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러 기행(奇行) 중 하나를 고백하고자 한다. 나는 한때 별 목적도 가야 할 곳도 없는데도 이따금 한 시간이 넘도록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나 열차를 타는 사람이었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차창 밖의 거리와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스물셋 무렵 이러한 독특한 내 여행 방식을 변주할 만한 새로운 여행 경로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인근 지하철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를 탄 뒤 김포공항역에서 내려 공항철도로 환승한 후 다시 인천공항까지 가는 행로로서, 십여 년 전 당시 내가 살고 있던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편도 1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저렴한 삯에 ‘나들이’ 기분을 내기에 딱 맞춤한 정도의 여정이었다.

 

사진 달팽
사진 달팽

그때 나는 이른바 ‘임고생’으로 불리는 수험생이었기 때문에 나의 배낭에는 온갖 전공 서적과 문제집이 들어있었다. 그룹스터디에서 읽어야 하는 그 주의 책을 정신없이 읽다가 열차가 지상으로 운행되는 구간에 이르러 창밖을 바라보면 논밭에 전봇대가 서 있는 풍경이 보였고 홀로 우뚝 선 아파트와 지붕 낮은 집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열차가 인천공항 역에 다다르면 캐리어를 끌며 여권과 보딩패스를 쥐고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곳의 의자에 한참 앉아 책을 읽거나 기출문제집을 풀었다.

수험생의 나들이 장소로 공항이 적합한 이유는 첫째, 입장료가 없고 교통비가 적으며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있는 곳이며, 둘째, 꾀죄죄한 옷차림과 며칠 못 감은 머리로 배낭을 옆에 두고 혼자 앉아 책을 읽다 침을 흘리며 졸고 있어도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으며, 셋째, 완벽한 공조 시스템과 철저한 화장실 위생 관리로 인해 누구나 원하는 얼마만큼이든 쾌적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에겐 그런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꾸깃꾸깃한 일상이 활주로처럼 쫙 다려져 있고 눅눅하게 얼룩진 열패감은 알맞은 온도와 습도 속에서 보송보송하게 관리된 곳 말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시절을 견디게 하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머릿속에서 민원이라는 낱말을 굴려보며 그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하고 있다. 민원을 제기하는 일은 주민이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 속에서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질 때 행하는 중요하고 때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고, 나는 이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암시로 오염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구조적 실패에서 비롯된 불안과 그 부산물로 생겨난 폐기해야 마땅할 감정을 모조리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그릇된 방식으로 자신의 명예와 존엄을 복구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요구는 ‘악성’ 민원이라고 분명히 지칭해야만 할 것 같다.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안전망 없는 나라에서,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사회적 피로는 어딘가로 모이고 흐른다. 해소되지 않는 울분과 나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과 감정의 미적지근한 잔여물을 받아줄 만한 상대를 겨냥하며 가장 낮은 곳으로 고여 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트의 판매사원과 여객기 승무원, 콜센터 직원의 슬픔이 무엇인지 안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초등학교 교사의 고통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죽음의 의미가 부디 축소되거나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진 설명: 2018년 2월의 어느 날, 삶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친구가 있던 파리로 도망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날, 공항철도 안에 울려 퍼지던 아코디언 소리.〉

 

글_ 달은, 사진 _ 달팽




※ 뉴스풀과 달팽이트리뷴 기사 제휴로 이 글을 게재합니다. 달팽이트리뷴은 포항 효자동에 있는 달팽이책방에서 발행하는 신문입니다.

◈ 달팽이책방 소식이 궁금하면 여기로!

페이스북 facebook.com/bookshopsnail

인스타그램 instagram.com/bookshopsnail

문의 _ 카카오톡 ‘달팽이책방’

이메일 snailbooks@naver.com

인쇄비 후원 _ 새마을금고 9003-2349-2289-3 김미현(달팽이책방)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