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기 분말 속에서 발견된 노동자…” 故 하중근 열사 13주기 추모제
“소화기 분말 속에서 발견된 노동자…” 故 하중근 열사 13주기 추모제
  • 김용식
  • 승인 2019.07.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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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공권력에 의한 명백한 타살, 故 하중근 열사 사망 원인 밝히고 책임 물어야”

 

△ 26일, 포스코 협력회관 앞 추모대회. 사진 김동기

26일 오후 4시, 형산로터리 포스코 협력회관 앞에서 열사정신 계승! 노동탄압 분쇄! 민주노조 사수! 故 하중근 열사 13주기 추모제가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포항지부 주최로 열렸다.

추모제를 주최한 황봉우 건설플랜트 포항지부장은 여는 말에서 “열사를 추모한다면서도 하중근 열사의 위패가 따로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고, 추모제를 준비하면서 노동조합 간부들과 다녀왔다. 하지만,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매년 추모 행사만 해왔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섰다”며, “하중근 열사의 뜻을 이어 이제는 우리들의 단결된 힘으로 노동조합을 지키고 강화해 나가자”고 말했다.

김태영 민주노총 경북본부장은 “열사 정신이 민주노조를 지키고 확대하는 것인데, 노동을 존중하겠다는 문재인 정부 들어 노동조합을 지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며, “민주노총의 조직된 힘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쟁취해 나가자”는 말로 추모사를 대신했다.

2006년 파업투쟁과 故 하중근 열사 투쟁 당시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았던 이지경 조합원은 “(하중근 열사만 생각하면)가슴이 미어진다. 엊그제 같은데…(침묵)…13년이 흘렀는데, 노동자들의 외침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민주노조 사수, 노동 탄압 분쇄,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는 그 외침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때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조합원들에게 늘 미안하다. 하중근 열사 앞에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고 한 후 말을 잇지 못했다.

△ 故 하중근열사에게 추모하며 헌화하는 노동자

2006년 투쟁 당시 포스코 본관 점거 농성에 합류하여 구속되었던, 김병일 민주노총 경북본부 지도위원은 “하중근 열사 사건은 9시간씩 일하는데도 관행이니 근로기준법 위반이 아니라는 노동부와 성실교섭 약속을 뒤집고 대체인력을 투입한 포스코, 무자비한 진압으로 사람을 죽인 노무현 정부의 경찰이 빚은 참극”이라고 지적했다. 

김병일 지도위원은 “늦었지만 하중근 열사 사건에 대해 포스코와 공권력의 책임을 묻는 것이 2006년 포항 건설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제대로 살려내는 것이며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제는 故 하중근 열사가 2006년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의 파업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쓰러졌던 장소인 형산로터리 포스코 협력회관 앞에서 엄수됐으며, 건설플랜트노조 포항지부 조합원들과 민주노총 경북본부,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소속 조합원 등 7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추모대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 故 하중근 열사 2006년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 파업투쟁

 

△ 故 하중근 열사 영정

故 하중근 열사는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에 가입해 제관분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2006년 포스코 현장의 토목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하면서 관행적으로 강요되어 오던 9시간(오전 7시 출근) 노동 거부를 선언하자 사용자 측은 5월 30일 300여 명을 일시에 해고했다.

포항지방노동청에 진정했으나 관행을 이유로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답을 듣게 되자 연일 항의집회를 이어갔다.

2006년 7월 1일,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 4천여 조합원은 주5일제 시행에 따른 대책과 임금인상, 다단계 하도급 구조 청산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11일 포스코 측과 성실교섭에 합의하여 잠시 평화가 오는 듯했으나, 13일 새벽 사측은 합의를 비웃듯 불법적인 대체인력을 투입했고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포스코 본사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7월 16일, 열사는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주최로 형산강로터리 포스코 협력회관 앞에서 열린 ‘건설노동자 승리 결의대회’에 참가했다. 경찰은 이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열사는 방패로 뒷머리 우측 부근을 가격당해 쓰러진 후 경찰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물러간 후 주차된 차량에 의식을 잃고 기대어진 채 발견돼 급히 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경을 헤매던 열사는 몇 차례의 수술을 받기도 하였으나 결국 8월 1일 새벽 운명하였다.

열사가 운명하자 파업투쟁 과정에서 전국 5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 파업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폭력 살인 정권 규탄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한 건설노동자 故 하중근 열사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응했으며, 유족의 요청으로 37일만인 9월 6일 장례가 치러졌다.

유족과 열사대책위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故 하중근 열사의 부검에서 외부의 강한 물리적 충격에 의한 뒷머리 좌측(좌측 후두부)의 두개골 골절과 대측손상(뇌가 강한 외적 충격이 있었을 때 그 반대쪽으로 힘이 가해지면서 나타나는 뇌 손상)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이 드러났다. 이외에도 경찰의 방패로 찍힌 자국이 선명한 우측 뒷머리 부분의 찢어진 상처와 갈비뼈 골절, 양쪽 팔 부위 피하출혈 등이 확인되면서, 열사대책위원회는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방패에 맞아 쓰러진 상태에서 집단폭행과 함께 소화기로 후두부를 가격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대응에 나섰다.

열사대책위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고, 인권위는 8월 말 현장 조사와 진압경찰 및 지휘부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11월 27일 하중근 열사의 사망 사건에 대하여 경찰의 과잉 진압을 지적하면서 경찰의 집회, 시위 강제해산과정에서 열사가 사망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인에 대해서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후 유족과 열사대책위원회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열사대책위원회와 건설연맹 등이 1년 넘도록 집중집회 및 동시다발 1인 시위를 이어갔으나 2주기 추모대회 직후인 2008년 8월 14일, 서울지방법원은 ‘증거불충분과 증거능력 부족’을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2009년 12월 1일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경찰이 쏘아댄 뿌연 소화기 분말 속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한 故 하중근 열사. 정부는 69명의 수사관을 참여시켜 메머드급 수사본부(‘포항 건설노조원 변사사건 수사본부’)를 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형식적인 수사만 진행되다 수사단마저 슬그머니 해체했다. 이후 1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장기 미제사건이 되어, 현재 ‘의문사’로 남아 있다. (※작성 김용식 / 출처 민주노총 경북본부)

 


< 故 하중근 열사 약력 >

1962. 7. 11 경북 포항 호미곶 구룡포(현 포항 남구 대보면)에서 태어남
1981 포항 수산고등학교(현 포항해양과학고) 졸업
1981 원양어선에서 항해사로 10여 년 근무
1993 건강보조식품 사업
1995 소형 통발어선 운영
1997 포항건설노조에 가입해 제관분회 소속으로 활동
2006. 7. 16 포항 형산강로터리 집회에서 경찰폭력으로 쓰러져 뇌 손상 판정
2006. 8. 1 새벽 2시 55분 뇌사 상태에서 끝내 운명
2006. 9. 6 포항에서 건설노동자장으로 장례. 화장 후 고향 앞바다에 뿌려짐