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다. 내 명의의 초가삼간도 없는 나는 빈대 때문에 서서 지하철 타고 있다.

나에게 빈대란 속담에나 나올만한 먼 종류의 이야기였다. 작년 가을, 유럽에 베드 버그(유럽 빈대)가 유행한다는 기사에도, 유럽 여행객과 유학생들의 빈대 증상 후기를 볼 때까지만 해도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대학 익명 게시판에서 대구에 있는 기숙사에 빈대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속담의 빈대와 유럽의 베드 버그는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빈대가 나왔다고 하는 기숙사는 내가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 노선과 연결된 곳이었다. 눈앞, 아니 지하철 앞까지 닥쳐온 빈대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고작 빈대에 유난이라고 생각하기엔 나는 전염병으로 수능 날짜가 밀린 세대였고, 잠깐의 안일함이 빚어낸 전염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옷과 패브릭 포스터가 가득한 나의 작은 자취방은 빈대가 창궐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편리하기만 했던 지하철이 갑자기 위험 구역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내 몸과 자취방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곧장 빈대 예방과 관련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외출 후 반드시 옷을 깨끗하게 털고, 햇볕에 말리고, 건조기의 고온 살균 코스를 이용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능한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말고, 접촉하지 않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였다. 당장 내일도 등교하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야 하건만, 빈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가지도 말고 접촉하지도 말라니.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나는 자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등교는 물론, 아르바이트를 갈 때나 약속이 생겼을 때도 지하철이 없으면 발이 묶이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안일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근시일 본가에 내려가 고향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혹시 나 때문에 빈대가 전국적으로 더 확산이 되면 어떡하지? 코로나 확산 초기 때 보균자들이 질책을 받던 것이 계속 생각났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빈대로 인한 ‘국가 비상사태’가 일어났다. 기나긴 고민에 휩싸인 끝에 서서 지하철을 타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등하교에 20분. 출퇴근에 40분. 하루에 총 1시간은 서서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빈대의 감염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코로나 예방 마스크 쓰기처럼, 나만의 은근한 빈대 예방 지하철 서서 타기가 실행되었다.

첫 삼일 정도는 서서 지하철을 타는 것이 불편했다. 널찍한 자리와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 혼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곧 고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경각심을 가졌다. 고향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그런 생각으로 서 있었다. 일주일 정도가 흐르고 난 이후로는 서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손잡이와 봉을 어떻게 잡고 있어야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출입문 옆쪽의 기둥에 기대어 서는 요령도 생겨났다. 이때부터는 서 있는 것보다 “여기 자리 있어요, 학생.” 하고 권유해 주시는 걸 거절하는 게 더 힘들었다. 거절할 때 괜히 ‘빈대 때문에 앉을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답하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승객분들에게 불편함이나 불쾌감이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가방이 커서 앉아 있기 힘드네요.’ ‘치마가 짧아서 앉아 있기 힘드네요.’ 등 둘러서 거절하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었다.

 

빈대 감염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협력과 참여가 있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서서 지하철을 타는 것도, 집에 들어가기 전 옥상에 올라가서 햇빛에 옷을 말리는 것도, 스타일러가 없어서 스팀다리미로 나름의 고온 소독을 하는 것도 전부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실천이다. 나는 빈대 예방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지 않고 개인의 영역에서 멈추었다. 문득 이런 것이 MZ 세대의 사고인 걸까 싶었다. 빈대 감염이라는 사회 단위의 문제를 해소하고 싶어 하면서도 이것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협력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이 실천하는 그 행위의 목적이 오롯이 개인의 안위와 불안감 해소에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이 개인적인 행위가 사회 전체에서 보면 미약한 도움이 되는 행위이다. 생각할수록 요상한 행동 양식이다.

이 행동의 본질을 찾아가다 보면 빈대가 확산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대의 명목에 내가 전염 원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민폐를 끼쳤다고 혼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만들어진 나 혼자만의 무척이나 진지한 지하철 서서 타기. 참으로 MZ스러운 배려이자, 기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은 양보하면 호구 취급을 당한다는 심보가 낭자하다. 하지만 이런 양보 속에 우리는 ‘나를 위하는 마음’을 나름대로 챙겨가고 있는 것 아닐까.

빈대 이야기가 잠잠해진 지금도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서서 이용하고 있다. 만약의 빈대 예방 목적도 있고, 노약자와 유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내 안의 도덕적 성취감을 채우기 위해 서서 가고 있다. 자리를 한 번 양보하면서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해 내다니.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이기적인 배려인가. 이걸로 나는 양보하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았다.

최근 서울 지하철 노선에 좌석 없는 칸이 시범 운영이 되고 있다. 혼잡도를 낮추기 위해서 시행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이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쩐지 ‘내가 하지 못하면 남도 하지 못한다.’ ‘다 같이 힘들자!’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의자를 모조리 없애 버린다면 의자에 앉지 못해 아쉽다는 마음도 사라지겠지만, 누군가의 배려하는 선행을 통해 내 하루를 좀 더 뿌듯하게 만들 수 있는 소소하고 이기적인 따스함까지 빼앗아간다고 생각한다. 양보하고 배려하자. 그것이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는 소소한 일이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나를 위한 마음’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호구가 되지 않는다.

 

글 _ 최가은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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