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의 꿈은 꽃과 열매이다. 청한 적 없는 삶이었어도 이왕 심겼으니 사는 동안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원한다.

뿌리가 원하고 바라며 그리던 꽃과 열매는 그가 아주 여리고 연약하여 아주 작은 힘으로도 금세 부러지기 쉬웠던 날들에도 그의 꿈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의 꿈은, 그러니까 뿌리의 욕망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아주 오래전 오래된 누군가들의 소망과 낙담 환희와 번뇌가 역동하며 만들어 낸 그림이 뿌리가 기억하기도 전 태초의 기억 어딘가에 각인된 것은 아닐까. 응축된 원형의 기억은 몸을 옹송그린 채 어둡고 낮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번역 불가능한 언어로 꿈에서 상영되거나 감각의 물리를 뛰어넘는 ‘직감’이라는 이름으로 결정적 장면에서 우리를 매혹하고 움직이게 한다.

뿌리는 기억 이전의 기억, 삶 이전의 삶과 ‘여기, 지금’의 나를 이어주며, 내 꿈의 탄생 설화가 되고 내 이상의 자궁이 된다. 모든 것이 충만한, 결핍이 없는 상태에 대한 욕망이 우리를 추동한다.

그러나 모든 꽃에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꽃들은 뿌리가 없이도 화사하고 화려하다. 향기가 없지만 정교한 솜씨로 만든 꽃잎과 이파리는 가히 눈을 속일 만하다. 꽃잎의 표백된 미소와 균질한 표정 아래엔 끈적한 촉감을 손끝에 남기는 풀색 테이프로 감긴 채 연결된 초록색 철사 끝이 날카롭다.

 

사진 달팽
사진 달팽

 

뿌리에서 핀 꽃에게도 뿌리 없이 피어난 꽃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삶은 계속된다. 삶의 무게가 유난히도 무겁고 고단한 밤에는 산다는 게 꼭 끄지 못하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느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다리가 움직여 달리는 것이 아니라 관성이 내 등을 떠미는 기분. 아침이면 눈을 떠서 옷을 입고 어디론가 갔다가 같은 시간에 다시 돌아와 씻고 잠드는 같은 나날들, 유령의 시간들. 그 속에서 불현듯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솟구치는 생각, 그러나 또다시 망각과 등속운동-.

러닝머신을 내려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둘뿐이다. 러닝머신의 전원이 꺼지거나, 온몸이 멍과 상처투성이가 되는 한바탕 소동을 각오한 탈출-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낙법을 익혀두는 것이 좋을지도-죽음 아니면 저항이다! 그 어느 것도 만만찮군.

나는 죽고 싶지는 않으므로, 저항 쪽을 택하겠다. 그런데 또 나는 대단히 대범하거나 비범하지도 않으므로 나의 ‘저항’이란 격렬하고 완강하기보다는 온건하고 고요한 ‘버팀’에 가깝다고 정정해야 하겠다. 나를 잊지 않기 위한, 보다 나로 살고자 애쓰는 버티기. 등속의 직선 운동들 사이에 내가 분투하며 찍어둔 한 점 한 점들이 언젠가 밤하늘을 수놓은 별자리처럼 이어지고 빛나기를. 아니, 빛나지 않아도 괜찮겠다. 내가 찍은 점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삶과 시간의 거대한 급류 곁에 여기저기 작고 작은 실개천을 내어둘 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 사진 설명: 아름다운 나의 옛 직장 서울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에서 2007년 가을에 찍은 사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최순우 선생이 살던 한옥을 보전하여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는 이곳은 봄이면 매화와 모란이 피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생강나무와 산국이 아름답다.



 

글_달은, 사진_달팽

 


※ 뉴스풀과 달팽이트리뷴 기사 제휴로 이 글을 게재합니다. 달팽이트리뷴은 포항 효자동에 있는 달팽이책방에서 발행하는 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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