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가 나고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곳. 어디일까? 나는 뒷간에, 변소에, 아니 화장실에 있다. 그 이름처럼 한국의 화장실은 화장을 잔뜩 한 고상한 공간으로 격상되었다. 한국인들의 모양과 행태가 백인화된 만큼이나 그들의 변소도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다.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은 더 이상 요구사항이 아니라 당연한 조건이다. 이제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쭈그리고 앉아, 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똥을 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도를 찾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문명화의 성취로 읽히는 이 현실은 사실 오만한 삶의 양식에 철저하게, 처절하게 흡수되었다는 증거다.

워윅 앤더슨이 그리는 20세기 초 필리핀의 풍경은 한국을 비롯한 다른 곳들에서 비슷하게 일어났을 과정을 짐작게 한다. 그곳에서 미국인들은 ‘더러운’ 필리핀 사람들을 교화하는 임무에 골몰한다. 그들의 눈에 덤불에서 똥을 싸고, 아무 데나 똥통을 비우고, 손도 씻지 않고, 어쩌다 돌로 몸을 닦고, 비누도 스푼도 사용하지 않는 필리핀인들은 그저 구멍과 같은 존재, 청결한 미국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존재로 비친다. 우월한 식민주의자들은 강제 소독과 미국식 변소를 통해 미개한 구멍들을 문명화, 식민화, 의료화한다. 전 세계를 쓰레기통으로 만든 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구린내를 이런 식으로 떠넘겼다.

이 전통은 우리 곁의 화장실들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내 똥은 내가 모르는, 아니 알 필요가 없는 누군가에게 떠맡겨진다. 크리슈나프리야의 전시에서, 철도역을 청소하는 여성에 관한 작품 옆에 한 불가촉천민 젊은이가 남긴 글은 대략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맨손으로 나의 할아버지가 똥을 치우고, 그것은 피투성이처럼 그의 손에 적셔졌다. 밤에, 같은 손으로, 그는 나의 아버지를 먹였고, 같은 손으로 스스로 먹었다. 그것이 습관화되어, 나의 아버지는 똥을 치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아버지도 똥을 치웠다.’ 그의 결론은 ‘자기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 아니면 모두가 같이 똥을 치워서 그가 우리 중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끄럽기 그지없는 과정을 거쳐 내 똥은 결국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떠맡겨진다. 너무나도 깔끔한 우리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바깥’으로 ‘똥’을 밀어낸다. ‘안의 바깥’인 화장실로, 쓰레기장으로, 하수처리장으로, 위성도시로, 시골로, 개도국으로, 자연으로. 하지만 똥으로부터 해방되려는 기도는 좀처럼 실현되기 어렵다. 그렉 케네디가 말하듯 똥은 죽을 운명의 유기체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똥은 ‘유기적 똥’도 아니다. 유해물질로 범벅되어 있을 뿐 아니라 늘 휴지와 같은 ‘위생용품’과 섞인다. 나는 자연이 내어준 것을 먹고 똥을 되돌려줄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하게도 쓰레기를 돌려준다. 내가 만들었지만 내 곁에서 사라진 오물들은 구천을 떠돌다 다시 나에게 들러붙는다. 나의 일부이자 내가 그 일부인 곳들에 오물을 떠넘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근본적 착각이다.

 

고라니 똥
고라니 똥

한국의 ‘똥 담론’들은 똥을 가축의 먹이나 농사의 거름으로 활용한 ‘생태적’ 전통을 찬양한다. 자원을 한없이 낭비하고 똥으로부터 소외된 현대의 빛나는 변소보다는 덜 유해하겠지만, 그것은 또다시 똥을 규율하고 독점하며 명령한다. 산과 강과 바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똥의 속성인데 말이다. 사람과 사람만큼 많은 변소를 축적한 식민 문명은 그렇게 똥을 가두고 똥의 존재를 한정한다. 이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똥이 해방되는 날, 비로소 우리도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구멍이 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글 _ 김혜나 대구대학교 연구중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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