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알고 있는가.
나에게 있어 역사란 교과목이었으며, 시사 뉴스를 이해하는 교양 지식이었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구성되기까지의 흐름이나 그 맥락이었다. 그러나 평화디딤돌이 손 위에 올려진 순간, 묵직한 무게감이 가슴 한구석을 짓눌렀다. 내가 손에 들었던 역사는 교과서의 활자가 아니었고, 흐름과 맥락이라는 말로 설명될 정도로 가볍지도 않았다. 고 신용근 님의 고향과 그를 기억하는 유가족들. 그 공간이 주는 기억의 감각은 두 뼘 가까이 되는 디딤돌 동판에 한 사람의 인생의 무게를 담았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언어가 아닌 역사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2022년 10월 1일.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를 기억하기 위한 ‘평화디딤돌 놓기’ 프로젝트가 경북 경산 평기 1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감사한 기회로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 동네 사람’이라는 문구와 함께 피해자인 고 신용근 님의 성함이 쓰인 디딤돌 동판은 쾌청한 날씨 아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묵념을 거쳐 유족분들 곁으로 전달되었다.
한 사람의 무게가 담긴 디딤돌이 벽에 걸리고, 유가족인 아드님이 한 말씀을 하셨다. ‘부모님께 효도하세요. 좋은 것을 사드리는 게 효도의 전부가 아닙니다. 물 한 수저 떠다 드리는 것도 효도입니다.’ 아드님의 말씀은 교과서나 역사저널에 소개된 수백 년을 관통하는 거창한 흐름도, 연설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그리며 내뱉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후회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전해 듣는 순간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던 오키나와 군노무 강제 동원 희생자의 이야기는 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기억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은연중에 역사를 몇백 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흐름이나 거시적인 힘 따위로 생각해왔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날 내가 보고 들은 역사란 지극히 한 개인에 대한 기억이었다.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역사란 사실 이렇게 작은 개인의 이야기가 뭉쳐 거대한 밧줄처럼 엮인 것일 뿐이었다. 거대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건 가닥가닥의 이야기와 그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들은 백합공원 위령비에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동포들의 이름을 새겼다.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어머니의 태도로 엿들었으며 그들 개개인의 기억은 어느덧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까지 닿았다. 나는 이번 계기를 통해 개인의 이야기가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역사라는 커다란 매듭으로 묶이는 것을 확인했다. 기억은 그렇게 역사가 되었다.
글 _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최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