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시기, 아이와 둘이서만 종일 지내니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 늘 라디오를 켜두었다. 나에게 허용되는 외출의 범위 역시 극히 제한적이었다. 영유아 건강검진을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간 병원, 일과를 마친 아이를 픽업하러 가던 어린이집. 이런 곳들에서 나는 누군가의 보호자, 혹은 “oo맘”으로 불렸다. 출산과 양육의 시기를 통과하는 동안 내 이름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인 K는 얼마 전 둘째 아이의 백일을 맞았다. 에게? 싶은 한 줌의 시간이기는 해도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법적으로 보장은 되는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둘째 아이에게 해당하는 휴직까지 모두 쓰는 직원은 선례가 없었고 어린아이 둘을 돌보면서 근교에서 서울 시내로 장거리 출퇴근을 감당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라며, 휴직을 마치면 아마도 자진하여 퇴사하게 될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결혼과 출산, 양육을 선택하는 여성들은 이름을 잃는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누군가의 양육자로서만 기능하거나, 일과 돌봄의 양립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사회적인 나를 포기하는 일을 종용 받는다. 엄마 됨을 선택하는 순간 존재가 지워지고 여성들은 유령이 되는 것이다. 여기, 이름이 삭제된 채 나날이 분투 중인 엄마들, 그리고 일하는 여성과 ‘지방’이라는 일견 비가시성의 총체로만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조명하는 시선이 있어 소개한다.

딸이 신생아였던 시절, 아이를 안고 있으면 사람들은 아이가 잘 자는지, 잘 먹는지 궁금해했지만, 누구도 나의 수면이나 식생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2년 차 육아휴직은 무급이었다.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일을 중단한 시기 동안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배우자에게 미안하게 느껴지는 이상하고 속상한 밤들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었다. 아이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볼과 팔다리를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나날이 커가는 아이가 너무나 어여쁘고도 사랑스러웠지만, 아이를 집중적으로 양육하던 시기의 내가 온갖 좌절과 혼돈, 당황스러운 감정들과 함께 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광인처럼 양극단의 감정을 오가는 가운데, 채 다스리지 못한 감정으로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짜증을 내기라도 한 날에는 무구한 얼굴로 잠든 아이를 바라보다가 죄책감과 자기모멸감이 뒤섞인 채로 울다 잠들기도 했다.

『분노와 애정』(시대의 창, 모이라 데이비 엮음)은 도리스 레싱, 실비아 플라스, 어슐러 르 귄 등을 포함한 여성 작가 16인이 엄마됨에 관해 이야기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모성애의 신화를 해체하며 엄마됨의 슬픔과 분노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문장들은 그것들이 비단 나만의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구원한다.

앞서 이 글에 등장했던 K의 사례처럼 일하는 여성들은 삶의 분기점마다 조금씩 휘발된다. 결혼을 기점으로, 출산을 기점으로, 그러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시기를 정점으로 직장에 함께 발을 들였던 동료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 일하는 여성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게다가, 일-여성-지역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0에 수렴할 정도이다. 이는 서울을 제외한 지역들에 일자리의 개수가 부족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부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하였다기보다는, 누구도 지역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존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에서 연유한 것일 테다.

 

 

‘달팽이책방 지기’가 참여하는 <지방령: 지방 여성이 쓰는 일의 연대기>는 ‘지방’에서 살며 일하기를 선택한 두 여성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로, 지역에서 일하며 자신만의 삶을 일궈가는 여성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매 회차 방송을 듣고 나면 암흑같이 검은 도화지 위에 빛나는 하얀 점들이 하나씩 찍혀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름을 잃은 별들의 자리를 밝혀주는 하얀 점들은 언젠가 이어져 별자리가 되고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며 희망이 될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참신하고 다채롭게 구성되는 내용이 알차며, 두 진행자의 티키타카가 재미있고 듣기에도 편안하다. 낡은 서사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그 위에 덧씌워 새로이 써나가는 그들의 연대기가 몹시 귀하다.

 

글 _ 달은

 


※ 뉴스풀과 달팽이트리뷴 기사 제휴로 이 글을 게재합니다. 달팽이트리뷴은 포항 효자동 〈달팽이책방〉에서 발행하는 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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