한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다. 일본군들은 이곳에 머물며 너른 해평들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쌀을 강제징수해 인근에 있는 강창나루와 왜관 등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창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갑오전쟁 농민의병은 해평 쌍암고택에 설치된 일본군 탄약기지 본부를 괭이, 돌맹이, 나무몽둥이 등으로 습격할 계획을 하였다.  당시 선산의 향리가 일본군에 지원 요청을 하여 대대적인 공격에 의해 농민군은 선산에서 밀려나고 이후, 경북의 동학농민군은 민보군과 일본군, 진남영병에 의해서 궤멸되었다한다.

1세기를 훌쩍 넘긴 시간 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결정을 거쳐, 동학 농민군의 후손들과 쌍암고택의 종손은 작은 표석에 우리 역사의 아픔과 진보의 흔적을 세겨 놓았다.

당시 지주이자 양반가였던 쌍암고택과 봉건제도 개혁의 깃발을 내세웠던 동학농민군은 서로 대립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쌍암고택의 종손이신 최열선생은 그 역사의 자취를  흔쾌히 허락하셨으니, 외세에 대항한 동학농민군에 정신은 반상없이 같은곳을 향했으리라 믿는다.

마루위 현판에 새겨진  효사와(孝思窩)라는 글귀는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는 의미이다.

 

 

사진속 텃밭은 고택내 작은 연못이 있던 자리라 한다. '얼마나 호화롭고 아름다운 고택이었을까?' 머리속으로 그려보았다. 구미에 몇 없는 고택이 원래의 모습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관리되고 있음에 아쉬움이 컸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고택의 문화재를 노린 강도가 든적도 있다하니 보안장치의 설치가 우선 시급해보였다. 문화재 지정으로 생긴 피해는 인근주민들에게도 있었는데, 건축제한 등 사유재산 침해가 일어났다고 한다. 인근 주택들에 대한 적절한 대책과 함께, 소실된 부속건물들과 정원이 지방과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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